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
필자는 양(梁)가 성을 가졌다.
양씨 성은 제주도에 많이 살고, 본관은 남원이다.
양씨하면 신문에 오르내린 큰 범죄인도 없지만 역사를 휘감은 뭔 유명한 인물도 많지 않다,
한자를 다르게 쓰는 양가들까지 생각해 보면 고구려 시대 연개소문이 집권 할 당시 안시성 성주로
유명한 양만춘(楊萬春)장군,
그리고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금메달 수상자로 여러 날 메스콤이 난리났던 양정모(梁正模, 1953년생),
그는 레슬링으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지금부터 450년전, 봉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을 들겠다. 그는 한석봉,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와 함께 조선 4대 명필가로 유명하고, 우리에게는 전 국민이 다 외우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시조 작가로 더 유명하다.
설화에 의하면 그는 원래 서자 출신으로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이 죽자 어머니는 자결하면서
우리 아이들을 적자로 올려 달라 유언했다, 그 덕분에 그 형제들은 적자가 되어 과거를 볼 수 있었고
여러 벼슬을 했다.
그는 여러 고을의 현감, 군수, 부사등을 지냈는데 특히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 부윤등을 역임했고
강릉 부사시절 전임자의 부친상 문상을 왔었고 그 신미년에(1571) 무릉계곡을 찾았다.
매월당 김시습등 수 많은 묵객들이 찾던 이 계곡의 1,500평 반석에 12글자를 남겼다
.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글을 남기다).
혹자들은 왜 봉래라는 호를 쓰지 않고 옥호거사라 했느냐면서 양사언의 글씨가 아니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 신비스런 글씨가 풍화로 글자가 희미해져가니 동해시에서는 1995년 모형 석각을 세웠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했던가!. 그런가 보다.
백두대간 댓재에서 햇댓재를 거쳐 두타산과 청옥산을 다녀 박달령으로 내려와
무릉계곡- 삼화사로 15K를 걸었던 추억이 2016년 7월 이었으니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거기를 다시 간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상적, 역사적 중요한 의미가 깃든 무릉계곡,
거기 베틀바위, 마천루 코스를 다시 걷는다.
선녀가 비단을 짰다는 베틀 바위를 넘어.......
▲어느덧 8년, 거기를 다시왔다.
무릉계곡 주차장
(동해시 삼화동 858-3).
▲ 무릉계곡(명승 제37호)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를 흐르는 4km 길이의 계곡.
▲새벽5시 출발, 5시간이 걸렸다.
영주IC를 나와 영주-봉화-태백,
태백의 장성- 도계를 지났고, 낙동정맥 통리재를 넘어 삼척- 동해....
긴 여정이었지.
▲삼화사에서 쌍폭에 이르는 계곡과 그 일대는
화강암으로 형성된 소과 폭포, 아름다운 바위들이
이루는 경관이 빼어나다.
▲ 예로부터 동해안 제일의 산수로 이름을 떨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지금까지 수 많은 자연적,ㆍ역사적 명소를 간직하고 있다.
▲우측은 삼화사로 오르는 오늘의 하산 길,
우린 좌측으로 오른다.
▲멋진 금강송 군락지.
거기에 글자 모양도 좋은 휴.휴,
저절로 쉼이 그려진다.
▲거기에 숯 가마터...
고단한 시절의 투쟁 같은 삶의 현장.
▲두타산이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소리를 한자로 받아 적은 것으로
'불도를 닦는 수행'을 뜻한다.
▲ 그만큼 불교와 인연이 깊은 무릉계곡에는
삼화사와 관음암 외에도 중대사,
거제사 등의 절터가 남아있다.
▲저기는 삼화사 뒷 중대폭포다.
비가오던 그 시절,
안개 속 폭포는 신비 그 자체였지.
▲무릉계곡, 4K. 우측 두타산에서 시작하여
수도골등 골골이 모이고,
좌측 청옥산 아래 박달골이었다. 거기서 흐른 절경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바위는 바위대로 스스로 족하다.
그 자리에서.
▲ 언제나 존경스런 조대호 고문님.
더 바랄것 없이 멘토님의 그 모습만으로
따라갔으면 싶다.
▲ 두타산의 특징은 두타산 정산에서
어디를 가든 회양목이 많았다는 추억.
▲오르고 내리고 여러번 그래야 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멈추지만 않으면
▲혼자 있을 적엔 마음을 조심하고
같이 걸어 갈 때는 입을 조심하면서.
▲베틀바위로 오르는 길은 아득했다.
있을 땐 존중하고,
없을 때는 칭찬하고.
▲곤란할 땐 돕고, 은혜는 잊지말자,
베픈 것은 생각에 담지않고
서운한 건 쉬이 잊자.
▲드디어 베틀바위,
인간의 감성으로 해석되는 풍경이 아니었다.
▲산이 하늘과 맞닿은 곳에
피뢰침 첨탑처럼 치솟은 절경.
