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경남.부산.울산

경남창원.광려산(匡廬山·752m), 대산(大山, 726m/광산사주차장~능선 삼거리~삿갓봉~광려산~~대산~임도-주차장( 원점회귀/ 9㎞.5H)

산꾼 미시령 2021. 5. 31. 22:43

자산어보(玆山魚譜)’

최근 영화로 유명해진 이 책은 정약용의 형 약전(丁若銓)이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살이하면서

장창대라는 박학다식한 청년을 만나 흑산도 연해의 수족을 연구,

 

1814년에 저술한 어보, 즉 어류 백과사전인데 여기서 자산(玆山)의 ()는 흑이란 의미이니

자산은 흑산도를 말한다.

 

 짧은 지면이지만 다산(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먼저 떠오르는 한 인물,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정치, 경제, 과학, 농학등 다방면으로 천재였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가 49세로 죽은 후, 집권층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집안전체가 참수’,‘능지처참’,

유배등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벼랑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죄라면 단지 열린사회를 지향했다는 것으로 닫힌 사회, 증오의 시대의 기득권층 미움으로

철저하게, 그야말로 한 인간과 집안을 이 이상 처절하게 멸절 시킬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다산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다산은 5형제 중 4째였다.

 맏형 약현은 그의 사위 둘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그 사위중 하나가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1801)황사영이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26세에 서소문밖에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는데 백서의

내용이 과격하여 여러 평가가 있지만 최근에 성인복자 반열에 올랐다.

그 부인과 아들은 노비가 되는데. 황사영은 훗날 소개 할 기회를 기대 해 본다.

 

 네 살 많은 둘째 형 약전’(若銓, 1758~1816)16년을 유배생활을 하다가 흑산도에서

숨을 거뒀다. 처음에 둘은 포항으로 유배를 갔지만 1년 만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압송, 말할 수 없는 고초을 당하다가 다산은 강진으로, 약전 흑산도로 유배를 가면서

나주에서 피눈물로 헤어졌다.

 

 각기 저 멀리 가몰 거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워 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형이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부음을 받던 날 강진의 53살 동생은 통곡하였다.

 

술에 취해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그 통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네(醉登北山哭 哭聲干蒼穹)

 

세째 형 약종42세로 신유박해때 장남 철상과 함께 처형되었고,

그 부인과 차남 하상과 딸은 기해박해때 처형되어 온 식구가 멸절 되었다.

 

 이뿐 아니라 매형 이승훈은 목을 자른 것으로 모자라, 턱뼈도 부서져 없어져 버린상태로

처형되었는데 경기 광주 천진암천주교 성지에 묻혀있다.

 

이처럼 천재집안의 형제들이, 단지 열린사회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고

처절하게 멸절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에서 우리민족에게 5백 여권의 저술로 화답했고,

흑산도의 형, 약전자산어보등 수십 권의 저서를 남긴다. 이들 천재 형제들이 보여준 학문적 진취와

스스로 제물되어 새로운 신앙세계의 문을 열어준 정신은 오래오래 추앙받아 마땅하리라..

다산의 학문적 깊이와 백성을 사랑한 정신은 시대와 국경을 추월한다.

베트남의 혁명영웅 호치민은 매일 베게 맡에 뒀던 '목민심서'를 자신의 관속에

를 넣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마흔에 유배생활을 시작하여 18년 후 다산은 다행이 57세에 풀려나 고향 경기도 남양주로

돌아갔고 그의 나이 74세에(1836),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나와 다른’ ‘기득권 층과 다른사상을 용납하지 않는 닫힌시대의 무게는

누군가의 어깨 위에 짐으로 지워진다.

 

나의 오랜 꿈 중 하나는 다산의 책을 더 깊히 읽고, 경기의 남양주 능내,

전남 강진, 수원 화성, 그리고 황사영의 성지인 충북 제천의 배론,

경기 천진암 성지와 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등을 반드시 답사하는 것이다.

 

꼭 그런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오랜 맨토 광산 김보이선생님과 동행하여 광려-대산을 걷는다.

다산과 그의 형제들을 아프게 기억하며..

광산사(匡山寺)

내서읍 신목마을에 위치.. 

광산(匡山),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은둔자의 대명사인 광유(匡裕)

여산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여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의 오랜 멘토 '광산 김보이 선생님'.

넓은 인품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늘 부럽습니다. 

▲저 보다 14세 위이신 해병대 대위출신,

파월장교를 지내시기도 하신 님은 예술적 사진 능력과, 정리하여 나눠주는 세밀함까지...

오늘은 맨토와 동행하여 걷습니다.

광산사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일주문 우측, 단계사 방향으로...

 

▲탐스런 보리수..

어릴적엔 '보리똥'이라 했는데

▲구름에 달가듯이..

▲단계사...

선암사(태고종 총림)의 마산포교원이라네요.

▲400m 오르면

산행은 시작되고.

▲ 새순과 꽃 천지였던 작년 4월에 왔었는데

이제는 여름 숲속 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

그렇게 700m를 땀흘려 오르면 능선 삼거리,  

우측으론 상투봉으로 가고,

우린 좌측 삿갓봉으로 갑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방의 낮은 물론이고  

밤도 갖고 싶듯,  

산은 언제나 훔치고 싶은 빛깔.

 

 

▲앞으로 14년 후

나도 저렇게 다닐 수 있을까?

▲광려산 삿갓봉(720m)에 닿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 주는 걸 사랑이라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이야  

큰 사랑은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일테니...

