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寧越)!
옛부터 ‘누워서도 다스리는 곳’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고을이다.
그런 영월에 지금부터 560년전, 아주 큰 시끄러운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조선의 6대임금,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200년 후 복권되어 그의 무덤이
왕릉의 격식을 갖춘, 그래서 영월은 ‘김삿갓’도, ‘동강’도 유명하지만 영원한 단종의 고장이 되었다.
단종(端宗)
1441년에 태어난, 세종의 손자요 문종의 아들이다
문종은 즉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으면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학자들에게
특별히 아들 단종의 안위를 부탁하였다.
단종은 12세에 왕이 되었고, 1년이 못되어 삼촌 ‘수양’은 한명희등과 결탁하여 황보인, 김종서를
독살하고 스스로 영의정 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앉혀 권력을 손에 쥐게 되니 이것을 역사는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14세 단종은 1년 후의 끔찍한 일을 상상도 못하며 한 살 위 송씨를 왕비로 맞으니 그가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다
계속하여 왕위 찬탈에 걸림돌이 되는 형제들을 하나씩 제거한 수양은 결국 단종 즉위 3년만에
단종을 상왕으로 하고 스스로 세조임금이 된다
그 후로도 사육신 사건등 공포정치는 이어졌고, 2년 후에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
청령포에 유배를 보냈는데 이 때만 해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군사 50으로 지키게 하고, 강원도 관찰사에게는 철따라 과일이며 먹을 것을 바치고 잘 모시며,
그 결과를 종종 보고 하라고까지 하였다
한양을 떠난 지 7일 만에 도착한 청령포, 육지의 섬같은 이 곳은 두견새만 우는 그런 곳이었다.
두 달만에 홍수가 나서 관아로 거쳐를 옮겼고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단종 복위운동이 끊이지 않자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 되었다가 한명희등의 주청으로 결국 유배 온지 4개월만인 1457년 10월
24일 오후,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도착하였고, 차마 사약을 드리지 못하자 단종을 모시던
자가 활 시위로 목졸라 17세에 죽게 된다.
사약을 들고 왔다가 사형집행을 하고 돌아가던 왕방연, 가슴 저린 시조를 남겼는데 우리가 잘 아는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에놋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이를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하리라 엄명과 함께...
그러나 영원 호장 ‘엄홍도’가 아들과 같이 밤에 몰래 시신을 찾아 곡하며 눈 덮힌 산에 노루 한마리가
앉아 있다가 비낀, 그 곳에 눈이 없자 명당인줄 알고 몰래 매장을 하고 묘지를 돌봤다
그로부터 59년 만에 중종이 단종 묘를 찾아 제사드리라는 어명을 내려 복권되고,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되어 조선의 제6대 임금으로 영녕전에 위패가 모셔지고, 묘지도 ‘장릉’이란 왕릉이 된다.
250년 만의 일이다.
본래 왕릉은 서울에서 100리 안에 두게되었지만 단종의 ‘장릉’은 강원도 깊은 산골에, 병풍석도
없이 서 있지만 조선왕릉들과 같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단종이 사사되고 복권되기까지 이에 관련되어 268명이 죽었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어찌되었나?
단종보다 1살 많은 15세에 왕비되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될 때 군부인으로 강등되고,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될 때 관비가 되었으며, 3년만인 18세에 단종이 죽고, 심지어 신숙주는
자기 관비 삼으로 자기 달라고 까지 했지만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82세까지 살았다.
죽은지 177년만에 단종과 함께 왕비로 복권되어 묘에서 능으로 격상되었지만 정순왕후를 거둬준,
해주 정씨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이장도 못하고 지금도 해주 정씨 문종 묘 12기와 함께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있으니
남양주와 영월,,, 천리길에 각각 묻혀있다.
그 아픔의 고장 영월, 그 곳을 간다.
처연한 단종애사(端宗哀史)
그 가슴으로....
▲ 만차되어 3시간여를 달려온 영월 땅,
'영월상수도사업소' 앞에서 산행은 시작된다.
▲ 땀스런 포도 밭, 사과 과수원도 즐비하다.
강원도까지 사과 재배지가 북상하였다.
▲ 상수도 사업소에서 올라오는 길,
▲ 작은 사찰을 지난다 '광덕사'
▲ 날씨는 흐리지만 봉래산 정상에서 출발한 행글라이더는
하늘을 수 놓고..
