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향 충북, 최고의 자랑 속리산(俗離山/1,058.4m)!
이 산에 관련한 인물이 많다. 최치원, 공민왕, 이성계, 세조, 송시열 그리고
황진이에 관한 시를 써서 파직당한 임제林悌가 다녀갔다.
그 중 속리산이 길러낸 영웅호걸 임경업(林慶業, 1594~1646)장군을 보자.
조선 중기의 명장인 임경업은 속리산에서 무예를 익혔다. 어릴 적부터 무예가 특출했고,
손자병법, 사마법등 병서에도 능통했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 몰락한 후, 그는 속리산에 들어와 무예를 익혔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경업대’다.
그가 무예를 연마한 경업대는 속리산에서 가장 기이한 모양의 영웅바위다.
경업대위 능선에는 입석대가 기묘하게 서있는데, 임경업이 7년 수도 끝에 내공을 보여 주기 위해 누워
있던 바위를 세웠고, 내 어릴 적 거기를 지나가다 바위가 붙으면 어쩌나 했던 ‘금강석문’은 장군이
장검을 내리쳐 갈랐단다.
관음암 암자는 임경업이 토굴을 파고 살았다 하여 ‘임경업토굴’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 곳의
석간수는 그가 마신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불렸다.
임경업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해 이괄의 난 때 공로를 세워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난세에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들에게 뜨거운 신망을 받으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도 명성이 높았였다.
그러나 현실 속 영웅의 말로가 대부분 그러하듯 조선 3대 간신으로 꼽히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역모 죄로 몰려 가진 고문을 다 받다 옥사했는데 피투성이가 된 그의 마지막 말이 아리다.
“아! 나는 어찌하여 이 좁은 땅에서 태어나 초라하게 살다 가는가!
천하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죽어야 하다니!”
산 같이 우직했던 속리산이 키워낸 영웅의 말로는 허무했으나, 이해득실이 아닌 우국충정의
신의를 끝까지 지켜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 속에 변치 않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신라 때 부터로 유래한 이름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기도 하는 속리산(俗離山/1,058.4m)!
우리고향 청주와 법주사는 오늘의 발달된 도로로는 70K 남짓하지만
어린 시절 그 길은 그리 멀고 험했다.
비포장 말티재를 넘을 때는 버스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소풍 때 첫 번 오른 후, 중 고교와 젊은 시절 여러번 오랐던
그래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서린 곳....
그 곳을 다시 가려한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가고 또 가는 그 곳.....
▲아! 말티재...
그 시절 비포장 도로를 넘어오며
차에서 내려 버스를 밀었던 고개.
▲세조가 어연에서 내려 말을 갈아탔다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느니,
굽이진 길이 말 발굽을 닮아 이 이름이 붙었다는 등..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거긴엔 주차장도, 전망대도 있어
추억의 그 곳을 올랐답니다.
▲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
세조와 인연이 되어 장관이 된 나무.
'지나가는 길에/
오래 묵어 나이 많이 잡수신 느티나무를 만나거든/
무조건 그 나무를 향해 경배할 일이다'.
(안도현, '산이나 들판으로 소풍을 가면')
▲그 자태 좋던 나무도 세월의 흔적을 안고,
오래전 봤던 비석도 한 곁으로 밀려나 있었지요.
▲똑 같이 600년이 된 정이품송과, 4K 거리에 있는 '정부인 소나무'.
사람도 나무도 부인이 언제나 더 젊은가 봅니다.
▲국립공원 입구마다 발열 검사를 하고
손 소독제를 바르고.
▲이제부터 법주사까지 '오리숲'...
국민학교 6학년 때 소풍 왔던 이래 여러번 걸었지요.
▲문화재 관람료 4,000을 내고....
일주문은 여일하게 거기 있었습니다.
'호서제일가람'
▲오리숲이 끝나면 좌측으론 법주사,
서둘러 세심정까지의 '세조길( 3K )로 갑니다.
▲오늘은 냉천골로 올라 문장대-청법대-신선대-경업대-세심정으로
걸어 보려합니다.
▲식수원 저수지는
멋진 수변길이 생기고.
▲가을의 단풍 고운 시절엔
주차장- 세심정-복천암(왕복 7.5K)까지 멋진 나들이 길이 되지요.
