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아! 지리산

지리산 의신옛길(신흥마을-의자바위-의신마을/ 4.2K)

산꾼 미시령 2017. 7. 23. 20:59

 고(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신라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6두품 집안 출신으로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런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사라진 불행한 사람이다.

 

 12세에 당으로 건너 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18세 장원 합격한다

 

 그는 고국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거기서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친다

지금도 중국 양조우에 그의 기념관이 있을 정도다.

 

 황제에게까지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17년 만에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29세에 귀국 하였고. 신라의 헌강왕은 그를 아껴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밀린다.

급속히 무너져 내리던 신라는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았다.

 

 

 그래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로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 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마산 월영대, 함양 상림숲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리의 골짜기에는 고운과 관련된 유물·유적이 많다. 쌍계사 들머리 바위에다 새긴

쌍계(雙溪) 석문(石門) 넉 자가 최치원의 솜씨라 하고, 경내에 있는 진감선사대공영탑비

비문도 최치원이 지었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도 최치원이 학을 불려서 타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서린 환학대도 있다.

 

 그는 귀를 씻었다 세이암’, 씻을 세() 귀 이() 바위 암()..

여기서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뜻으로 귀를 씻고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란 나무가 푸조나무이다 그는 말했다

 

이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거고, 살아있으면 나도 살아있는거다

 

 푸조나무는 여태 죽지 않고 살아서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지리산 골짜기 어디에 살아 있으리....

 

그 골을 간다.

고운이 걷고, 서산대사가 걷던 그 길을......

 

범왕리 푸조나무

  최치원이 신흥사에 머물 때 꽂아 둔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고 하며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자신도 살았고 이 나무가 죽으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 스토리텔링에 과학적인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무는 500년 되었고

고운 선생은 857년 태어났으니 1000살도 더 잡수셨습니다.

 

 

▲ 나무를 볼 때마다 고운 선생의 가르침과

사상을 배워가면 그게 더 소중한 것이겠지요.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입구에 있습니다.

 

 

▲ 일행은 벌써 출발했지만

다시 세이암을 동네 영감님에게 물어

물가로 내려 가 봅니다.

 

 

세이암’, 씻을 세(), 귀 이(), 바위 암()..

여기서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뜻으로 귀를 씻고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답니다.

 

 

▲ 오늘은 '우리들 산악회'의 날...

여러 일일회원들도 같이 동행했습니다.

 

 

 

▲ 옛 길, 서산 대사길...

신흥사가 있어 신흥마을이되고, 의신사가 있어 의신마을이 된 두 마을 길은 4.2K.

 

지금의 자동차 길이 있기전 시장가는 이도, 학교가는 아이도,

시집오던 길도, 빨치산과 군경이 오갔던 길도 이 길입니다.

 

 

▲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우회전하여

쌍계벚꽃 십리길의 화개천을 따라 쌍계사에 이르고

다시 5.3K를 구비구비 길게 들어 왔습니다.

 

 

사람들이 걷기에 포근한 길이지만

이 길은 숱한 애환이 서려있으리...

 

 옛날 화개장의 봇짐장수가 의신마을을 지나

 벽소령을 넘어가며 흘렸던 땀방울..

 숯을 구워 화개장으로 팔러가던 아버지의 팍팍했던 삶도 담겨 있겠습니다.

 

 

홍살문처럼 아름답게 세워 놓은 표지문

마치 의신동천으로 들어서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덤 하나,

 무덤 주위엔 녹차나무로 산담(울타리)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역시 이 곳이 야생차로 유명한 하동인것이 실감납니다.

 짐승들의 침입도 막고 찻잎도 따고....

 

 

 

발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

 서산대사와 고운 선생도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모든 번민을

모두 흘러가는 계곡물에다 버리고

 저 청정한 물소리만 바랑 가득 지고 다녔겠지요.

 

 

▲ 내용보다도 순박한 농부의 얼굴이

평화롭습니다.

