山行..그리움따라 459

경남거창.우두산(牛頭山1,046m/ 고견사주차장- 마장재- 우두산 상봉- 의상봉- 고견사- 견암폭포- 주차장/6K. 5H).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필자도 나이를 들어가는가... 산행을 하다 사찰에 들르게 되면 거기서 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축물이나 조형물보다 작고 소백하지만 세월이 묻어 있는 작은 탑, 건물에 환호하게 된다. 철근콘크리트나 강철빔을 사용하면서도 100년도 못 가서 헐어버리는 이 시대에, 고려시대 나무로 지은 집이 700년 넘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집들을 보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사찰의 안내문에 따르면 그 건물을 소개하면서 주심포 양식, 맞배지붕... 등 소개하며 전통한옥 지붕모양을 설명하는데 이를 정리해 보자. 먼저 기본형 세 가지. * 맞배지붕 지붕의 앞면과 뒷면을 사람인(人)자 모양으로 배를 맞댄 모양으로 지붕형식 중에서 가장 심플한 기본형이다. * 우진각(隅進閣)지..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선생 사적지를 찾아서..(무선사- 무기연당-덕연서원-묘지) & 함안새발자국 화석. 칠원향교.

서원(書院) 조선 중기부터 민간에 보금되었던 선비들의 사학기관이다. 선현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선현제향(先賢祭享)과 학문연구로 인재를 양성하기위해 세웠는데 제사를 위한 사당과 서재, 기숙사, 도서관등으로 구성되었다. 서원이라는 말은 중국 당나라 때 설치된 '여정서원, 집현전서원'등에서 유래했으며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서당, 서원등을 장려하였고 유명한 성현을 기리기 위한 서원은 임금이 현판과 토지등을 주어 이른바 ‘사액서원’이 여러 생겼났다. 사당과 서재등을 갖춘 최초의 서원은 1542년 ‘주세붕(周世鵬, 1495 ~ 1554)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인데 그는 서원을 세워 유학자 안 향을 기리게 된다. 서원은 대 유행처럼 늘어났고 이른바 양반 가문들은 너도나도 세웠다. 인..

경남창녕.화왕산(火旺山, 756m/비들재-장군바위-배바위-화왕산성-정상(왕복9K, 4.5H)

1968년 12월 3- 5일 필자는 '국민학교' 6학년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3일은 필기시험 200문제, 4일은 체력장 12점(턱걸이 6개, 던지기32m, 넓이뛰기183Cm, 달리기60m(10.2초),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던 5일은 면접이었다. 그 당신 명문으로 꼽히던 청주중학교 합격을 위해서는 체력장 12점을 다 받고, 필기시험 200문제중 7문제 이내로 틀려야 합격이었다. 청원군내 47개 국민학교는 청주중학교를 몇 명 합격 시키느냐 따라 순위가 졀정되었다. 지금과 달리 그 때는 필자도 수재라는 말을 들으며 우리 모교는 청주중학교에 5명이 합격하였고 나는 수석 졸업을 했다. 그 해부터 서울과 부산은 추첨제였고, 다음 해부터는 전국으로 무시험 전형제도가 시행되어 마지막 중학교입학시험 대상자..

지리산을 사랑한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유적지를 찾아서...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1501년, 경상우도와 좌도에는 큰 인물 둘이 태어났는데 한 분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요, 한 분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이다. 둘다 70여세를 살다가 남명이 2년 더 사시고 72세에 돌아가셨고, 그가 죽은지 20년 후에 이 땅에는 전 국토가 황폐화된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했다. 그 중 남명 조식을 보자. 그는 1501년 외가였던 경상도 삼가현 (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고 30세부터 처가가 있던 김해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에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에 돌아와 ‘뇌룡정’을 짓고 역시 제자들을 길러 이미 명성이 자자한 사림의 영수가 되어 여러번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한다. ..

대원사계곡길 (대원사 시외버스주차장-소막골 철다리-데크로-대원교-대원사일주문-대원사-방장산교-용소-새재갈림길-유평마을-가랑잎 초등학교. 왕복 7㎞, 3H).

‘조개골(朝開谷)’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한라산(1950m)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높은 지리산(1915m)이니 지리산은 수 많은 계곡이 흘러내린다. 잘 알려진 계곡으로도 칠선· 백무동· 뱀사골· 피아골· 쌍계사· 대원사계곡... 오래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들었던 대성골, 빗점골 등등 또 다른 계곡 이름이 있는데 ‘조개골(朝開谷)’.... 지리산에 조개 잡히는 곳이 있는가 했다. 지리산 천왕봉-중봉에서 동쪽으로 푹 패인 골짝이 ‘조개골(朝開谷)’이다. ‘아침을 여는 계곡’ 그러니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조개골에서 발원한 대원사계곡은 지리산에서 가장 먼저 아침이 열린다. 계곡이 넓고 물이 많다. 그러나 아픈 계곡이다. 지리산 어느 계곡은 안그러랴만 역사의 소용돌이 시절마다 수 많은 피를..