▲세조가 참회하며 걸었다하지만
파렴치한 학살자의 이미지는 어쩔 수 없는 일.
▲계유정난후 그의 스승 '신미대사'가 복천암에 수행하고 있었는데
멀고 먼 길을 나서 참회하며 걸었다는 세조 길.
겨우 13년 재임을 위하여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어느 날 꿈 속에서 단종의 어머니자 형수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침을 뱉으며 꾸짖었는데 그 때부터 피부병이 생겨 고생을 했습니다.
▲목욕소.. 지금은 흔적없이 일반 계곡이 되었지만
세조가 '알탕'을 했다는 곳이니....
▲세심정 갈림길..
좌측으로 올라 우측으로 내려온 예정입니다.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곳..
이제부터 문장대까지(3.3K) 산행은 시작됩니다.
▲신미대사는 '정의공주'와 함께 한글창제의 주역이었지요
스님의 부친은 영의정을 지낸 김훈, 세종의 한글프로젝트는 극비리에
추진되었고 반포(1446년) 8년전에 이미 훈미정음 언해본을 완성했는데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신미대사입니다.
▲스승 신미대사를 만난 세조는 피부병의 고통과 심적 괴로움을 고했고
스승은 업보 때문이니 참회하며 살아라 조언을 했다지요.
▲복천암으로 오르는 길...
누구나 마음의 번민을 안고 오르겠지.
.
▲공민왕도 세조도 다녀갔다는 복천암..
남을 괴롭힌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교훈도 얻는 곳.
▲암자에서 300m 떨어진 산기슭에 신미대사의
부조탑도 있지만.... 갈 길이 멀어 스칩니다.
▲이제 본격적인 길로 갑니다.
신록의 색깔은 환상적이었지요.
▲그 시절 그리 힘들던 고개
그러나 세월은 강산도 변형시켰는지
작은 고개에 불과하고.
▲그 시절엔 이 고개를 오르면
이 이름이 딱 맞다고 그랬지요.
▲보현재 휴게소,
속리산은 여러 곳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술꾼들은 좋아라 하겠습니다.
▲국립공원안에 조금 이해 안가는 면도 있지만
젊은시절 추억의 장소였으니 반가웠지요.
▲미끄러지던 그 길들도
새로운 데크길로 바뀌었고.
▲좌측으로 '중사자암' 길이 참 좋은데
몰려오는 구름에 불안히 바쁘게 스쳐갑니다.
▲ 문장대 1K전, 막바지 힘든 길을 앞두고
냉천골 휴게소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두꺼비라 할까, 거북이라 할까?.
바위의 향연.
▲바위가 지천인 문장대 오르는 길.
▲그래도 젊은이들은
잘도 달려오릅니다.
▲아, 이제 끝이 보이고...
저 위를 오르면 휴게소 자리였던 너른 곳...
▲큰 휴게소가 있어 시장같았던
그 곳은 정갈하게 정화되었지요.
▲문장대 오르는 길...
비가 옵니다.
▲ 문장대는 저렇게 그대로 있었으니.
▲문장대(文藏臺.1054m)
바위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어서
항상 구름이 가득 서려있다하여.
▲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는데
세조(世祖)가 이 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했으니
▲ 오랜 추억이 서린 옛 정상석.
그리움 입니다.
▲우측으로는 칠형제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모진 겨울을 이긴 진달래
이제야 꽃을 피웠으니.
▲암봉들과 어울린 화려한 색은
두견화의 전설을 생각나게 합니다.
▲백악산을 비롯 저 너머로
문경의 희양산등등이 이어지겠지만.
▲비오는 날씨는 어쩔 수 없는 일.
▲ 가까이 관음봉이 보입니다.
좌측으로 북가치-묘봉-상학봉으로 이어지지요.
▲묘봉을 오를 때 시작되었던 윤흥리..
우측으로 문경의 낙영산, 도명산, 백악산....
▲서쪽으로 저 멀리 법주사와
출발지 주차장도 보입니다.
▲아래로는 정상석이 보이고
단풍의 계절엔 발디딜 틈이 없었지요.
▲ 사방으로 해설판이
아주 잘 되었단 생각.
▲ 우측으로부터는 문수봉-청법대-신선대-비로봉-
그리고 중앙 우뚝한 곳이 천왕봉이지요.