▲거기에 앉으면
스스로 도인이 돨듯 하다.
▲모이면 즐거움,
그냥 이대로만 오래오래 이자고.
▲베틀바위는 선녀가 하늘나라에서 질서를 어겨
인간세상으로 쫒겨나 비단 3필을 짤 때
사용했다는 전설 속 그 베틀이란다.
▲천상이나 지상이나 규휼을 어기는
적극적 사람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오늘을 맞은 것이니.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온갖 포즈를 취하며 인증샷을 담는다.
▲거기서 건너다 보면 청옥산 거기가 구름에 가렸고
산하의 리듬감이 시선을 따라
몸속으로 흐른다.
▲한국의 장가계로 소개되는 곳.
겨루듯 솟은 바위들이 기막힌 절경.
▲송곳을 세운 듯한 바위에는
금강송이 어우러져
한 편의 산수화.
▲와글 와글,
의태어인지, 의성어였는지.
▲서울 사람이 남산을 안 가본 이가 많듯
강원도 남쪽, 여기가 고향이라는 님은 두타산이 처음이라고
▲인간에게 절실한 것들,
인간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 절경에 왔으니 한잔 해야한다나,
어디든 핑게.
▲ 눈치없는 남정네들,
어디든 분 수없는 이들이 있는 법.
나 같으면 빠져 주겠지만.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미륵바위, 16세기 허목, 김효원과
17세기 김득신의 기록에도 나온다는.
▲저러하구나, 저러하구나..
경탄은 계속되고
▲거기에 서니 동해시가 조망되고,
그 너머로 동해바다가 보인다.
옛 묵호등이 동해시가 되었고 인구 8만9천이다.
▲동해시는 산지가 77%, 경지가 13%에 불과하다
애국가 첫 장면 일출풍경이 나오는 추암촛대바위.
망상해수욕장이 유명하다.
▲지나간 힘은 거둘 수 없고
다쳐올 힘은 경험되지 않는데
풍경은 흘러와 내 마음에 스민다.
▲베틀바위에서 300M,
우리는 마천루를 향하여 간다.
▲풍경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겠지만,
인간은 풍경을 향해 끝없이 말을 걸고.
▲아득한 산 위에도 산성터가 즐비하다,
고단했던 역사의 단면.
▲베틀바위에서 마천루는 2.9k,
여러번 오르내려야 했다.
▲2016년 7월 이었으니,
어느덧 8년이 흘렀다.
백두대간 댓재에서 두타-청옥산의 16k 그 길은 어마어마 힘든 추억.
▲두타산(頭陀山) 1,353m
속세의 번뇌를 떨치고
불도 수행을 닦는다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거기 바람 쉬원한 곳에서 한 상을 차린다
즐거움은 배가되고.
▲이 동네는 늘 우리보다 부로조아적.
시원한 냉국수에
사각사각 채소 꾸미가 맛깔 났다.
▲다시 지그재그 길을 간다.
아기 단풍같은 단풍 굴락지를 간다.
▲여기서 두타산성 쪽으로하여
백곰바위도 봐야하는데
3시까지 하산하란다는 핑게를 댔다.
▲곧 산성 12폭포를 건넌다.
직선으로 뻗어내린 계곡은
12번 꺾여 크고 작은 폭포를 빚었다.
▲산이 그리울 땐 다리가 아프도록 산 길을 걷고,
세상 삶의 아픈 흔적을 지우고 싶을 때
나는 또 다시 평원에 선다.
▲석간수 내려가는 길은 또 오르내림,
중간중간 풍경을 즐기며 걷는다.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삼화사 입구에 세워진 최인희 시인의 시.
▲즐거운 곳에서 휘파람을 불러본다.
무릉계곡의 매력.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여성분들 오시오 했더니
한 불청객이 먼저 찾아들고.
▲오랜만의 오솔길 정구님,
그와 맨토와, 셋은 덕유 종주를 비롯한
여러 산들을 헤맸었다.
▲심리학에서 마음 읽기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보라든지,
그림을 보여주며 무슨 느낌 나는지를 묻는다.
상담선생 출신 필자는
무슨 모양 같으냐로 그 분의 정서를 더듦었다.
▲어느시절 생성되고
풍화의 세월이 아득하여 절경이 되었다.
▲ 바위 구멍에서 물이 나오는 석간수인데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다.
▲도를 닦는 이,
피난의 시절엔 생명수였겠다.
▲거대한 신전의 기둥처럼
그렇게 돌아서면.
▲ 암자 터였는지 공터와 움푹 파인 집채만한 바위는
꼭 야외 음악당을 연상시킨다.
▲마천루라 했다
여러 바위들이 이름을 전하지만
구분하기는 어렵고.
▲신성봉, 병풍바위, 번개바위, 고릴라바위...
마천루라 하지 않던가.
▲마천루 전망대에서 청옥산 학등 연칠성령
망군대 고적대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마루금을 긋고,
▲ 발아래 용추폭포와 신선봉을 받친 병풍바위 암괴가 펼쳐진다.
