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 459

전남완도. 생일도(서성항-학서암-용출리-굴전리-서성항) 우중 답사길

섬(島) 우리나라는 섬의 나라다. 통계에 의하면 유인도가 464, 무인도가 2,918로 합계 3,382개의 섬을 보유한 세계 10대 섬 보유국이다. 오늘 날에는 많은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와 다른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이들 섬에서 생활하는 주민들만도 82만명에 달하는 생활의 터전이다. 섬은 한 나라의 영해 확장과 생태계 보전, 휴양지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등 그 중요성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섬 크기로만 비교한다면 제주도, 거제도, 진도,강화도, 남해도, 안면도, 영종도, 완도,울릉도 순으로 순위를 메길 수 있겠다. 섬의 이름도 다양하다. 단체로 통영을 하다가 한 동료가 ‘만지도’가 있다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여자도도 있고 재밌는 이름이 많다. 그 중 오늘은 완..

경남산청.대성산(大聖山593m/ 정취암-대성산-와석총-둔철산생테체험공원.6K &남사예담촌 )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무엇인가?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지리서와 지도에 이 원리가 적용되었으니 우리나라 전통 지리의 핵심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뜻으로 산과 물의 관계에 따라 지리를 구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태백산 꼭대기에 떨어지면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고, 남으로, 북으로 흐르므로 자연스럽게 산은 분수령이 되는 것이다. 갈라진 물은 산의 능선이 존재하는 한 하나로 만날 수 없이 두 개의 물줄기로 흐르다 능선이 없어지는 지점 즉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로 합쳐지는데 이 지점을 합수점이라 하겠다. ​​ 실제로 산과 물의 관계를 보면, 산 줄기는 계..

아! 겨울 자리 (음정마을-벽소령-3각고지-형재봉-연하천-3거리-음정마을(17.6K)

다시 지리를 간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끝자락, 지난 가을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어보려 한다. 모처럼 설 연휴를 맞이했으니 그리운 벽소령에서 1박을 하며 천천히 걸어보려한다. 겨울 바람도 그립고 눈이야 쌓여 있으랴만, 한 겨울 싱싱한 산죽 길도 그립다 벽소명월이야 추석 같이 보름달이 제격이지지만 어떻랴. 많이는 아니여도 그래도 비탐 지역 외, 정규 지리 산행 길은 모두 걸어 봤지만 가고가도 다시 그리운 그 길이다. 벽소령은 세석 만큼이나 사통팔달의 길, 옛 하동 사람들이 소금을 지고 이 고개를 넘었고, 함양의 마천 사람들은 또 그 소금을 사러 이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소금길이 되었다. 그 소금길을 걸어보려한다. 지리산이 그리울 때면 걷는 길, 그렇게 걸어보려한다. --------------- 세월 ..

충북제천. 월악산국립공원.북바위산((鼓, 772m/물레방아휴게소-전망대-북바위-정상-사시리고개-계곡- 주차장,8.5K 5H)

‘28년 역사의 ‘장수산악회 회장’에 취임하며‘.. 세월은 예뻤던 우리 누나를 할머니로 만들기도 하지만 변방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제게 감히 회장직을 수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제가 ‘장수’를 처음 만난 것은 내 고향 충북 땅의 영동 ‘갈기산’이던가, 단양의 ‘올산’이 먼저 였던가 그랬습니다. 2015년 2월 무렵이었으니 어느덧 9년이 흘렀나봅니다. 참 좋은 분들이 많은, 그리고 존경스러운 선배님들이 계신 장수산악회가 제게는 퍽 안연한 품이 되었고 위로였습니다. 28년 역사, 960여회를 산행하는 ‘장수’, 백두대간과 정맥을 누빈 역전의 용사들이 계신 산악회였으니, 저는 늘 변방의 조용한 산 꾼으로 말석에 앉아 그렇게 배웠고, 감동했던 기간 이었습..

경북경주.단석산(斷石山 827.2m / 공원지킴터- 신선사- 마애불상군 - 단석산 왕복 4K. 3H/ 박목월 생가, 운문사 답사

‘김유신’ 산청 ‘동의 보감촌 뒷산’에는 ‘왕이 머문 산’, ‘왕산(王山)과 필봉산(筆峰山)’이 있고 그 산의 너머 기슭에는 돌을 쌓아 조성한‘구형왕릉’이 있다. ‘구형왕(仇衡王)’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의 10대손으로 521년 제10대왕으로 등극했지만 11년 후 532년, 백성을 전쟁 속에 밀어 넣을 수 없어 조용히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식솔들만 거느리고 거기에 기거하다가 ‘나라 잃은 죄와 원통함이 이리도 큰데 내 어찌 편히 흙에 묻히겠는가. 나의 무덤은 돌로 만들어라"’ 유언을 남겼다. 그는 항복할 때 아들 셋을 데리고 진골에 편입 되었는데 그 아들 중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장군 이였으며, 김유신의 조부가 된다. 그 김무력의 장남이 김서현인데 왕족 처녀와 사랑에 빠졌고 극심한 반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