 

 

의신옛길은 신흥에 있는 화개초등학교왕성분교 옆에서 시작되어

선유동계곡, 단천골, 대성골 등의 물이 모이는

 대성계곡을 오른편에 두고

 의신마을까지 이어집니다.

 

 

서선대사가 의신마을 뒷산에 있는 원통암에서 출가하였으니,

 서산대사도 이 길을 걸어 원통암으로 갔을 것입니다.

 

 

수치적 거리는 짧으나 발걸음을 잡는 여러 소리와 빛깔이 있으니

 천천히 걷습니다.

 

걷다 멈춰 물빛도 보고, 건너편 숲도 바라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그러다보면 내 안의 소리도 들리겠지요

 

 

딱 한 사람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의자바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쳐가려 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범종을 의자로 바꾸자

이를 본 왜병들이 혼비백산 도망을 갔다는 전설이...

 

 

▲속세의 자본주의에 때가 낀 필자는

이 의자바위를 살까? 오가는 이들에게 500원씩 받는거야

 

여인이 앉으면 아들을 낳고, 남정네가 앉으면 정력이 좋아진다 하는거야

혹 여성분 혼자 왔다면, 여성분이 앉았다 집에 가면 남편에게 까지 그 능력이

이어진다 할까?

 

 

길은 계곡에 바짝 붙었다가 높지 않은 산비탈로 오르기를 반복합니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계류는 억겁의 세월 동안

깔끔하게 다듬어진 바위들과

행복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혼탁해진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으나

빨간바지 여인에게 맘이 흔들렸나? 사진이 흐릿합니다.

 

 

 

▲ 입구에서 가 보자고 하고 싶던

"가락국" 의 시조 "김수로왕" 7왕자가  득도를 했다는 "칠불사"

 

 일곱아들을 보기위해 천리 길을 왔지만 '연지'못에 뜬 그림자만 보고

돌아섰다는 왕비의 마음을 느끼고 싶었습나다. 

 

 

"칠불사" 의 또 다른 명물 "아자방(亞字房)도.

그러나 들려보지를 못해 아쉽습니다.

 

 

▲정겨운 농가 한 채

 예전 이 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은 이 길을 오가는 주민들과

소금장수 등 길손들의 휴식처 역할을 했겠지요

 

 묵어버린 밭이며 밭가에 쌓아놓은 돌담이 정겹습니다.

 

 

의신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란을 피해 이주 해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란에 휩싸일 때마다 그 소용돌이에 말려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겠지요.

 

 

▲아! 지리의 주능선이 아련하게 바라보이고,

 그 아래로 여러 골짜기의 물줄기를 모아 흘러갑니다.

갑자기 사무치는 진한 그리움...

 

 

화개천 주변에는 사찰이 많아

 예로부터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지금까지도 큰 사찰로 남아 있는 쌍계사와 칠불사,.

 

 

▲ 그리고  신흥마을 왕성분교장 자리에 신흥사가 있었고,

의신마을에도 의신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 가장 있어야 할 자리에 시원한 약수터가 자리하여

목도, 마음도 생기를 얻습니다.

 

 

의신마을은 덕평봉과 벽소령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출발점이고,

좌측으로는 대성동을 거쳐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초입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승장인 서산대사는 1540년 의신마을의 원통암으로

출가해 '휴정'이라는 법명을 얻었습니다.

 

 

숲길을 걷다보면  맑은 물소리와 매미소리가 화음을 맞춥니다.

 숲을 이룬 나무들은 짙은 녹음을 이루며

 청량한 기운을 뿜어내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눈이 부십니다.

그 속에 억척스런 '자연'을 봅니다.

 

 

 

▲ 우측으로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들이 내는 물소리와 함께

 우거진 "서산대사 옛 길" 은 적당한 오르내림이 있는 코스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정말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입니다.

 

 

물소리, 새소리, 요란한 매미소리...