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라던데
오늘은 예외라는 느낌.
.
▲산은 일상의 일탈의 유혹을 하기도 했고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서럽고,
마음 속의 먼지가 날릴수록 더욱 절박했다
▲새로운 삶의 유혹이 없다면
누가 힘들여 산을 오르겠는가
비지 땀을 흘리면서.
▲잔도길 덕분에 기막힌 풍경을 즐기고,
2,000원 입장료가 저렴하단 생각도 했지.
▲돌아보고 돌아봐도 우람했던 그 곳,
놀라운 풍경이었다.
▲버스에서 잠깐 蓬萊 楊士彦(봉래 양사언)를 소개했다.
우리보다 450여년전 사람,
임진왜란 직전까지 주로 지행행정을 했다.
▲평창군수, 강릉 부사등을 역임했는데
서자로 태어난 그가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희생 덕분이다.
▲어진 지방 수령이었던 그가
우리 백성들에게 남긴 유명한 시
泰山歌(태산가) 를 보자
▲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산) 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부긍노신력)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뫼(산)만 높다 하더라
▲이제 쌍폭을 향하여 길을 내려선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잇는 능선에서
박달골을 거쳐 흘러내린 물과
청옥산에서 발원하여 용추폭포로 내려온 물이 합쳐지는 쌍폭포
▲ 남자폭포와 여자폭포라고도 불린다
▲이태원은 '솔개'에서
'우리는 말 안 하고 살수는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그랬다.
절경 앞에는 그리 말 안하고 설 수는 없는법.
▲500M 용추폭포,
가믐으로 그 위용은 절감된다.
▲옛인이나 오늘날이나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래도 역사가 된다
▲입구에서 많은 관광객들은
2K여의 여기 쌍폭포, 용추폭포 까지만 다녀가도
무릉계곡의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하겠다.
▲선녀탕,
수천년전 다녀간 곳이지만
향기가 난다.
▲'나뭇꾼'은 홀로 앉았다
숨길 옷은 찾을수 없고 향기만 맡는다.
▲병풍바위, 장군바위,
승진과 성공을 비는 명소란다.
▲여름 거기는 나무에 많이 가렸고
병풍바위면 어떻고, 장군 바위면 어떻랴!
▲예로부터 삼척 지방의 영적인 모산으로 숭상 되어왔고
동해안 지방에서 볼 때 서쪽 먼곳에
우뚝 솟아있는 이 산은.
(옮겨온 사진)
▲정기를 발하여 주민들의 삶의 근원이 된다고
믿어왔음에 틀림없으리라.
▲삼화사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시초이며
보물 제1277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92호인 철조 노사나불좌상이 유명하다.
▲ 앞 계곡에는 화강암 침식 및 퇴적으로 인한 선명한 검은 줄무늬가 있는데
삼화사 창건 당시 약사삼불 삼형제가 용을 타고
두타산으로 왔다는 전설에 따라 용오름길이라고 불린다.
▲무릉계곡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너럭바위인 무릉반석일 것이다.
무려 5000㎡(1500평)에 달하다.
▲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850여 선인들과
시인묵객들의 이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아! 만났다.
무릉반석에 가로로 쓴 살아 움직이는 듯 힘이 있고,
웅장한 글씨.
무릉선원(武陵仙原)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비천)을 방문했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는 설이 있고
▲ 하나는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 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썼다는 설도 있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는 각서가 있는데,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불교 또는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동해시에서는 오랜 세파에 글자가 희미해지고 마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보존하기 위해
1995년에 모형석각을 제작하였다.
▲최인희(崔寅熙.1926.11.29∼1958.8.31) 시비
그 앞에 이 지방의 대표시인의 시비가 있다.
落照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소리
白石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 넘어 낡은 단청 山門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여름이 무섭도록 파랗다.
아 파란 여름이 더 깊어가면
다시 엄청난 발길이 빼곡하겠다.
▲그 무릉 반석위에..
꿈과 추억들은 익어가겠지...
▲되돌아 와 즐거운 만남,
먼 길 달려온 바람처럼, 반가운 사람들.
▲아쉽게 동해를떠나 다시 통리재를 고불고불 넘어
도계- 장성-봉화- 영주를 거쳐
안동 팔영교 부근.
▲즐거운 님들은 먼 길 가야할 시간도 잊고
위하여! 위하여.
▲제일 산악회 님들도 같이하여 반가웠던...
오래오래 같이 이자고 다짐했으니.
▲콩나물만 먹는다,
안동찜닭은 아직 익지 않았나 보다.
▲무릉계곡을 품은 산 ‘두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라니
과연 세상사 갖은 욕망이 부질없을 만큼
반석 위의 물이 맑고 도도하다
그렇게 열시를 넘겨 귀가한 하루...
감사하고 활홀했던 그리운 길...
지금은 어둠속에 묻혔겠다. 진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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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김창완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나를 두고 간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둘곳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동산 찾는가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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