▲ 동쪽 아래로는 칠형제 바위
그 사이 계곡 길은 화북에서 오르던 길(3.4K)입니다.
▲기암고봉, 울창한 수림, 깊고 수려한 계곡...
폭포등 뛰어난 자연경관...
▲법주사를 비롯한 수 많은 문화유적은
1969년 국민광광지로, 1970년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장대는 철 계단 셋을 올라야 하는데
단풍계절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세조가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그리 참회를 했다면 죽기전 단종복위는
숙종때까지 300이나 흐르지 않았겠지요.
▲비를 맞으며 요기를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여기서 신선대는 1.1K, 천왕봉은 3.2K,
법주사는 5.6K, 좌측 화북주차장은 3.5K이지요.
▲신선대 방향으로 가다보면
문수봉도 만나고.
▲아쉬움으로 다녀온
문장대 방향도 건너다 보며.
▲여기를 올적마다 반기는 멋진 소나무
그 힘든 정상의 바람 속에 굿굿하게 자랐습니다.
▲이 길은 백두대간 길..
천왕봉에서 금북한남정맥으로 흐르다가
경기도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분기합니다.
▲중앙 높다란 곳에
신선대가 보이고.
▲청법대 허리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
비를 반가워 하겠지요.
▲바위를 깎아 계단을 냈습니다.
70년대는 이렇게 했지.
▲청법대를 지나며
놀라운 풍경을 경이롭게 봤지요.
▲아, 이제 구름까지 몰려와
청법대 풍경을 가리고 마음 급해집니다.
▲백두대간 길은
어디서나 조릿대가 반겨주지요.
▲계단 사이에 핀 별꽃...
아름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신선대 휴게소에 도착합니다.
매점도, 화장실도 있고.
▲휴게소 앞에 신선대 표지석.
▲신선이 노닐었다는 신선대는
저렇게 우뚝하게 서 있습니다.
▲거기서 하산해야 할 방향도 보고.
▲문장대 방향은 구름 속에 있고
건너 청법대 풍경도 아주 잠깐 열립니다.
▲경업대 삼거리...
천왕봉은 2.1K, ...경업대 400m는
여기서 우측으로 가파르게 내려갑니다.
▲ 단풍의 시절엔 만산홍엽의 절경 이었는데...
저 바위는 나를 기억할까?
▲경업대, 임경업 장군이
수련연마 했던 곳입니다.
▲ 그는 광해군때 급제하여 인조반정을 거쳐
이괄의 난, 병자호란등을 거친 명장입니다.
▲그가 7년 수련 끝에 세운 입석대(1,016m)
구름 속에 아주 잠깐 보여줍니다.
▲ 임경업은 병자호란 후 모함으로 52세에 죽었고
충주에 그 묘가 있습니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고
그 산을 오르는 인생은 마음 따라, 세월따라 다르게 다가옵니다.
▲신선대에서 빗길을 가파르게 내려오면
우측으로 관음암을 갑니다.
▲금강석문, 임경업이 장검으로 내려쳐
갈라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거기를 통과하면 조망이 좋았던 '관음암'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인지 굳게 닫혔고....
▲ 임경업 장군이 마셨던 석간수
그래서 '장군수'로 불립니다.
▲가을이면 혼미한 마음으로 걸었던 길..
비오는 길을 끝없이 내려갑니다.
▲같이 걷던 그 시절, 그 친구들...
어느 골에선가 나처럼 세월의 나이를 먹어 가겠지요.
▲그 시절이 그립고
옛 추억이 서럽게 밀려옵니다.
▲문 닫힌 '금강골휴게소'
세심정 까지는 1.5K, 이제 편안한 길입니다.
▲화강암, 그리고 변성퇴적암이
실감납니다.
▲어느서든 '살아낸다'는
강인함도 배웠지요.
▲선비들의 별서정원이 떠오르는
비로산장,
고 김태환 씨가 지은 개인 산장으로 53년 역사를 자랑합니다.
▲많은 시인 묵객, 정치가들도 다녀갔지요.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다.
▲지난 가을엔 커피와 쵸코렛을 대접하더니
이제는 작은 집을 지어 비에 젖은 길손을 행복하게 합니다.
▲환상적인 색... 여름을 지나
가을의 색깔을 상상해봅니다.
▲거기 있어 아름다운 꽃...
