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아! 지리산

지리산을 사랑한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유적지를 찾아서...

산꾼 미시령 2020. 7. 13. 21:08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1501년, 경상우도와 좌도에는 큰 인물 둘이 태어났는데

한 분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요, 한 분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이다.

 

둘다 70여세를 살다가 남명이 2년 더 사시고 72세에 돌아가셨고, 그가 죽은지 20년 후에 이 땅에는

전 국토가 황폐화된 임진왜란(1592)이 발발했다.

 

  그 중 남명 조식을 보자.

  그는 1501년 외가였던 경상도 삼가현 (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고 30세부터 처가가 있던

김해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에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에 돌아와 뇌룡정을 짓고 역시 제자들을 길러 이미 명성이

자자한 사림의 영수가 되어 여러번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한.

 

  지리산을 너무도 사랑하여 58세까지 10여차례를 등정한 남명은 61세에 아주 거처를 덕산으로 옮겨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12년을 살다가 157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요란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러나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그의 제자들은 의병같은

실천하는 삶으로의 그의 가르침은 계속 천둥처럼 세상에 울렸다.

 

  그의 자취를 따라 합천 삼가, 김해에 여러 유적이 남아있는데 특히 산청 시천에는 산천재를 비롯 기념관과

덕산서원, 그리고 묘소까지 조성되었다,

 

  7,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그의 유적지를 찾았다.

혼미한 마음으로.....

 

 

덕천서원(德川書院),

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576(선조9년) 그의 제자

최영경, 하항등 사림들이

그가 강학했던 자리에 건립하였습니다.

 

▲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602년(선조35년) 중건되었고

광해군(1609년) 때에

현판과 노비, 토지를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지요.

 

▲ 남명학파의 본산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인조반정, 대원군 시절, 서원 철폐령으로 비운을 겪었습니다.

 

▲시정문,

서원의 정문입니다.

시대를 정화하자는 것일까요?

 

▲ 지금 건물은 1926년 복원된 것으로

근래 선생의 선비정신과 교육사상을 새로 평가하면서

경남도 유형뮨화재 89호로 지정...

 

▲입구의 470여년된 은행나무

서원의 흥망성쇠를 다 보았겠지요.

 

 

▲중앙의 '경의당'을 중심으로 동으로 '진덕재'

서쪽으로 '수업재'가 있고.

 

▲요즘으로 보면 교실, 강당, 기숙사, 도서관등으로

쓰인 건물들이 즐비합니.

 

▲서원의 중심건물 '경의당'

 

선생의 사상은 (敬). 의義)입니다.

'안으로 경을 밝히고, 밖으로 의를 실천한다'.

 

▲뒤로는 굳제 잠긴 정갈한

건물이 한 채 있습니다.

▲담 너머로 본 숭덕사.

사당으로 제향공간입니다.

 

▲한옥의 매력중 하나는 뒷 뜰 쪽...

조란도란 이야기가 들리는듯 합니다.

 

▲경의당에서 바라본

입구.

 

▲ 우리집이 이랬으면 좋겠단

아담한 생각도 해 보고....

 

▲ '세심정'

밖에 위치한 정자,

유생들이 쉬는시간 휴식를 취했던 곳.

 

▲마음을 씻기에

충분한 풍경입니다.

 

▲덕천서원에서 1.5K쯤 오면 '남명 조식 유적지'(사적305호) 입니다

좌측 비석은 선조임금이 보낸 제문이고, 우측 비석은 

'남명학의 요체'

'내명자경(內明 者敬) :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이고

외단자의(外斷者義) : 밖으러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다'

 

성성문(惺惺門)

남명 기념관 정문.

 

▲남명조식 유적.

사적 제305호입니다.

 

성성(성성惺惺)이란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불교용어입니다.

 

▲ 정갈한 남명 기념관,

우측은 사무실등 관리동입니.

 

▲ 남명 조식선생 상.

좌측은 신도비및 국역해석비이고

우측은 유명한 '단성현감사직소' 즉 '단성소' 비문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 신도비(神道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것으로

남명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신도비를 국역한 비입니다.

송시열은 '천길이나 되는 벼랑이 서 있는듯하여

해와 달과 빛을 다투는 듯한 기상은 지금까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을 자아내개한다'

고 추모했습니다.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난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단성현감 사직소(단성소, 을묘사직소)

조선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사직상소.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이를 사직하면서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데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실란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 '백성은 물이며, 그 물은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한다'...

 

명종은 대노하지만 어쩌지 못하고 명종실록에 사관은

조식의 말을 구구절절 옳다고 주석합니다.

 

'남명 선생이 선조대왕께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 사회변혁)' .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남명기념관으로 들어가 방명합니.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며

종종 내 의견도 말하며....

 

▲그 기념관에는 남명 일대기와 그 사상,

그의 문집, 친필, 제자들의 흔적등

유물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신명사도(神明舍圖).

본인이 직접 심성수양의 요체를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해서 도식화 했습니다.

 

 성곽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으로 경계를 굳은 성벽으로 표시합니다.

 

신체적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일이 있어도 막아야한다

이를 굳게 믿으며 생활하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남명학 학자들의 계보를

옛부터 현대까지 정리했습니다.

 

▲그는 외가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라다가

부친의 벼슬 임지따라 옮겨가면서

학문을 연마합니다.