▲ 이윽고 산행은 시작되는데
정비도 안 되고 이정표도 부실하다.
▲ 정상, 별마로 천문대까지는 2.5K인데
생각보다 많이 가파르고 힘든 코스이다.
▲ 동산 뒷산 정도로 소개하여 나선 분들에게
많이 많이 미안했으니...
▲ 드디어 영월 읍내가 조망된다.
버스에서 단종과 정순왕후, 그리고 왕방연에 대하여 10분 역사강의...
좀 길었던것 같은.. 그래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함이 전달되었으면..
▲ 어쩜 계속 오르막 연속일까?
▲ 20여분 만에 처음으로 전망대를 만난다.
▲ 좀더 선명해진 영월,,
전망대에서 남쪽 방향으로 그렇게 자리한다.
▲ 이정표는 거대하지만
너무 높아 보기가 어렵다.
▲ 처음으로 안부를 만나고..
▲ 다시 가파른 길은 이어지는데..
▲ 끝이없는 아득함이다.
▲ '푸른물 흘러흘러 강원 유곡 백삼십리
강허리에 흰빛 자갈 눈빛을 가른다...
▲.....정선평창 기암절벽 굽이마다 돌고돌아
징검다리 건너 어라연에 영월동강 굽이치네 '
박경규 시인의 노래다
▲'청령포 어린단종 두견도 울고울어
거운교 건너 문산나루 영월동강 굽이치네'
그렇게도 노래했다
▲ 그렇게 힘겨운 길은 이제 100여m를 앞두고 ..
▲ 오늘도 변함없는 사진으로 봉사하는
광산선생님,
오솔길의 축복이다.
▲ 그래도 이런 길을 안내했냐고 불평하지 않으심이
감사했으니....속으로야 모르지만.
▲ 산을 휘감고 돌아가며 흐르는 강물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동강의 수려한 풍광은 산 위에서 볼 때 가장 실감 난다.
산속을 파고든 강줄기가 바로 발아래 펼쳐지기 때문이다.
,
▲ 영월읍, 평창의 오대산에서 발원한 '동강'과
평창강(서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이다.
서강은 여기서 그 이름을 다한다.
그렇게 합수된 강은 남한강이 되는거지..
▲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동으로는 계족산이, 남으로는 태화산너머
소백산 주능선 마르금이, 그리고 영월읍이 비행기를 탄듯 내려다 보인다.
▲ '봉래산' 799.8m...
산 높이를 너무 정직하게 적어놨다는 느낌.
천문대와 페러글라이더 활공장이 있어 많은 관객들이 찾는 산으로
예로부터 봉래채운(蓬萊彩雲)이라하여
영월팔경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 봉래산은 영월읍 영월의 주산이다
멀리 가리왕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천렵터로 유명한
어라연계곡을 거쳐 영월에 이르러 동강을 이루며 산밑을 흐른다
▲강변에는 금강정과 낙화암이라는 정자가 있다.
낙화암은 단종이 죽은 뒤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 동강 절벽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단종을
복위 시키려다 실패한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끌려 가며 남긴 충의가의 봉래산(蓬萊山)은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상상속의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이 시조에서는 한양의 남산, 또는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어
단종을 향한 마음으로 영월의 봉래산을 비유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성삼문은 단종이 영월에 유배오는것도 모르고 한해전에 처형되었다
▲ '별마로 천문대'
별마로란 '별을 보는 고용한 정상'이란다.
우리말 같지만 별(star)와 마루(정상), 로(고요할 로)의 합성어란다.
▲ 안성기, 박종훈이 출연하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였고.
▲ 숙박시설까지 갖춘 천문과학교육관은 영상강의실, 전시실등을 갖추고
다양한 체험시설이 있다.
▲ 거기서 점심을 나누고 ....산정에는 벌써 가을이 온듯
바람은 시원하다.
도로따라 20여분을 내려간다.
▲ 가자하면 가고, 쉬자하면 쉬고....
참 고맙고 정겨운 분들이다.
▲ 20여분 내려오면 산림욕장이고
안내소 건물이 있었다.
열 명은 '속골'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고
나머지는 도로따라 내려간다.