 

여항산-한재를 지나온 낙남정맥은 

쌀재-무학산으로 흐르고...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어수선하지만  

이 강산에 봄이 오듯 다 지나갈 것이고.

 

전국의 산들을 소박하게 걸어 볼  

시절이 곧 도래 하기를 바랬습니다.

 

가야할 광려산은

우뚝했지요.

▲저기는 상투봉,

우측으로 무학산.

 

 멀리 여항산과 그 좌측으로 서북산,  

우측 아래로는 함안시내입니다.

 

 아래로 진북 산업단지,  

우측으로 오르는 도로는 한재를 넘어  

가야읍으로 갑니다.

 

 

'좌우봉원'이라 했던가?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헤아리면  

공부의 원천인거지.

 

광려산(匡廬山·752),  

중국의 명산인 여산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고  

무학산을 사모하듯 바라보고 있지요

 

우측으로는 어느 해 올랐던  

진북 외추마을방향에서 오르는 길도 있지요.

 

광려산은 멀어져 갑니다

 

아래로는 출발지  

신목마을 전경.

 

동쪽으로는 마산을 감싸 안은 무학산.  

그 좌측으로는 천주산, 농바위,  

그리고 청룡산이 저마다 키를 자랑하듯 합니다.

 

광산사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납니다.  

안내판이 아쉽습니다.

 

절정보다 더 아름다운건  

정점으로 치닫는 모습일 수도 있으니.

 

그래서 송나라 시인 소옹은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뒤 예쁜꽃 보노라  

반쯤 피었을 때'.

▲어느덧 지나온 길도 길어졌지요.

▲아찔한 바위도 올라보고

▲ 마지막 대산은

저렇게 인내를 요구합니다.

▲ 진동 앞바다와

그 너머로 고성군 동해면...저 멀로 거제.

▲ 진달래 군락지는

점점 그 위용을 잃어갑니다.

▲요기는 소박하게

그러나 정겨움이 배가 되었고.

아래 추곡저수지,  

우측 진북의 외추마을에서 시작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여기를 올랐다가  

중앙 산정으로 내려가 저수지 좌측길로 원점회귀 한적이 있었지요.

 

▲ 오늘 걸어온 길....

여름날의 숲길이었습니다.

멀리 진동의 앞바다가  

정겹게 다가오고.

우측으로 구절산-거류산-벽방산

 

 

대산(大山, 726m)  

다시 만납니다. 반가이......

 

대산은 우리 '장수산악회'의 어머니 산...  

매년 여기에서 시산제를 지내며  

한 해의 안전 산행을 기원하지요.

 

거기서 건너다 보는 무학산의 위용,,,

  우측은 대곡산...

 산 허리에 저리 둘레길 임도가 나고.

 

 

 

▲ 여항산-서북산으로

광려산-대산으로 흐른 낙남정맥은  쌀재와 무학산으로 뻗어갑니다.

그 사이로 무학산 넘어 '내 고향 남쪽 바다'  

이은상이 봤던  

마산 앞바다, 돝섬..

 

 

눈물은 눈에만 있던가..기억에도 있고  

또 마음에도 있는게 눈물이려니...

 

무학산 아래에는 누군가의 눈물겨운 고향...

  '릴케'던가요?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광산 선생님 카메라는

마창대교도 이렇게 당겨오고.

▲한진중공업도

▲'쾅이강의 다리'도

당겨옵니다.

 그렇게 아쉼을 남기고  

하산하려 합니다.

그렇게 내서읍 삼계지역을 품고 있는  

무학산과 광려-대산.

미끌어지듯 한참을 내려오면  

임도를 만납니다.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는 세월이 아쉬운 것은  

짧디짧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으려니....

 

아침 출발하였던 신목마을.   

다시 건너다 보면  

오후 햇살에 빛나고....

 

그렇게 진한 녹색 숲길을 따라 걸었던 길...

  다산 형제들의 삶을 기억했던 길...

 

  때로는 무상무념..

생각도 없이 그렇게 하고 싶던 하루.

▲그렇게 다시 광산사 입구로 돌아오고....

'선생님 호가 광산이신데 광산사와 인연이 있습니까?'

'아니오,  광산 김씨라 광산이오 ...'

▲무더운 날씨 멘토와 함께한 하루...

선생님은 극구 당신께서 계산하며 뜨거운 순대국밥을 사 주십니다.

가슴 뜨거워 지는 국밥, 그리고 멘토의 사랑.....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듯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성급하게 흐르니.

 

▲오늘의 충격...

출근하면서 마트에 들려 필요한 것을 사고 계산하려니

주머니에서 이게 나왔다.

세월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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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다는 것과

자신과 함께 뜻을 나눌수 없다는 것은

불행하고 고독하며 슬픈 일이기도 하겠지.

 

그것은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는 인륜에

관한 것이기도하고,

신념이나 신앙같이 시대의 금기나 역린을

건드려 돌이킬수없는 재앙이 되기도하지요.

...

 

그래서 다산의 말이 생각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오,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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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끝(자산어보ost)/최백호 노래

먼 아주 멀리 있는

저 바다 끝보다 까마득한

그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을 두고 오자

 

푸른 바람만 부는

만남도 이별도 의미 없는

그곳에 구름처럼 무심한

네 맘을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짙은 어둠만 남은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그곳에 물결처럼 춤추던

너와 나를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면

 

난 우리를 오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