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
조선 중기부터 민간에 보금되었던 선비들의 사학기관이다.
선현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선현제향(先賢祭享)과 학문연구로 인재를 양성하기위해 세웠는데
제사를 위한 사당과 서재, 기숙사, 도서관등으로 구성되었다.
서원이라는 말은 중국 당나라 때 설치된 '여정서원, 집현전서원'등에서 유래했으며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서당, 서원등을 장려하였고 유명한 성현을 기리기 위한 서원은 임금이 현판과
토지등을 주어 이른바 ‘사액서원’이 여러 생겼났다.
사당과 서재등을 갖춘 최초의 서원은 1542년 ‘주세붕(周世鵬, 1495 ~ 1554)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인데
그는 서원을 세워 유학자 안 향을 기리게 된다. 서원은 대 유행처럼 늘어났고
이른바 양반 가문들은 너도나도 세웠다.
인재양성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으나 점차 파벌과 과도한 비용증가등 폐단이 생겨 대원군은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47개 서원외에 모두를 철폐시켜 민심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전국에 아직도 남아있는 수 많은 서원은 문화재가 되었는데 그 주세붕의 생가와 그를 기리는 덕연서원
그리고 묘소까지 함안군 칠원, 칠서면에 산재한다.
뜨거운 여름,
그의 자취를 따라 답사길에 나선다.
▲신재주세붕(愼齋 周世鵬)선생 사적지.
경남 함안의 중부내륙고속도로 '칠서IC'을 나와
좌회전하고 100m후, 우회전하면 ..
▲ 주세붕 선생 영정을 모신 무산사(武山祠/ 경남유형문화재143호)가
나옵니다.
▲최근에 건립한 새 건물은
체험교육시설.
▲愼齋 周世鵬(신재 주세붕,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 '무산사'
주세붕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지요.
▲ 무릉동천(武陵洞天) 문화지향(文華之鄕)
함안군 칠서면의 무릉리 무산사는
선생이 중국 무릉도원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理想鄕)의 마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해옵니다.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 서원을 세웠는데
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액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입니다.
▲ 순흥 안씨들은 청백리 주세붕 선생을
그리 높히 숭덕비에 새겼습니다.
▲주세붕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은
1591년(선조 24) 동림 서원(桐林書院)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60년(현종 1)에 본향 남고(南皐)에 중건되었다가
1676년(숙종 2)에 덕연 서원(德淵書院)이란 사액을 받았습니다.
▲무산사 외삼문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영정을 종가 사당으로 옮겼다가,
1919년 사림의 공론에 따라 사당 곁에
유림들이 다시 무산서원(武山書堂)을 세웠습니다.
▲무산사 입구에 새긴 오륜가등...
주세붕은 사람이 지켜야 할 유교 윤리에 많은 애착을 가졌는데
고을 수령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때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어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유교 윤리의 다섯 가지 기본항목인 오륜을
일반에게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노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외삼문을 지나 들어가면
내삼문인 심원문이 있고.
▲맑은 햇살아래 '무산서당'이 있습니다.
무산사 내에 있는 무산서당..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무산서당...현판에서 무게감을
느끼게 합니다.
▲ 중앙 2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각각 2칸과 1칸의 방을 꾸민 것은
전형적인 서당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영주의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 바위에 세겨진 '敬'
주세붕 선생이 새겼는데...
▲경(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경(敬)자 위의 백운동(白雲洞)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
▲계단을 오르면 중앙의 건물에는
일각문이 있으며 문은 제월문(霽月門)이고, .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광풍각(光風閣).
▲광풍각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있다가
지금은 청풍각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좌측으로는 무릉사.
▲여러 건물들의 가람배치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무릉사는 제향공간이겠지요
청백리 선생의 이름을 추모합니다.
▲ 배롱나무의 자태에서
선생의 고고했던 삶을 배웁니다.
▲서당의 뒷 모습.
▲장판각에는 '무릉잡고', '수구집', '귀봉집',
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가
지금은 청덕각 사료 전시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습니다.
▲한참을 서서 남기신
문집등을 살펴보기도 했지요.
▲주세붕 선생은 30년간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가지 이상 놓지 않았다고...
.
▲ 그의 마굿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한 가마도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래도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무산사...
자체가 큰 감동입니다.
▲무릉리를 나서며
500년 된 5.5m의 은행나무도 보고...
▲거기서 3m여 떨어진 칠원읍 무기리..
'무기연당'에 왔습니다.
▲주씨고가 정려문
좌측 현판은 아들 주도복의 효자정려(孝子旌閭)이며
오른쪽 현판이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의 충신정려(忠臣旌閭)...
이를 합하여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 합니다.
▲ 주씨고가(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조선 영조 때 국담(菊潭)주재성(周宰成)이 지은 이후
주씨 문중의 종가로 내려 왔으며 18세기경에 중건되었다고..
