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流配文學)...
조선시대 사림이 조정에 진출한 이후 당파가 형성되었고, 정권을 잡는 당파가 바뀔 때마다
조정의 주요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당파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5~16세기는 관직에 있던 사람들 4명 가운데에 1명꼴로 유배를
갔을 정도로 빈번했고, 유배는 형벌이긴 하지만, 골치 아픈 당쟁에서 벗어나 학문에 정진하거나,
위대한 작품과 저서를 남긴 선비들이 많았다.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담양에 유배되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등을 지었으며,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 '오우가'등을 남겼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 500여 권의 저서을 남겼으며
그 중 ‘목민심서’는 우리민족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특히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80여 명에 이르는 유배객이 거쳐간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구·남구만·김만중·이이염·류의양등이 있다.
류의양의 '남해문견록', 김만중의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등이
유명하다.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어머니 그립다는 말을 쓰려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리네.'
그는 공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지만 1689(숙종 15)년에 탄핵으로 남해에 유배된 후
1692년 56세로 거기서 병사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문호 서포의 발자취가 그 고뇌 스런
일생과 함께 서려 있는 남해의 작은 섬 노도가 내려다 보이는 금산,
거기를 간다
정겨운 오솔길의 시산제가 있는 날에 그 곳을 걷는다.
빛나는 보물섬 남해,
이성계와 충무공, 그리고 서포의 서정이 깃든 그 곳을 간다.
▲ 시산제 준비를 위하여 선발대를
'북곡 주차장'에 내려주고.
▲ 우리는 오늘의 입구 '양아리 두모주차장'에
왔습니다.
거기에 세워진 '서복'상
▲ 중국 서복연구회에서
이 건대한 돌 상(높이2.6m, 무게 3톤)을 기증하여 여기 세웠답니다.
중국인들의 열정도 놀랍고, 뭔가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 서복은 진시황제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동남동녀 수백을 데리고 남해 앵강만 일대를
수색했습니다.
▲ 오늘 우리의 출발지 두모계곡은 2013년 개방되었는데
중턱에 '서불(서복)과차'(서복이 남해를 다녀갔다)라는 암각으로
유명합니다.
▲ 불로초까지 구하려 그리 애를 쓰고,
만리장성을 쌓기까지 한 시황제도 49세에 세상을 떠났지요.
▲ 12세에 진의 36대 왕이 되고
37년 재위하며 마지막 10년은 초대 황제가 되어
만리장성, 무덤 조성 등으로 그 엄청난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 그리보면 참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 20분쯤 오르면 만나는 '양아리 석각(石刻)'
고대문화의 귀중한 유적.(경남기념물 제6호)입니다.
이 석각은 가로 7m, 세로 4m 규모의 너럭바위 위에
가로 1m, 세로 50㎝ 크기로 새겨진
그림 또는 그림문자.
▲ 진시황의 명은 받은 방사(方士) 서불(徐不, 혹은 서복.徐福)이
동남동녀 500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으려 남해에 왔지만
구하지 못하고 사냥만 하고 돌아갔다는 전설과 함께
여기에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이 이 곳을 다녀가다)
란 글을 남겼다는건데...
▲ 하지만...
진시황 시대에는 이미 중국에 한자가 사용되었는데
한자가 아닌 이런 상형문자를 남겼을까? ...
▲거란이나 산스크리트 문자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지만 ...
선사시대의 남해인들의 자취이니
고귀한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 하긴 시황제도 BC 259년에 태어났으니
지금 살았다면 2,400살쯤 이려니...
참고로 석가모니는 이보다 300살 더 자신 분이고....
▲ 짐을 덜어 준다고 떡을 짊어 졌더니
어찌나 무거운지
속도가 붙지 않습니다.
▲ 두모계곡은 정상까지 3.2K..
흠뻑 땀도 나지만 크게 어려운 코스는 아닙니다.
▲ 집행부를 벗었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자유입니다.
어느 산이든 자유인으로 걸을 수 있으니...
▲ 어제 학교 학생들과
6명의 교사들이 하동 성재봉 13K을 8시간으로 걸었고...
▲ 찬 날씨 점퍼를 벗었다 입었다 할무렵
조망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원..
기온이 떨어지니 오히려 이런 맑은 풍광이
비단산의 이름에 어울리는 날씨 입니다.
▲ 한참을 서서 한려해상국립공원
그 빛나는 풍광을 봅니다.