▲ 등산지도상에 선명히 나와 있는 속골.
'송산사'로 내려가는 길은
오래되어 보이지 않고 풀과 숲을 걷어내며 길을 찾아가야했다.
▲ 이윽고 농로를 만나 안도한다.
영월군은 속히 등산로를 정비하든지
지도를 폐쇄 해야한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니...
▲ 속골 마을에도 애기사과(꽃사과)가 익어가고...
▲ 예정보다 한 시간 늦어 동강레팅을 시작한다...
▲ 안쓰는 폰을 방수팩에 넣어 열심히 촬영했는데
모두 꽝이다.. 울고싶은 마음...
▲ 억겁의 세월을 머금고 강과 들을 넘나들며 만들어 놓은 동강...
거기에 최고의 풍경, 어라연(魚羅淵)도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도 찍었었는데..
▲영남의 가믐과는 달리 물이 많다 동강에는 ..
물을 뿌리고, 조정선수모양 시합도 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 과거 목재등를 운반하던 떼꾼들이 지났던 그 길....
역사가 되었고
우리는 동심의 시절로 돌아간 그 즐거움이다.
▲ 그렇게 즐겁고 조금은 추운 동강에서의
추억도 끝이나고...
▲ 단종에 관련된 몇 장의 사진을 옮겨서 올려본다.
단종의 사약을 들고 집행하고 돌아가던 의금부도사 왕방연....
애닯이 돌아가며 시조 한 수를 남한강가에 남긴다...
▲청령포(淸泠浦)
맑은 청(淸)에, 물맑을 령(泠),
그리고 물가 포(浦)자를 써서...
그렇게 오늘도 아픔을 간직한 채 육지의 섬처럼 남아있다.
▲ 청령포 소나무 숲...
아름다운 천년의 숲이란다.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
청령포안에 있는..
볼 관, 소리 음자를 써서 '단종을 보았고 그의 울음 소리를 들은'
600년 나무이다.
▲ 망향탑
망향탑에서 내려다 본 서강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을 흘러간다.
빤히 바라보고도 나갈 수 없는 바깥 세상...그리고 한양 길
거기를 얼마나 그리워 했을까?
▲'노산대'
한양 쪽을 바라다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울퉁불퉁한 바위이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절벽 밑으로
무심한 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그 옛날의 서강은 단종의 눈물과 한을 싣고 몽매에도 그리던 한양으로 흘러갔겠다.
▲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청령포 안의 여러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된 거다.
단종은 청령포에 두 달을 살았다 ..
▲ 홍수가 나서 관아로 급히 자리를 옮겼고
그렇게 영월 생활 넉달만에
1457년 10월 24일,
17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오늘도 아픔을 간직한 채
조용히 거기에 있다.
▲ 12세에 임금되고 3년만에 상왕으로 물러앉고
17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그렇게 역사는 흘렀다.
▲유배간지 4개월만에 죽음을 맞이한 17세 단종...
동강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엄홍도'라는 사람에 의해 몰래 건져내 묻히고
250년이 지나서야 왕릉, '장릉'이 되었다.
▲곧바로 오를수 없어 우회하여 오를만큼 언덕 위에
병풍석도 없이 그렇게...
▲15세에 한 살 아래 단종에게 시집 와서
왕비에서 관비로, 다시 서인으로 ..
그렇게 82세까지, 일곱왕의 세월동안 온갖 고난을 다 겪은 정순왕후..
겨우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시집 간
해주 정씨 가문 덕분으로
문중 산에 매장되었다가 177년 만에 복권되었다.
▲ 천만리 영월의 단종을 그리며
'남양주 진접'에 그렇게 사릉으로 남아있다.
2008년 영월의 장릉과 함께
48개 조선왕,왕후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 권력이란 무엇인가?
어린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해야 했던 왕의 자리, 겨우 13년을 왕위에 있다가
51세에 세조는 죽었다
과연 세조는 후회가 없었을까?
▲그렇게 정겨운 님들과 즐거움과
역사의 숙연함이 함께 한 하루....
다시 추억이 되고, 세월의 줄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구비구비 말이없이 흘러가는 동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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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시(御製時)
천추에 원한을 가슴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냈물은 돌에 부딧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들이 특실 거리니
저물기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山行..그리움따라 > 강원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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