▲사랑채 감은재
주도복의 서실로 이 곳에 국담문집판각(경남유형문화재242호)과
영종대왕복상도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담문집은 주세붕의 방계후손 국담 주재성(1681-1743)의 글을 모아
1908년 후손들이 4월 2책으로 간행한 책.
▲감은재의 맞은편... 한서문(寒棲門)
그 문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풍경이 기다립니다.
▲이 연못이 바로 중요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된 함안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해
관군(官軍)이 국담(菊潭)을 팠다고 ...
▲거기 경건한
영정각(影幀閣)이 있습니다.
▲후손들의 경건한 정성이
글자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한자도 퍽 아름다운 디자인적
모양을 가진듯 합니다.
▲이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 '무기'(舞沂)는
논어에 나오는 '욕호기 풍호무우'(浴乎沂 風乎舞雩)'에서 따 온 글자로
이름에서 목욕하고 기우제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쐰다'라는 뜻...
그러니까 세상사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그 말입니다.
▲영정각에서 본 기양서원중건기념비와
영정각(影幀閣)에 걸려 있는 주씨부자.
▲충효사..
무기리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상주(尙州) 주씨(周氏)들이 이주하여 와서 집성촌을 이룹니다.
▲ 오래지 않은 1971년에
총효각을 세우고
▲조상님들을 기려 제향하는 곳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무기연당은 전통정원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13x20m의 국담(菊潭)에 4m 방형크기인 모래섬에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아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습니다.
▲우측은 풍욕루(앞면 3칸, 측면 3칸
앞쪽은 하환정(앞면 2칸, 측면 2칸)
▲하환정(何換亭),
자연의 삶을 고난의 벼슬길과 바꾸지 않겠다는 뜻..
초야에 묻혀지낸 조선선비의 표상입니다.
▲ 연당 가운데 석가산(石假山)을 쌓고 그
위에 당주(塘洲)인 양심대(養心臺)를 만들고 담장을 쌓았으며
일각문(詠歸門)을 건립하였습니다.
▲풍욕루(風浴樓)
'바람에 목욕을 한다'...
그 자리에 앉아 못을 바라보니 절로 힐링이 됩니다.
▲풍욕루의 편액과 대청마루벽에 “敬”자 편액이 걸려있는데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라는 경고가 아닐까...
그 대청마루에 앉아
책 한권 읽으면 좋겠습니다.
▲ 앞 돌계단 끝에 돌은
선비들이 갓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탁영석(濯纓石).
▲부산에서 왔다는 한 젊은이가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줍니다.
▲연담의 오른쪽 모서리를 감싼 향나무는
용트림을 하다 하다 구부러지고 갈라지고 ....
▲연당 옆에 서서 섬을 향해 한껏 드러누운 늙은 소나무
연초록빛 연못 속에 비친
저 늙은 소나무가 자못 경건해 보입니다.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石假山),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암각은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이
오랜세월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 무기리 주씨고가(咸安 舞沂里周氏古家, 경남 지정문화재 민속자료 10호)와
무기연당(咸安 舞沂蓮塘, 국가지정문화제 208호)
약 300년 전에 상주(尙州) 주씨(周氏)들이 이주하여 와서 생겨난 집성마을..
오래오래 본존되고 평화로운 마을 이어가시기를....
▲무기리에서 2K여를 가면 양정마을이 나오고
거기엔 덕연서원(德淵書院)이 나옵니다.
▲외삼문인 여림문, 양 옆으로 방 두 개가 있고
낮으막한 양식이 독특합니다.
▲외삼문 건너를 보면
광려천과 소박한 것들이 모여 그림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추억의 꽃 봉숭화..손톱에 꽃물을 들이기 위해 봉숭화 꽃잎을 찧어
백반을 섞었고, 아주까리 잎으로 감싸면
자고나면 방바닥 여기저기 나뒹굴었지....
▲덕연별사
지방의 청백리 (배세적, 주박, 배석비, 황협, 주맹헌) 선대 유학자들의
모시고 기리는 공간입니다.
▲존덕사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1964년 존덕사를 지어
주세붕 선생을 받들어 모십니다.
▲덕연서원(경남 문화재자료 제67호)은 1549년(명종 4) 지방유림의 공의로
주세붕(周世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66년(현종 7) 중건하였습니다.
▲1676년(숙종2년) 덕연서원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지요.
▲그러나 곳곳이 잠겨있음은
퍽 아쉬움입니다.
▲덕연서원은 교육공간인 강당이 있고 주세붕 선생을 모신 사당 존덕사,
그리고 청백리를 기리는 덕연별사등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안에서 본 들어오는
외삼문인 여림문.
▲밖에서 본 덕연별사.
▲옆으로 나오는 문입니다
문들은 굳게 잠겨있고 담을 따라
옆으로 가면 들어갈수 있습니다.
▲덕연서원.. 한참을 공부합니다.
퇴직한 필자더러 해설사겸 관리인을 하라면
퍽 좋겠단 생각도 하고...
▲그렇게 양정마을 높은 곳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덕연서원..
오래오래 보면되기를 바라며 그 곳을 떠납니다.