나는 비를 맞지만 너희들이 좋으니 나도 좋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려니....
▲13-14세기 수많은 암자 토굴에서 고승, 도인, 학자들이
밥 지어 먹던 절구....
▲이 절구를 통하여
한 그릇 밥을 얻었겠지요.
▲ 비오는 세심정....
그렇게 산행은 행복한 길 이었으니.
▲다시 법주사까지 세조길을 갑니다.
▲비 내리는 길
아름답기 그지없는그 길을 여유로이 걸었으니....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이상은 이던가 노래...
▲이익도 속리산을 그리워 했나 봅니다.
옥산이라 했으니.
▲속세를 떠나는 속리산 이름처럼
어느날 삶의 모든 시간을 로그아웃하고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렁이는 길...
▲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道不遠人 人遠道 山不離俗 俗離山’)
훗날 과거급제하고
황진이 추모시를 써서 파직당한 '임제林悌'의 글입니다.
▲법주사法住寺(사적 명승지 제4호)
553년(신라 진흥왕14년)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된....
▲법주사는 국보3점, 보물 13점, 유형문화재9점,무형문화재1,
천연기념물등을 보유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요.
▲그외의 역사의 무게를 짐작해 하는
수 많은 비들, 부조탑등이 있고.
▲어릴적 가봤던 추억이 몇 안되는 내겐
여기를 올 때마다 큰 설레임.....
▲3,000명 장국을 끓였던 철확(보물 1413호)
20톤의 무게와 2.7m의 지름....
▲ 어릴적 여기 어디선가 망원경에 동전을 넣고
문장대를 올려다 보기도 했지요.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날렵한 팔각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든
독득한 양식.
▲ 국민학교 6학년시절 흑백으로
찍은 사진이 있었지요.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고려중기의 건물로 추정합니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원통보전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1361호)이 있지요.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의 상징.. 신라 혜공왕때부터 있었으나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수때 몰수되고 1964년 시멘트로 조성되었다가
1990년 청동대불로, 2000년들어 금동 3mm두께, 금 80Kg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팔상전(국보제55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 5층탑.
벽면에 부처님의 일생 8장면을 그린 팔상도가 있어
이 이름이 붙었답니다.
▲ 희견보살상(제1417호)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보살.
▲석연지(국보제64호)
높이1.95m, 둘레 6.65m... 연꽃모양으로 조성되어 연지라 부릅니다.
▲법주사 석조(法住寺石槽/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신라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다니.....
▲당간지주....
내 고향 청주, 옛 청주극장 앞에도 이런 지주가 있었습니다.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216호)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추래암(墜來岩)
뒤 수정봉에서 굴러 떨어졌다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지요
우리 어린시절엔 저 위에 500년 되었다는 작은 소나무가 있었지만....
▲이제 법주사를 떠나려 합니다.
내 고향 동구밖과 뒷동산, 그리고 여기외엔
모든 추억이 살아져 버린 아득한 세월이 묻혀 그리운 곳....
▲ 궂은 비 내리는 날, 다시 오리숲을 걸으며
처연한 심정이었으니...
▲앗! 정이품송과 4K, 이 곳을 시간상 못 가 아쉬웠던 찰라
속리산IC를 오는 길 옆에 이 간판이 보였으니.....
▲ 서원리 소나무(천연기념물 352호)
'자웅동체'인 소나무가 부인송이 있다...재밌는 설정입니다.
▲충북산림환경연구소에서는 정이품송과 여기 정부인송을
인공수분을 시켜 1년후 씨앗을 받아 2004년부터 8년간 키워온
후계목 400여 그루를 키우고 있습니다.
▲ 정이품송과 정부인송,
600살 동갑내기입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사랑채엔 정이품송이,
4K떨어진 물좋고 경치좋은 양지 바른 안채엔 정부인송...
▲ 4K 떨어져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할아버지된 정이품송에 비하면 정부인송은
다시 시집가도 될듯....
▲ 오래오래 건강하게
그 멋진 자태를 이어가기를 응원합니다.
▲그렇게 여러 날 설렘 속에 가슴앓이 했던 내 고향 충북의 속리산, 법주사 길...
다시금 아픈 추억을 남기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왔으니....
영원히 거기 그렇게 있을 것입니다.
내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의 추억을 간직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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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道不遠人 人遠道 山不離俗 俗離山’)/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