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도산, 옥산, 병산, 소수서원과 더불아 조선5대 서원으로
조선 5현(五賢)중 1위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이다.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당한 사림파의 문인인데 스승이 김종직, 벗이 정여창,
김일손등이며 제자로 조광조, 이장곤등 쟁쟁한 개혁가들이다.
그의 집안은 원래 황해도였으나 증조부가 현풍 곽씨와 결혼하며 현풍으로
내려와 현풍 사람이 되었고 그의 할아버지가 개국공신 조 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면서 김굉필은 단종2년(1454)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호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던 그는 19세에
순천 박씨와 결혼하면서 합천군 야로에 살게 되는데 개울 건너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지내다 현풍으로 와서는 도동서원 뒷산
대니산 아래에 살았다.
1476년 20세의 그는 함양군수 김종직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26세에
과거에 합격, 여러 벼슬을 전전하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유발된
무오사화 때 그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로 귀양 갔고
거기서 17세의 조광조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는다.
47세에 다시 순천으로 유배가 변경되었고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사사 당했는데 7년 귀양살이 끝에 51세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고
후환을 두려워 한 이들은 그의 문집, 오갔던 편지등은 불 살라졌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그지만 중종 2년에 복권되어 도승지가 되고,
선조 8년에 영의정, 그리고 문경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고 광해군 8년에는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 황과 함께 동국오현(東國五賢),
그 중에서 수현(首賢)으로 배향되니 생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없는 영광으로 받게 된다.
500년전의 사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그를 기리며 도동서원을 간다.
▲2019년 도동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사적 488호 도동서원...
'도가 동쪽으로 온다'는 의미란다.
▲안내판이 김굉필에 대한
간결한 소개가 없어 아쉬웠다.
▲다섯이 손을 잡아야 안을 수 있으니.
▲한훤당 김굉필의 외손자인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을 세우면서 심었다는
수령 400년 은행나무.
▲어느 가을 노란 카펫 그 시절에
한번 와야겠다.
▲'수월루' 1605년 창건 당시에는 없었는데
250년후 증축한 것이란다.
시야를 가리고 도동서원의 격조 높은 건축의 미에
손상을 주어다고 비판받는다
▲'환주문'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의미,
작고 아담함이 매력이다.
▲ 갓을 쓰고 온 양반은 여지없이
허리를 굽혀야 했으리라.
▲정갈하고 아름다운 포근함이 있다.
▲ 남향을 버리고 북향을 택함은
은행나무 너머 낙동강을 바라보기 위함인데
높다란 수월루가 가로 막았다.
▲너른 강당인 '중정당' (보물350호)
정중한 분위기 못지않게 기둥에 흰 종이를 둘러
멀리서도 문묘배향 선비를 모신 서원임을 알려준다.
▲넢은 석축 위에 올라앉은 중정당,
정중한 분위기기 서리고....
▲건축 배치의 정갈함이
곳곳에 서려있었다.
▲돌거북일까?.
▲ 중정당 뒷모습.
▲서원 뒤쪽으로 제사가 끝난다음 제문을 소각하는 시설인 '차(次 )'와
사각 돌기둥에 네모난 '생단牲壇' 은 제사에 쓰일 '생'(고기)이 적합한지
검사하던 단이다.
▲ 사당은 굳게 닫혀있고
한쪽으로는 보수공사중이고 ..어수원함이.
▲ 유홍준의 답사기에는 서당안의 회화을 소개하는데
접할 수 없어 안타까웠고.
▲더운 날씨만큼이다 아쉼이 많은 답사 길이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역사의 개혁가들은
바위를 깨기 위한 한 알의 계란이었으니....
▲ 한훤당의 500주기를 추모하여 세웠다는 추모비.
'서원'으로만 의미를 두지말고 좀더 개혁가의
아픈 일생을 조명 했으면 싶다.
▲ 서원 뒤로 600m 위치한 한훤당 김굉필의 묘.
▲마당 쓰는이 따로 있고,
지나가는 원님 따로 있는 법이지만
역사의 고비마다 생을 바친 개혁가들의 아픈 삶을 오늘에 기억했으면 싶다.
▲ 구지면의 큰 공단지역을 지나 창녕군 이방면으로 오다보면
망우당 곽재우 묘소가 있다.
▲ 그러나 현풍의 곽씨 문종 묘로
좀 실망스런 모습이고.
▲ 어릴적 이런 하얀 '삘기'꽃을 보면
다 뽑아 먹지 못하고
저리된 것을 많이 아까워 했었다.
▲여러 묘소에중 망우당 묘소를 찾기도 어렵고
그 초라함이 적이 놀랐으니.....
그렇게 오후에 나섰던 짧은 답사의 길
역사의 희생자, 나라의 변란과 변혁에 목숨을 던진 자들
그 얼을 다시금 되새겼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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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는 쓸어 낸듯 구름 한점 없고
거센바람 쓸쓸하게 일어 메마른 잡초에 부는구려.
우두커니 수심에 잠겨 창공을 바라보니
장구한 하늘아래 싸래기 같은 내존재.
고독을 못내 괴로워하면서
남들과 기호를 같이하지 못하다니.
아 ! 다섯째 노래! 노래에 애간장 끊어지니
넋이여 ! 사방 어디로 돌아갈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