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숙제(伯夷叔齊)
중고교 시절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다,
두 형제는 BC 1100년경 중국 은나라 말, 주나라 초엽에 살았던 선비였다.
그들은 은나라 제후 고죽군(孤竹君)이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이 나라를 숙제에게
물려주려고 했고 숙제는 그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사양하자 백이 역시도 받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나 문왕의 명성을 듣고 주(周)나라로 갔으나, 이미 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왕위에 올라 은(殷)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이에 백이와 숙제가 그 정벌의 적절치 못함을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주나라의 녹을 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가 되었고 그 이후 백이숙제는 지조를 지킨 청절지사(淸節之士)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임극으로 득극한 계유정난...
이에 반기를 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려 저항했고 그 가운데 사육신, 생육신등의 충신들이 있었다.
그 중 성삼문은 3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의를 지키다가 능지처참의 악독한 형벌로 세상을
떠난 의인이다. 그의 시조를 보자.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즉,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를 애달파한다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푸성귀라도 그것 또한 누구 땅에서 난거냐?
이 생육신중 한 분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이다. 그는 낙향하여 함안 군북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 충절을 기려 ‘서산서원’ 세워졌고, 충절의 상징 두 봉우리가 있다.
숙종이 어계 선생의 절의가 백이와 숙제에 못지않다고 한 데서 쌍안산과 쌍봉산으로 불리던
두 봉을 ‘백이산과 숙제봉’이라 바꿔 불렀다.
충절을 중시하는 시대가 아니지만 백이숙제, 성삼문, 그리고 조려선생을 기리며 그 봉을 걸어보려한다.
함안의 백이산~숙제봉, 그리고 그 언저리를...
▲찬란한 봄 날의 절정...
경남 함안 나들이에 나섭니다.
'말이산 고분군'...
▲함안 박물관...
말이산 고분군과 접한 곳, 너른 주차장..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휴관중입니다.
▲박물관 바로 뒤로 말이산 고분군과
이어지지요.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 末伊山 古墳群)은 도항리 고분과, 말산리 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을 2011년 7월 통합하여 사적 제515로 재지정 되었습니다.
▲ 한참 부분적으로 정리작업도 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노력중입니다.
▲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 대형 고분들과
봉토 흔적 100여기, 원형을 잃은 것까지 포함하면 2,000기로 추정되는데
최근 8호 고분 조사에서는 다섯명의 순장 인골이 출토되기도 하였지요.
▲함안 읍내, 특히 군청 뒤로도 오를 수 있습니다.
출토 유물은 토기 2,010점, 철기 2,479점, 장신구 3,381점,
기타 91점 등 총 7,961점의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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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산은 '머리산'의 소리움으로 우두머리의 산
즉, 왕과 왕족의 무덤이 있는 산이란 뜻이랍니다.
▲일제 강점기와 특히 진주-마산간 도로, 철도등으로
훼손되고 축소 되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에는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 앞트기깃돌발무덤 등
기원 전후부터 6세기 전반에 이르는 다양한 무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문득, 무덤 유장품으로 고고학을 이어온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이야기는
훗날 어떻게 해석할까? 화장문화가 발달한 이즈음에....
▲ 오늘날의 디지털화된 자료들이
수백, 수천년 후에도 기념 비문처럼 남아 전 하겠지요.
▲유홍준 이던가? 고분군의 아름다움은 캄캄한 보름날 밤,
달과 함께 보는것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오기는 조금 무섭겠지만...
▲박물관을 나서면 작은 고인돌 공원이 있지요.
화순, 고창이었지요? 그 어머어마한 고인돌 공원...
▲ 고인돌 축조 작업도 설명되어 있고.
▲무덤 형식과
고인돌 문화등의 해석이 재미 있었지요.
▲선사-청동기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한반도 전역에 2,000여기 분포한 고인돌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옆에는 아라홍련, 700년전의 씨앗이 발견되어
그 씨를 심은 시배지도 있어 연꽃의 계절이면 퍽 아름답겠습니다.
▲함안을 떠나 20여K, 신축된 군북역에 도착합니다.
철길 교량이래 시원한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 주차장에서 50여m을 가면
등산로가 나오지요.
▲각종 산행 정보판, 안내지도,
등산화 먼지를 터는 컴프레셔도 설치 되었지요.
▲두 봉우리 6부능선에 산허리를 도는 둘레길,
8자 모양으로 돌면 큰 어려움 없이 누구나 걸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산꾼들은 둘레길을 마다하고 능선을 올라 넘고
넘는 코스의 길을 가면 됩니다.
▲싱그럽다는 말 외에는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을까?