▲ 너머 우측으로 남해호구산.
▲ 우측, 설흘산.
가운데 앵강만 앞 작은 섬이 서포 김만중의 한이 서린 노도.
▲ 가운데 설흘산 너머로
여수 오동도.
▲ 한 살씩 더 자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크게...
한 해 우야둥둥 건강들 하시라고.
▲ 막바지 가파른 길을 갑니다.
▲ 밧줄을 잡고 바위 굴을 기어가는게
스릴이 있는데
이런 거대한 시설은 좀 멋이 없고...
▲ 오른 자의 여유는
열심히 오르는 이들을 약 올리고 싶어집니다.
▲ 저 남해 너머로는
여수반도가 보입니다.
▲ 전에는 이 굴을 통과 했지요.
기어 가기도하고, 몸을 오무렸다 펼치기도 하면서.
▲ 그렇게 오르면 '부소암'.
부소암 바위에 붙은 작은 암자였지만 공사중으로 출입통제입니다.
▲ 그 부소암은
이 모습입니다.
▲ 저 아래로 출발지 두모마을.
바로 앞 섬이 노도.
▲ 조망이 좋은 그 암자를
가보지 못함이 퍽 아쉼입니다.
▲ 제34경 부소암(扶蘇岩).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데...
▲ 좌측으로 상사바위 뒷쪽을 병풍처럼 이어지고
전면과 우측의 조망이 놀라운 곳입니다.
▲ 저 앞에 작은 섬...
'소치도'..
외롬의 상징 같습니다.
▲ 입구에서 2.5K를 왔고
정상은 700m가 남았습니다.
▲ 전체로 본 부소암, 부소암(扶蘇庵) 암자는
이 바위 너머에 있는 겁니다.
▲ 저 아래로 다시보는 아픈 섬 노도.
멀리 여수반도의 돌산
▲ 볼 주름만 좀 덜 해도
뭘 좀 해 보겠는데....
▲ 앙상한 겨울 산은
다시 오는 봄을 준비하겠지요.
▲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
얼굴 같기도 하고.
▲ 이제 평온한 길을 만납니다.
▲ 여기서 상사바위를 다녀와야 하지만
시산제가 기다리고 있어 정상방향으로 갑니다.
▲ 상사바위는 여기서 400m입니다.
▲ 늘 붐비는 헬기장은
여러 산악회의 시산제가 시작되었습니다.
▲ 아래로는 단군성전이 있지만
늘 그냥 스칩니다.
▲ 단군 성전 내려가는 길.
▲ 오솔길은 여기에서
시산제가 준비되었습니다.
▲ 아늑한 장소가 좋고
헌신적인 집행부의 수고가 빛나고
정겨운 오솔길 회원들의 정성이 아름답습니다.
▲ 마치고 비빔밥으로 점심을 나누고
고기를 나누고, 떡을 나누고..
덕담이 풍성하게 오갑니다.
▲ 서둘러 우리는 상사바위를 위하여
다시 헬기장으로 내려오고.
▲ 저기가 상사바위입니다.
▲ 상사바위를 오르며 바라본 우측,
그 너머가 부소암이 있던 곳입니다.
▲ 자기를 흠모하다 상사병에 걸린 총각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마음의 양반가 유부녀는
측은히 여겨 이 바위에서 '상사'를 풀었다고.
▲ '상사를 풀었다?'
몸을 허락했다는 건데,,, 그 에로틱한 전설에
아주 찐한 농담이 한바탕 웃음이 됩니다.
.
▲ 그 전설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는
여기서 보리암 방향 금산 전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 이런 9개의 샘을 보면서
아득한 생성 역사를 더듬어도 보았지요.
▲ 아침, 두모 출발지에서 한마디 하다 여성들이 공동의 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산악회 여인들은 왜저리 아름다울까?'
상상바위의 로맨스 탓 이었을겁니다.
▲ 건너 우측에 보리암.
그리고 여러 빛나는 바위들..
▲ 그 아래로는 빛나는 보물섬 남해의 해안선이
그리움이고...
▲ 암릉들과 바다 그리고 섬..
환상적인 풍경입니다.
▲ 그 상사바위에서 바라보는 '상주 은모래 해수욕장'
어느 해 저기서 텐트를 치고 여름을 즐겼었습니다.
그 좌측 선창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돌기도 했지...
▲‘금산(錦山(681m)’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 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 절경을 이룹니다.
▲ 우람한 바위들과 파란하늘...
