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산청 ‘동의 보감촌 뒷산’에는 ‘왕이 머문 산’, ‘왕산(王山)과 필봉산(筆峰山)’이 있고
그 산의 너머 기슭에는 돌을 쌓아 조성한‘구형왕릉’이 있다.
‘구형왕(仇衡王)’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의 10대손으로 521년 제10대왕으로 등극했지만
11년 후 532년, 백성을 전쟁 속에 밀어 넣을 수 없어 조용히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식솔들만 거느리고 거기에 기거하다가 ‘나라 잃은 죄와 원통함이 이리도 큰데
내 어찌 편히 흙에 묻히겠는가. 나의 무덤은 돌로 만들어라"’ 유언을 남겼다.
그는 항복할 때 아들 셋을 데리고 진골에 편입 되었는데 그 아들 중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장군 이였으며, 김유신의 조부가 된다. 그 김무력의 장남이 김서현인데 왕족 처녀와
사랑에 빠졌고 극심한 반대에 부딛쳐 충청도 진천까지 야반도주하여 살다가 그 진천에서 김유신을 낳았고
그래서 진천에는 김유신의 태실과 사당이 남아있으며 지금도 제사가 봉행된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대장군이 되었으며 삼국유사 50권중 10권이 삼국의 인물을 소개하는데
그 열권 중 4권이 김유신 이야기일 정도이다.
김유신은 162년 후 ‘흥무대왕’이란 칭호를 받아 왕으로 격상된다. 우리역사에 신하가 왕으로 추앙받은
일은 유일한 일이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은 태대각간의 직위를 받고
673년 78세로 세상을 떴으며 누이 문희(文姬)는 김춘추에게 출가하여 무열왕비가 되어 문무대왕을 낳았다.
김유신이 17세에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서라벌 서쪽 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고구려,백제,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4일만에 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에게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 (神劍)을 주었다고 삼국사지,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에 소개되어있다.
김유신은 이 신검으로 고구려, 백제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의 화랑들이
수도하던 산에서 김유신은 이 칼로 무술연마를 하면서 바위들을 베었다고 하여
이름이 단석산(斷石山)이 되었다.
조용한 겨울 산, 그 김유신과 화랑들의 무술 연마터 단석산을 걷는다.
그 기슭 천년전 조상들의 손길로 조성된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199호)을 보러
그 길을 택했다.
▲경주가 낳은 대표적은
문학인은 김동리와 박목월이다.
▲그 둘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불국사 근처 '동리목월문학관' 이었다.
오늘은 단석산을가는 길에 '목월 생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목월 생가는 경주시가 건천읍 모량리에
4100㎡ 터에 안채, 사랑채, 디딜 방앗간, 시 낭송장
등로 조성했다.
▲1915년 그는 여기서 출생했고 본명은 박영종.
1939년 '문장'에 '길처럼' '연륜'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화여고 교사도 지냈고, 서울대학교, 홍대,
서라벌대등에서 강의하였고
한양대학교에서 교수, 학장을 역임했다
▲나는 고교시절 고1 국어 교과서에
'나그네' 시를 공부하며
그의 시를 만났다.
▲서울 원효로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효동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장로가 되었고, 그의 부인도,
그 후 그의 아들 박동규 교수도, 며느리도 장로가 되었다.
▲ 1946년조지훈, 박두진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이란 시집을 발간하였다.
▲ 혹자는 그가 육영수 여사의 시 선생 노릇을 했고, 육영수 전기를 지었다고 비판하지만
그 시절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개인사적으로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둘 정도로 다복했으나 가난했고.
▲요즘 같으면 많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교수와 여제자와 홀연히 사라져 살림을 차렸고,
그를 찾아간 부인 유익순님의 지혜로운 처사와 함께
그 애인과 이별한 이별의 노래가 아프다.
▲대한민국 국민이 다 외는,
그리고 노래하는 송아지.
▲목월은 향토성이 강한 서정에서 출발하여
만년에는 신앙에 깊이 침잠하는 시 세계를 보였다.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서정시인이다.
▲작은 그의 생가는
아기자기한 옛 풍경을 보여줬다.
▲댓돌, 튓마루.. 정겨운 모습.
▲그는 1978년 고혈압으로
63세의 일기로 타계했으며.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 나그네/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어릴적 우리집 부엌 모습에
짙은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원고등
▲담 너머로 봄이면
밀 밭이 생기겠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삶의 소리가 들리는듯 한 우물가
▲ 짧고 깊은 서정시들이
정겨웠으니...