그리운 '노랑섞인 연두' 위에 햇살이 쏟아집니다.
▲오늘 산행 내내 솔향이 그윽하고.
이제 여기서 부터 800m는 지리 반야봉을 오르던 생각이 나도록
가파르지요.
▲백이산(伯夷山369m)
주(周)나라 시절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알려진 형제...,
그리고 계유정난 시절의 생육신중 한 분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
▲그를 기려 백이산-숙제봉이 생겼다지요.
거기서 바라보는 함안 읍내.
우측으로 청룡산, 천주산, 그리고 무학산, 여항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남쪽으로는 오봉산..
여기서 5.4K로 이어집니다
▲서쪽으로는 괘방산- 방어산이 아름답고 중앙 오목한 곳에
'마애사'도 보이고
우측으로 멀리 남강 건너 의령의 남산, 자굴산...
▲아름다운 조망과 시원한 바람을 뒤로하고
숙제봉으로 향합니다.
▲각시붓꽃의 전설이 있지요
신라 화랑 관창의 약혼녀가 전사 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청보랏빛 각시로 피어났다는...
그래서 꽃말은 '수줍음'이랍니다.
▲가파르게 내려서면 밥먹기 좋은 8자 둘레길의 가운데 부분을
만납니다.
▲여기서 시계방향의 숙제봉 둘레길은 2.2K...
등산로는 가운데 가파른 길의 400m를 오르면 됩니다.
▲어느 이름이든 색깔은 하나
제 첫 사랑, 선생님이 입었던 노랑섞인 연두입니다.
▲그렇게 오르면 '숙제봉(叔齊峰 356m)'
낙향하여 계곡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낸
그래서 호가 ‘어계(漁溪)' 이셨던 조려(趙旅)’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이름입니다.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가
좌측 길로 공룡발자국 답사를 하려합니다.
▲수량이 풍부하고 정갈했던
약수터.... 속까지 시원했지요.
▲설렘으로 찾은 공룡발자국 발자국(경남도 문화재자료 545호)
1호, 2호, 3호를 기억하고 찾아야합니다.
우측 계단 위에서 보면 제2호 발자국입니다.
▲공룡발자국은 2004년 10월 20일
여기 아래 평광마을에 거주하는 이영부, 마금자 부부가 발견했는데
▲2009년 3월에는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추가로 발견,
화석 70여개를 발견해 지금의 명관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완성됐지요.
▲지질시대를 구분하며 우리는 '중생대'를 흔히 말합니다
2억5천만년전부터 6천5백만년전까지 이지요.
▲그 중생대를 다시 쥬라기, 백악기등으로 나뉘는데
그 시절 각종 공룡등과 시조새등 대형 동물들의 천지였고
그 한 종류가 여기에 자취를 남겼으니.
▲ 1억4천만년전 그 신비로움을
여기서 만나는 겁니다.
▲60m여를 내려와 좌측으로 가면
제3 발자국을 만나 거기서 누워봤지요
공룡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듯....
▲발견자 부부는 그 후 여기서 살다싶이
수십 기 탑들을 조성하고, 청소하고 관리 한답니다.
▲그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이 부러웠으니....
▲1호 발자국은 저렇게 올라야 하고
여승과 부부인듯한 두 분의 낭낭한 기도가 신비롭게 다가왔지요.
▲두 부부뿐 아니라 평광마을, 그리고 군북 사람들의
정성과 긍지와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갈 수는 없고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지요.
▲볕이 뜨거운 계절이 오면 여기서 다시 올라가
백이산 둘레길로 하산하면 되겠습니다.
▲제1호 발자국 ..
거칠고 비스듬한 너른 바위에 그렇게 자취를 남겼습니다.
▲거기 햇살이 좋아 누웠다가
아쉽게 철계단을 다시 내려오고.
▲되돌아 보며 1억년 백악기의 꿈속을 다녀온
신비스런 경험이었지요.
▲이제 평안한 길로
평광마을로 향합니다.
▲거기 아늑한 서재골 못...
여기저기 강태공들이 한가롭고
새 소리 벌레 소리만이 은은했던 그 곳.
▲좌측이 백이산. 우측 너머로 숙제봉입니다.
바람 시원한 거기서 민들레 줄기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추억으로 불어 봤지요.
▲그 마을에 이영부 마금자 부부가 살고 계셨습니다
최초로 발자국을 발견하고 관리하신 분...
▲ 애국지사 이태준 선생 생가도 다녀오고 싶지만
걸어 거기를 갈 수는 없고....
▲인천 이씨 재실인 '도천재'를 만났습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한 '이휴복'에게 내린 임금의 교서
'단서죽백'을 보관했던 곳....