누구나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 만일 금산에 대하여 '수능을 본다면 이 38경 순서와 이름을 외웠을 겁니다
그냥 놔두면 38경 뿐이겠는가? 보는 이들마다 상상력이 수백 수천의
모습 이었으리니...
창의성 면에서는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건 불만입니다.
▲ 사방의 풍경이 혼미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
▲ 아마도 상사바위에서 남정네들은
상사를 풀었다는 그 사내를 부러워 할까?
▲ 고난의 터전에서
악착 같이 살았겠습니다.
▲ 그림같이 붙어있는 보리암을
거너다 보며 산장 방향으로 향합니다.
▲ 좌선대를 지납니다.
▲ 소담한 꽃송이 같음을
느끼지만 좌선대라 하니...
▲ 신라의 원효. 의상. 운필거사가
수도좌선을 하였고 그 앉던 흔적이 남아있다는데
올라 가보는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 제석봉을
건너다 보기도 하였지요.
▲ 사람이 복잡한 금산산장을 지나와
제석봉에서 내려다 봅니다.
▲ 지리의 제석봉은 제사와 관련된 이름이지만
여기는 다릅니다.
▲ 거기서 기묘한 '일월봉'을 올려다 봅니다
'일월봉' 누가 올려놨을까? 빙하시대에 어쩌구 하는
과학적 설명은 억겁의 세월에 현기증이 납니다.
▲ 제석봉에서 건너다 본
상사바위...
거기 설 때보다 여기서 보니 더 아찔합니다.
▲ 그 앞으로는 지나온 좌선대.
▲ 아무리 봐도 일월봉은 기묘합니다.
어리적 다리미에 붙은 닭모습 같기도 하고.
▲ 건너로는 보리암이 아름답습니다.
▲ 흔들바위...
이름판 때문에 오르는 모두가
한번씩 흔들어 보지만....
▲ 이제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 곳곳에 많은 옛 인들이 가녀간
이른바 '인증샷'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오르면 정상은 코앞이고.
.
▲ '유홍문 상금산(쌍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
놀라운 인물을 발견합니다.
▲ 연산군 시절에 태어나 풍기군수를 지냈고
성리학의 대가로 백운동서원등 우리나라 서원운동의 창시자 '주세붕'
그도 다녀갔습니다.
함안군 칠서에 그의 묘지도, 사당도 있습니다.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5m).
고려시대부터 국토의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봉수대입니다.
▲ 이름 그래도 4방 '망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 아래 정상석 앞엔
현대인들의 인증샷 줄이 섭니다.
▲ 불쏘시게 넣던 거기에 들어가 보시라..
다들 그렇게 합니다.
액운은 불사르고 활활 한 해 열정적인 삶들이 되시라고 빌며 ...
▲ 그 망대에서 해안도 봅니다.
▲ 동북 쪽으로 보면 턱밑까지 주차장이 있고
사람들은 구두를 신고도 여기까지 오릅니다.
▲ 정부가 지정한 명승 제39호인 남해 금산(錦山).
'명승'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
▲ 볼거리는 38경에 달하는 기암괴봉들과
그림같이 펼쳐진 짙푸른 다도해를 비롯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 그 좌우에 선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보며
이제 내려가려 합니다.
▲ 오르내리는 인파가
복잡하고.
▲ 이제 우리는 보리암으로 내려갑니다.
▲ 거기 건너는 대장봉.
▲ 대장과 형리(刑吏)의 엄격한 모습.
그래서 대장봉과 형리봉이 되었습니다.
▲ 어떤 이는 여기가 보리암인줄 알고
스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 가기도 합니다.
▲ 다시보는 대장봉과 형리암.
▲ 보리암
강화 보문암,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과 더불어
국내 4대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제 인산인해속
보리암으로 내려갑니다.
▲ 관찰사 이재현? 이완용 당숙 입니다.
경상관찰사(도지사)를 지냈으며
일사능약 이후 의병토벌에 앞장선 친일파중의 친일파입니다.
'사천군수 남해서리 윤순백', 비교적 평판이 좋던 그가
관찰사를 수행하여 보리암을 구경했나봅니다.
▲ 그 관찰사 '이재현' 때문에 침을 밷고 싶은 불쾌함이
한발 내려서면 보리암 건물사이로 펼쳐진 장관으로 치유됩니다.