▲ 시 낭송회등 문학행사가
열릴 수 있는 시설도 좋고...
이제 거기를 20여분 떠나 '단석산 공용 주차장'으로 간다.
▲단석산 공용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1K를 더 오르기도 했다.
공원지킴터 옆에 차를 파킹하고 산행 시작이다
▲공원 지킴터에서 정상까지는 2K여.
계속 오름이지만 문화재를 보기 위해 여기 코스를 택했다
▲공원 지킴터에서 700m 오르면 만나는
작은 사찰, 신선사
▲거기에 유명한
'신선사마애불상군'을 만날 수 있다.
▲신서사 우측으로
등산로가 조성되었고
▲해우소 아래엔 정겨운 물도
준비되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이 곳은
인공으로 지붕을 덮어 만든,
이른바 '토굴법당'으로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었다.
▲신선사 대웅보전 앞에 있는 불상
▲거기서 우측으로 국보를 만나러 간다
▲ㄷ모양으로 솟은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여러 불상을 말한다
▲암벽의 3면에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거대한 미륵입상을 중심으로 동쪽과
북쪽 벽면에 보살상이 새겨져 삼존을 이룬다.
▲이 면 위로 불상, 보살상, 인물상등 7구가 새겨져 있는데
모두 우측의 미륵입상을 향하고 반가사유상이 특이했다
▲이른다 공양을 바치는 두 인물상, 하나는 나뭇가지나 곡식같고,
하나는 향로인가, 생수인듯한 공양에 정성이 깃들었다.
모자와 옷차림이 섬세하여 7세기 신라인들의 복식 연구의 자료도 된다.
▲가운데 거대한 미륵불상.
엄숙함을 느낀다
▲중간에 무슨 글씨체 같기도 한데
신라 마애불중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평가 받는단다
▲거대함과 섬세함에 놀란다.
우리의 옛 조상들의 정성이 담겨져 있다
▲발과 발톱 모양까지 섬세하다
▲북쪽으로는 지장 보살상
▲동쪽으로는 또 다른 보살상,
그래서 삼존불이다.
▲남쪽의 7구의 마애불 중 하나
▲공양하던 인물의 버선코까지 살아있다
▲옛 선인들의 향기를 채 가시기도 전에
된비알의 산행 1K는 시작된다
▲단석산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화랑시절 호연지기를 길러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 장소.
▲단석산의 단석은 김유신 장군이 검으로 내려친 바위라고 하고,
김유신 장군이 물을 마셨기 때문에 이름이 남은 음마지,
물을 마신 곳이 장군지다
▲김유신은 이 신검으로 고구려, 백제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며
당시의 화랑들이 수도하던 산에서 김유신은 이 칼로 무술연마를 하면서
바위들을 베었다고하여 이름이 단석산(斷石山)이 되었다.
▲ 천주사 쪽에서 오르는 등로에도 김유신의 유적이 많고,
당고개에서 오르는 길도 좋으나
마애불을 위하여 신선사에서 오른거다
▲통일 이전 신라오악은 ‘왕경오악’이라 해 서라벌 주위의 산인 동악 토함산(745.8m),
서악 선도산(380.6m), 남악 남산(468m), 북악 소금강산(176.7m),
중악 낭산(99.5m)인데 김유신 열전에는 단석산이 중악으로 나온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에는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846.5m), 남악 지리산(1915.4m), 북악 태백산(1566.7m),
중악을 팔공산이라 해 그 범위가 넓어졌다.
▲김유신이 내려쳐 단석이 되었단다
▲거기에 섰다. 멀리 와야하는 산이기에
다시 오기 쉽지 않다
▲새해에는 하루 한번 하늘을 보려고
감성의 씻음과 여유를 위하여
▲거기서는 동북방향으로 경주 시내와
남산, 토암산등이 조망된다
▲1300여년전 신라인들의 소리가 들리는듯,
골골이.
▲김유신의 출생지가
충북 진천이니 우리 고향사람이다.
나도 그의 힘을 얻어 내리쳐 보자, 모든 액운도, 어두운 그림자도
▲거기 따뜻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아쉽게 하산한다
▲단석산 답게 화랑들의 훈련 탓이려니
▲단석산 서북쪽 오봉산애는
신라향가인 '모죽지랑가'의 벼경이 된 여근곡'이 있다
▲그 여근곡을 찾지 못해 사진을 옮겨왔다
유홍준 교수도 이 여근곡을 소개한 바가있다.
▲남쪽으로 가지산, 운문산이 보이는 아련한 곳에
위험을 무릅쓰고 바위 위에 오른다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경..