경남의령. 자굴,한우산(897m/ 쇠목재-듬배기먼당-자굴산-절터샘-둘레길-쇠목재-한우산-한우정-쇠목재, 11K6시간)

예로부터 추풍령과 죽령을 잇는 고개의 남쪽 땅을 ‘영남지방’이라 했고 그 영남지방을 다시 낙동강 동쪽를 서울서 봤을 때 좌측이라 하여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라 했다 지금부터 약500년전인, 1501년, 이 영남 땅 우도와 좌도에는 걸출한 학자 두 명이 탄생했는데 안동출신 퇴계 이황(1501~1570)과 합천 출신 남명 조식(1501~1572)이다. 두 사람은 분명 매우 뛰어난 성리학자 였지만 학문적 경향은 매우 달라서, 이황이 성리학 이론을 정교히하여 개인 수양을 쌓는 공부를 중시한 반면 조식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실천하는 삶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황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조선시대 내내 많은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며 이른바 ‘퇴계학파’라는 큰 학맥을 형성했으며, 지금도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아! 덕유德裕, 그 그리운 길에서(설천봉-향적봉-중봉-백암봉)

덕유산德裕山!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명산으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산. 이 이름은 조선 이성계가 이 산에서 수도할 때 맹수들의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해서 ‘덕德이 풍부한 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이라 기록되었으니 덕유산은 한반도에서 요충지에 위치하여 오늘도 행정적 경계를 결정짓는 분수령을 이룬다. 덕유산 아래 마학동에서 태어나 광주 목사를 역임하고 여생을 덕유산에서 마친 학자 임훈林薰은 53세 때 덕유산을 올라 곳곳을 탐승했는데 그 감격을 에 남겼다. 그는 ‘덕유산은 청백하고 고결하여 웅장한 풍광이 지리산에 버금 간다’고 감격해 했다.. 임훈의 감성을 갖었는가! 덕유의 그 시원한 바람과 구름, 그리고 풍요로운 녹색평원의 그리움..

의령.함안 나들이(능가사, 곽재우 생가,세간리 현고수,세간리 은행나무,성황리3층석탑, 성황리소나무, 백곡리감나무, 악양생태공원)

소나무... 몇 년전 산림청에서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슨 나무를 가장 좋아하느냐 조사를 했는데 절반에 가까운 46%가 소나무라 답했고, 2위는 은행나무로 8% 였다니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소나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겠다 우리나라 어느 산을 가든지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소나무요, 또 소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이도 없는 것을 보면 소나무는 우리와 함께 살아온 역사와 같은 정서의 나무이리라. 3, 4천년부터 우리나라에 있어온 소나무는 새 생명을 알리는 금줄에 솔가지 로 끼워졌고, 소나무 장작으로 데워진 방에서 잠을 자며, 뒷동산 소나무 숲은 우리의 놀이터요 거기서 꿈을 키웠다. 소나무 껍질과 송홧가루는 구황식물이 되었고, 소나무 목재는 집이 되고, 가구가 되고, 우리가 죽어 관을 만들 때도 쓰여..

비화가야(非火加耶)의 창녕을 찾아(관룡사,고분군,석빙고,만옥정공원, 영산...)

비화가야(非火加耶)의 옛 고을 창녕....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창녕은 대구현풍과 경북 고령과 연접하고 동으로 밀양, 남으로 함안, 그리고 서쪽으로는 의령과 합천으로도 연결되는 내륙중심지역이다. 70년대까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부곡온천도 창녕이고,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우포늪, 그리고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을 '배산'으로 너른 들판 끝에 낙동강을 '임수'로 풍요가 넘치는 고장이다. 국보, 보물, 사적만해도 20개나 되고, '유리 고인돌'과 '송현, 교동고분군', 또한 계성면과 영산에도 여러 고분군이 산재하고 무엇보다도 비화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편입되는 것을 증명하는 '진흥왕척경비(국보33호)' 로 대표되는 역사문화는 제2경주 비사벌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화가야(非火加耶)- 가야(加耶)는 ..

경북문경(문경새재선비길/ 박물관 주차장-제1관-제2관-제3관문(왕복 15K, 4.5H / &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선석사)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자수려한 고장 문경, 거기에 유명한 문경새재가 있다. 하도 힘들어 새도 쉬어간다는 뜻이라는 설, 억새풀(새)이 우거진 고개라 그 이름이 붙었다는 설,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새 길이 났는데 그 새로 난 길의 고개라는 설등 다양하다. 어떤 연유로 이름이 붙었든 태종 13년(1413)에 개통된 이 고갯 길은 근대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영남지역에서 경기, 서울지방으로 가던 국도 1호선과 같은 영남대로로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 요충지 임에 틀림없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시험을 보러 오가기도 했고, 수 많은 물자와 통신이 오갔다. 특히 임지왜란 때 영남 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 배수진을 쳤지만 너무나 쉽게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