▲ 19세에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숙부까지 처형되는 것을 보고

잘못된 정치폐단에 환멸을 느껴

 

30세에 김해 신어산 아래 처가에 '산혜정'을 짓고

학문정진과 제자 양성을 합니다.

▲ 48세에 고향 합천으로 돌아오고

거기에 뇌룡정, 계부당을 짓고

후진양성을 하던중 55세에 그 유명한 '단성소'를 올리지요.

 

▲61세에 천왕봉을 사랑하여

산청 시천으로 거쳐를 옮겨

학문을 연구, 제자 양성에 힘쓰다가 72세 거기서 별세를 합니다.

 

▲남명은 많은 문집,

학문적 업적을 남기지요.

 

척신 정치에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냈던 남명은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남명 선생이 허리에 항상 차고 다닌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인 성성자(惺惺子),

  쇠방울이 울릴 때마다 정신을 혼미하지 않게 일깨웠다고 하고

 

그는 학자이면서 작은 단검(短劍)을 지니고 다녔는데

그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아

자기의 경계를 삼았다고....

 

▲유학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맹자의 학문이지요

후대학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면서 여러 학문으로 갈라졌는데

그 중 하나가 성리학....

 

▲ 유교와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국가이념이었고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그 사상은

집배층에겐 더할 나위없는 좋은 사상이었겠지요.

 

▲그러나 성리학은 너무 이론을 강조하고

국론이 사분오열되어

현실개혁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 세도정치에 억눌린 이 땅의 민초등은

농민항쟁, 동학혁명등으로 수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오늘까지도 친일파가 득새하는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 이런 역사를 보면 선생의 경의 사상은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

 

▲남긴 저서가 많습니다.

 1604(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

'신명사도 神明舍圖' '파한잡기 破閑雜記'등이 있으며,

 

▲ 선생의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이 전합니.

 

▲깊이 성찰하여 답을 구하고

직접 실천에 옮기는 참 교육자입니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습니다.

 

▲ 혼미한 감동으로

기념관을 나서며..

강직했던 선생의 가르침과 역사앞에 숙여해 집니다.

 

▲여재실.

문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가묘(家廟)입니다.

 

▲남명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세 분의 기일과 설, 추석, 동지등

제향을 올립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 날...

묘소에 오릅니다.

 

▲ 기념관에서 300m정도를 오르면

뒷산 임좌원에 있는 선생의 묘소..

 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길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고.

 

▲비에 젖은 해설판...

숙연해 집니다.

 

▲위는 선생의 묘지이고

아래는 숙부인 은진송씨 묘입니다.

 

▲정경부인 묘는 김해에 있고

숙부인과 여기 누우셨으니

여러생각을 들게합니다

 

현재 남명 묘소 앞에 서 있는 묘비에는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의 묘갈문(墓碣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슬프다. ()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견줄 만한 이가 드물고,

 

또한 어진 이에 추배(追配)하여

후학들의 종사(宗師)로 삼을 만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비 오는 날 그 묘갈명을 일부 읽으니

더 처연해 집니다.

 

높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벼슬로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평생 많은 업적을 싸으신 훌륭한 유학자의 묘소...

 

▲비내리는 그 곳을 내려오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제 기념관, 묘소 건너편

산천재로 향합니다.

 

156161세 되던 해에

산청 덕산(山淸 德山)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머물며 학문 정진과 후학 지도에 힘썼던 곳.

 

 

題德山溪亭柱 (제덕산계정주: 덕산개울가 정자기둥에 쓴다)/| 曹植(조식)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

 

▲지리산을 사랑하여

58세에 이미 열번 이상을 오르고

61세되어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거기서 죽으셨으니....

 

▲산천재와 남명매...

매화나무는 선생이 심은 것이랍니다.

 

▲'남명 매' 를 소개하는 비

 

▲매화가 피는 계절에

꼭 와 봐야 겠습니다.(옮겨온 사진)

 

▲빗속의 산천재.

 

▲산천재, 깔끔한 방과

정갈한 마루.

 

▲산천은 주역 대축괘의 '경전하고 독실하게 수양해서

쌓아 밖으로 빛을 들어내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학자의 길이겠지요.

 

▲남명의 글씨체와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않는다는 시....

 

1571(선조 5)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습니다.

.

 

15721월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천재 옆 모습..

그 옆으로는 문집과 판각을 보관하던 건물이 있습니다.

 

▲맑은 날 산천재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옮겨온 사진)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그 곳....

 

▲담 너머로 너른

선비문화연구원이 자리합니다.

 

▲ 오랜만에 들어보는 낙숫물 소리...

마루에 앉아 한참을 남명 선생을 추모합니다.

 

▲ 목판 보관고의 해설판도 있고.

 

▲남명은 72세 되던 해, 음력 28일에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고...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고. 바로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습니다.

 

▲답사를 마치며 다시보는 선조임금이 보낸 제문비...

 

궂으비 내리던 날...돌아본 덕천서원, 기념관, 묘소, 산천재등

남명선생 유적지...

 

'천섬 들어가는 큰 종'같은 천왕봉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만 천왕봉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그 남명선생의 가슴으로 천왕봉을 그리워 하며

그 곳을 떠납니다.

 

기회되면 김해 신어산자락 '산혜정'도,

합천 삼가의 '뇌룡정'도 둘러볼 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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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德山溪亭柱 (제덕산계정주) | 曹植(조식)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