산이 바라다 뵈는 꼭대기에 서서
종일 잠잠하는 돌이어라
▲다시 1300년전
신라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국보 제199호 마애불군을
돌아본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신선사 소박한 모습.
▲7세기 부터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인물과 산과 관계된곳이 많다
구미 금오산과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야은 길재는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고향인 구미 금오산으로 내려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 의령의 진산 자굴산은 남명 조식을 떠오르게 한다.
말년엔 지리산 기슭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지만
28세 때 자굴산 명경대에서 글을 읽으며 뜻을 세웠다.
▲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의 안타까운 전설이
서려있는 월악산
▲ 고려말 이성계에게 끝까지 저항하며 지조를 지킨
안동장군 이미숭의 절개가 흐르는 고령 미숭산 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아쉽게 원점회귀하여 서둘러 운문사로 향한다.
거기서 40여K...
▲단석산의 여운을 남기고 40K를 달려
운문댐을 돌아 운문사로 온다
▲유홍준이 운문사의 5가지 아름다움중 하나인 자랑거리 숲길.
그는 운문사로 들어가는 1Km 남짓
양옆의 늠름하면서도 아리따운 홍송 이야기를 한다.
▲유홍준은 거기에 승가대학이 있어 항시 사미니계를 받은
200여명의 비구니 학인 스님이 있다는 점을 드는데,
▲ 오랜 교수생활 경험으로 그는 학생들이 가장 예쁘게 보일 때가 1학년 2학기 첫 강의에서 보는 얼굴이라고
그래서 1학년 2학기가 아직은 선량하고 앳되면서도 뭔가 해볼 의욕이 빛나는데 운문사 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사미니계를 받고 2년 남짓 되어 그 학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운문사는 진흥왕 18년에 한 스님이
3년 수도 생활후 창건했다는..
▲운문산을 호거산이라 하는게 흥미롭다.
▲처진 소나무로 유명한 천연기념물...
높이 6m, 둘레 3.5m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
▲그 위용이 대단하고
동서남북 사방이 고른게 특이했다.
▲ 유홍준의 운문사 자랑거리 다섯중
둘째로는, 250명의 낭낭한 무반주
여성 합창 같은 장엄한 아침 예불을 말한다.
▲네째는, 영남 알프스라는 높고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음에도
운문사는 넓은 평지사찰로 그 안온한 분위기 때문이고,
▲ 다섯번째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여기서 썼다는 점을 들면서 삼국유사는 인각사에서 발간되었지만
집필은 여기 운문사 주지로 있던 시절이라고 했다.
▲관음전
▲'작압' 이름이 특이했다.
▲까치의 전설이 흐른다.
작갑사(鵲岬寺)는 운문사의 처음 이름이다.
▲그 안의 석가여래 좌상도 보물이고
▲ 좌우 도열한 사천왕 석주도 보물이다.
▲들어갈 수 없는 궁금증인가
스님들의 공간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웅보전의 동쪽과 서쪽의
3층 석탑도 보물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이란다
▲그 해설을 한참 들여바 보았다.
더 공부해야 이해될 분야가 많음을 새삼 깨닫고
▲대웅보전이 여기와 뒤로
더 크고 현대적인 대웅보전이 특이했다
▲3층 석탑 서쪽 탑의 기단에
새겨진 조각이 섬세하다
▲조용한 비구니 스님들의 정갈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간간이 잔나비 우는 산 기슭에는..
▲봄, 그리고 여름이 오면 화려한
곳곳은 서러운 빛깔의 향연이겠구나
▲1994년 간행 되었으니
어느덧 30여년이 되어가는 유홍준의 ‘나의문화답사기’ 2권에는
‘운문사’에 관하여 50여쪽 긴 내용이 맛깔스럽게 서술되어 있다.
▲여름날 숯한 답사객들이 앉아 쉬던 만세루 바닥.
거기도 정갈함이 가득했다
▲대웅보전도 보물 제835호.
▲그 안의 후불탱화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만세루는 흡사 촉석루나,
밀양의 영남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쳐진 소나무등을 돌아보며 거기를 떠난다.
언제나 마음 숙연히 하는 운문사.
▲향기로운 사람?
향기는 아니라도
이 사회에 냄새 풍기는 삶은 아니였으면...
▲솔 바람 길...
거기를 걷는다
▲마음을 비워둔 하루,,,
오늘 하루만이라도 가벼워 지자.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그렇게 숙연한 역사의 곳곳, 그리고 산행...
그렇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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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노래 / 박목월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山行..그리움따라 > 경상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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