▲그러나 문은 굳게 덛혀
아쉼이 컸지요.
▲난리를 평정하고 공신으로 임명된 문서
'단서죽백'에 대한 후손들의 긍지가 대단합니다.
▲백이-숙제봉을 뒤로하고
동그랗게 산으로 둘러쌓인 아늑한 평광마을회관
이 마을 출신들의 모든 삶을 응원합니다.
▲우견정공원이나, 도천서원은 반대방향이고
우측으로 마석바위를 지나 100m 걸으면 '평광 숲'.
거기에 새겨진 고향을 그리는 이의 싯귀가 아립니다.
▲'양촐 숲'이라고도 불리는 이 숲은 1504년 조성하여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훼손되어 현재 고목 50여 그루만 남았습니다.
▲문득 우리 고향 동구밖의 고목들이 그립고
그 아래서 놀던 추억을 그리워 했지요.
▲ 군북역을 향해 뜨거운 도로를 따라 걸어오면 만나는
명관리 고인돌...
30여평이면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지 못하고 논 한가운데 ....
▲지금이야 억지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벼농사 계절엔 들어 갈 수도 없겠단 진한 아쉬움.
▲ 산행을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군북역를 출발 5K..
'마애사' 입구를 지나 '서산서원'을 찾았읍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의 주인공이자 생육신 조려 선생.
임금이 현판을 내리는 것을 '사액(賜額)이라하고
그런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지요.
▲그러니까 사액서원은 국가가 공인한
그런 서원이란 대접을 받았습니다.
▲ 백이숙제(伯夷叔齊) 가 기거했던 수양산,
그 절개의 의미로 서산이라 하여
서산서원이 되었지요.
▲300여년의 세월이 그렇게 오래 흐른 후, 숙종임금은 단종을 복위했고
사육신, 생육신등도 회복하고 서원, 사당들에 사액 내렸는데
어계 조려선생도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서원에는 사액을 내렸지요.
▲이 글씨가 숙종의 글씨인가?
사액을 내렸다는 설명은 있는데 이 글씨인가는 모를 일입니다.
▲조려선생은 말을 몰아 여기서 영월 청령포로 달려가기도 했는데
영월에는 어계비원이 남아있습니다
▲1452년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간 후 3년후에 사약을 받은 단종....17년의 짧은 생애였지요.
▲ 주변에 함안 조씨들의 다양한 기념
조형물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의 모든 후손 분들도
조려 선생의 정신을 이어 가겠지요 오늘까지도.
▲서산서원에서 500m쯤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잘 조성된 주차장이 있고 어계생가가 있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는 백이산- 숙제봉이 낙타 등모양 그리 다가옵니다.
▲ 충신 이조참판 조려의 생가
소슬대문.... 아쉽게 여기도 문이 닫혀 있고.
▲어계고택(경남유형문화제 158호)
대문채와 원북재, 그리고 사당으로 이뤄졌습니다.
▲거기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충절을 기리는듯 합니다.
▲거기서 다시 나와 서산서원 건너편으로 가니
거기에 '채미정'이 있었습니다.
▲약간 높은 언덕에는 누각과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고.
▲어계 선생에 대한 추모정성이 서원만으로는 부족하여
1735년 세웠답니다.
▲'채미정',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꺾어 먹던 백이숙제의
그 정신을 이은 조려선생을 기리는 의미겠지요.
▲백세(百世)여기서 100세는
100살이 아니고 100세대이니
한 세대를 30년으로보면 3000년이고 ...
▲그러므로 3천년뿐 아니라 영원히.. '청풍(淸風)'
군자의 덕과 절개를 다짐하는 의미겠지요.
▲ 그 정원의 나무 둥치처럼
묵묵히.... 쉽게 옷을 갈아입는 오늘의 세태에 대한 경고이려니....
▲퍽 아름다운 그 곳에서
다시금 삶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의 답사 길을 마감하려합니다.
백이숙제, 성삼문, 그리고 어계 조려선생...
▲백세청풍(百世淸風)바위.
백세는 100살이 아니라 100세대를 뜻하며, 한 세대를 30년으로 친다면
, 3000년..... 청풍의 청(淸)은 ‘매섭도록 높고 맑음’을,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
결국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매운 선비의 절개’이려니....
▲그렇게 역사 답사의 재미와 의를 만킥한 하루....
찬란한 봄은 바람으로 흘러가려니...
계절의 갈피에서 꽃이피고 꽃비가 내리듯
인생의 갈피에서도 후회와 연민, 반성과 목련같은 행복은 이어지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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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