▲주세붕 선생 묘소.
생가인 무릉리 무선사, 서원인 덕연서원, 그리고
무기연당에서 3K...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칠서공단 부근에 자리합니다.
▲농로로 걸어 가면서 만난 연꽃잎...
그 싱싱한 생명력에 힘을 얻습니다.
▲주세붕(周世鵬, 1495 ~ 1554) 선생의 묘(경남유형문화제33호)_.
관리가 덜된듯 풀은 무성하고....
▲그래도 멋진 소나무며..
엄숙함을 느낍니다.
산넘어는 창원상수도정수장, 칠서공단이 자리하지요.
▲ 묘소는 세 봉분이 있는데
제일 아래가 장조카인 '주조(周造)'의 묘.
▲제일 위의 묘는 아버지 주문보(文俌)墓..
합장묘로 한자가 흥미롭습니다.
明朝鮮國貞夫人昌原黃氏墓(명조선국정부인창원황씨묘)
▲비석내용이 묘소를 둘러친 모습이 이채롭고
글씨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월탓으로 여러군데
풍상을 겪은 모습도 디테일하고.
▲500년 역사를 이어온 흔적이
놀랍습니다.
▲가운데 묘가
신재주세붕(愼齋 周世鵬)선생 묘.
신도비가 있습니다.
▲주세붕(周世鵬) 선생의 묘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리(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리)
春秋館成均館事周公諱世鵬之墓(춘추관성균관사주공휘세붕지묘)
皇明萬歷十三乙酉(1585)立
.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데
그 모양이 독특합니다
망주석문
수무부모(誰無父母) 숙비인자(孰非人子)
▲누군들 부모 없으며 누군들 사람 자식 아니랴..
(부모를 가진 인간이라면
어찌 감히 이 무덤을 훼손 할 수 있겠는가 ?)..
▲임진왜란시 묘을 훼손하러온 왜들이
이 글을 보고 되돌아 갔다나?.
▲장조카의 묘는 상석없이
앞면이 이러합니다.
▲누군들 부모가 없는 이 있는가
누군들 어느 부모의 자식 아닌자가 있는가?
묘지를 떠나며 깊은 울림으로 남습니다.
▲오래오래 간직되어 선생의 가르침을
후손들이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세붕 선생 묘역(周世鵬 先生 墓域)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문신(文臣)으로 중종 때
처음 서원을 창설한 주세붕.
▲세월은 흘러도 후세에 교훈은 남고
인걸은 사라져도 산하에 새겨진 자취는 남는 것 .
▲우뚝우뚝 솟구친 산등성이와 골마다
감돌아 줄기차게 흐르는 물굽이마다 오랜역사와 교훈은 골골에 서려 있어
한 시대를 별빛처럼 반짝이던 영웅들의 자취와 얼이 스며 있으니....
▲숙연한 마음으로 칠원읍으로 되돌아와
유적지를 봅니다.
▲천연기념물 제 222호
새 발자국 화석지.
▲중생대의 쥐라기와 배악기라니 1억 5천년전...
바닷가나 호수를 거닐던 새 한 마리는 발자국을 남겼고.
▲그 자국은 돌이되고
화석이 되어갔으니...
▲새 발자국은 세계에서 두번째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발견이랍니다.
▲인공 시설물이 가대하게 만들어졌지만
막상 찾으려면 힘들기도 했지요.
▲물결 문양도 화석이 되었고
새 발자국도 화석이 되었으니....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피면
지질학의 놀라운 자취가 들리는듯 합니다.
▲거기서 건너다보면 청룡산은 구름속에 가렸고
우측으로 창원의 천주산이 이어집니다.
▲억년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곳을 떠납니다.
▲칠원천 징검다리를 건너
1K여를 걸어오르면.
▲함안에는 향교가 두 곳이 있습니다.
함안향교(함안면 덕암길 102(봉성리 1319-2),
그리고 여기 칠원향교(함안군 칠원읍 용산 4길 60-1(용산리 299)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입니다.
▲1991년 12월 23일 경남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자와 문하생, 한국의 대표적 유학자 설총 등 25 명현의 위패를 놓고 제향하는
칠원향교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6월에 거행됩니다.
▲향교역시 굳제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 없는 아쉼.
▲풍화루를 지나면 명륜당이 자태를 뽐내고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데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내삼문 너머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공간은
제사 공간인 대성전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하고 있는 향교입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 2 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칠원향교를 나서면서
옛 우리 조상들이
이 곳에서 학업을 연마하던 모습을 상상하여 봅니다.
▲굳게 닫힌 역사유물이 아니라
열려있어 많은 이들이 답사하고 성현들의 가르침
지친 현대인들에게 힘을 얻는 공간이길 바래봅니다.
▲답사의 즐거움....
그냥 스쳐지났던 곳곳을 돌아보며 그 역사를 알아보고
오늘의 교훈을 얻는 일에 한참 재미를 느낍니다.
부지런히 다녀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