▲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개국 하기 전,
이 산 보리암 근처 선은전 터에서 100일 동안 절박한 마음으로,
‘내가 성공적으로 등극하게 되면 이 산 전부를 비단으로 덮겠나이다’
서원하였습니다.
▲ 성공적으로 조선을 개국 등극한 그는 이 약속을 지켰을까?
사람은 서원 할 때와 이뤄지고 난 다음의 마음이 같지 않은 법입니다.
불가능한 서원를 한 이성계는 말과 글로 때우고 맙니다.
▲ 저 이래에 있는 선은전...
깊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하니
그냥 다녀온 것으로 합니다.
▲ 태조는 비단으로 산 전체를 덮는 대신 ‘普光山(보광산)’을
비단 ‘錦(금)’자를 써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어 지금의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 이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지은 보광사로 지은 것을
▲ 17세기 조선 현종이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 됐습니다.
▲ 저 아래로는 해수관음상입니다.
.▲ 보리암 3층 석탑
(경남유형문화재74호) .
▲ 인도여인이었던 가락국 김수로 왕의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비보(裨補) 성격의 3층 석탑입니다.
▲ 동쪽 방향의 수 많은 바위들.
▲ 보리암의 보광전을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서면
흰색의 관음상 뒷모습과 마주칩니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해수 관음상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 분주한 마음으로 모두들
기도를 하고, 절을하고, 탑을 돌기도 합니다.
▲ 인간의 삶은 누구나 약하고
근심 걱정의 짐이 없는 이가 없으니...
▲ 불교신자는아니지만 이 자애로움에
평안을 느낍니다.
▲ 만일 여기에 암자와 관음상이 없다면
이 가파른 산 기슭의 엄청난 바위의 위세에
이런 평안함이 어디 있을까?
▲ 상사바위도
저 건네에 그대로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쌍홍문을 통하여
하산 하려고 합니다.
▲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보좌 같기도 하고
새로나온 자동차 홍보물 같기도 합니다.
▲ 그렇게 내려서면 '음성굴'..
생김으로 봐서...
▲ 야릇한 산부인과적 상상하는데
한자를 보니 소리 음, 소리 성를 씁니다.
▲ 해수 관음상 아래에 그런 형이하학적 상상을 해서야 쓰겠는가!
그래도 한자는 지우고 싶었습니다.
▲ 보리암에서 10분쯤 걸어 도착한 쌍홍문.
금산의 관문입니다.
▲ 그 장엄한 쌍홍문의 모습에
놀랍니다.
▲ 말 그대로 무지개 모양의 문이 두 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
일명 '해탈문'입니다.
▲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장군암도,
▲ 네 신선이 놀았다는
'사선대'도 있습니다.
▲ 내려가는 인파는
엄청나게 늘었고.
▲ 옛 이름 천양문도 신라의 원효가 지었다는 쌍홍문도
의미있는 이름입니다.
하여간 그 안에는 수천명이 피난해도 될듯햇으니...
▲ 다도해를 품은 산악공원 금산.
발아래 잡힐듯한 다도해의 모습과 함께 오래오래
몽우병적 그리움이 사무칠듯합니다.
▲ 보리암에서
금산주차장까지는 1.9K.
▲ 1973년에 남해를 여행하던
<둘다섯>은 금산 보리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발아래는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상주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 "캄캄한 밤바다에 작은 불빛이 외롭게 떠가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느낌을 그대로 메모해 즉석에서 흥얼거려 어느 정도 노래가 되어
"밤배"를 완성하게 됩니다.
▲ ♪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
▲ 그렇게 고운 님들과 함께한 하루
평온함이 다시 그리움이 되고 ..
▲ 하루 산행을 마감하고
군북 어느 식당으로 달려 와
함께 했던 즐거운 저녁식사와 그리운 님들..
▲ 더 할 나위없이 포근한 날씨속에
함께 했던 오솔길... 새로운 집행부의 수고로움에 감동하고
그리움 님들도 행복했으니
'오솔길'도 오래오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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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아가씨 /조미미
♪밀물에 미역 따고 썰물에
굴을 따는
섬처녀 가슴 속에
그리운 정 쌓이면
파도소리 뱃고동소리
우리 님 아니신가
아아 애만 타는 열아홉 살
남해 아가씨♬
♬밀물에 미역 따고 썰물에
굴을 따는 섬처녀 가슴 속에
그리운 정 쌓이면
먼 하늘 바라보며 그리운 마음에
아아 애만 타는 열아홉 살
남해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