아름다운 여인도 가고, 바람도 갑니다 이 길을...

 

 

어느새 의신마을이 건너다 보입니다.

 더 이상 소박하고 가난해 보였던 산골마을이 아니라

 도시근교의 전원마을 같습니다.

 

 

단천골과 남부능선도 ...

지리는 그리움으로 그렇게 이어지고

 

 

4.2에 이르는 지리산옛길-서산대사길이

 끝나는 지점에

지리산 반달곰생태학습장 베어빌리지가 있습니다.

 

 

. 반달가슴곰생태학습장은 건물동과 방사장,

사육실, 교육실 등으로 이뤄져 있고...

 

 

▲ 4개국어의 안내판,,,

그 정성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좀 간결했으면 합니다.

 

 

▲ 아! 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12월에 맞는

지리...

 

 

 

▲ 마을로 건너가는 마지막 출렁다리...

 

 

의신마을 위쪽 골짜기를 '빗점골'이라 합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3918

 빗점골에서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의신마을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길에는

한국전쟁 무렵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개설한 옛 작전도로가 나 있습니다.

 

 

▲ 옛 역사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다 품고 있는

하동...

지금은 '꽃길 따라 물길 따라'가 모토입니다.

 

 

▲ 이 마을에서 좌측 빗점골을 따라 벽소령까지는 6.8K

우측 대성골 따라 세석까지는 9.2K입니다.

이번 추석무렵 그렇게 걸어 볼 것입니다.

 

 

우리는 베어빌리지 앞 계곡으로 내려섭니다.

 계곡에서는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어느새  회까지 준비한 헌신적인 박기봉 총무님, 박정수 전 대장님.

아침마다 밴드에서

이 분들과 나누는 정담이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  천국이 따로 없네.”

시원한 물소리 속에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회 한점.

오늘따라 '장수'의 님들도 더 즐겁습니다.

 

 

▲ 필자도 소리쳤습니다.

'다음 주부터 힘들여 산가지 말자 여기가 이리 좋으니'..

 

 

계곡 물에 발을 담그니 시원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물가 너럭바위에 누워 망중한을 즐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 바글거리는 인파....

다리 위 세 사람은 '오솔길'엎저버 12명중 일부입니다.

 

 

▲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좌측 빗점골, 

빨치산들이 최후를 맞은 우측 대성골....

그 아픔의 세월은 가고 이렇게 행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 아! 필자도 5년만 젊었어도

저 가운데 앉아 보자고 하는건데...

차마 그 소린 못합니다 양심이 있어...

 

하여간 최고 부럽습니다. 눈은 뜨이소!

 

 

 

▲ 그래도 행복한 시간...

 

 

▲ 그리운 벽소령, 그리고 세석의 향기가 배인 물...

 

 

▲ 언제 이런 호강을 누렸던가?

행복한 시절, 감사한 날입니다.

 

 

▲ 뜨거운 파전에 시원한 맥주도 마시고

달고 시원한 수박도 먹었으니....

즐거움은 배가 되고..

 

 

▲ 역사관 가는 길목의 예쁜 카페..

현수막 글에 정성이 보입니다.

 

 

▲ 홀로 계곡을 벗어나 역사관을 찾습니다.

 

 

▲ 단천골 좌측, 빗점골, 우측 대성골...

빨치산과 군경의 아픈 현장입니다.

 

 

▲ 언제 그 아픔의 현장도 걸어보겠지요.

 

 

▲  "의신마을" 의 상류 "빗점골" "한국전쟁"

 "빨치산" 총수 "이현상" 이 사살된 곳이고,

.

 

 

▲ 그 이전 골골에 화전민의 생활상도 소개합니다.

 

 

▲ 한 때 30여만명이 있었다는 화전민...

억척스럽게 살았겠지요.

 

 

▲ 북쪽이 버리고 남쪽이 외면한 빨치산....

이념이 무언지도 모른 이들도 역사의 소용돌이에 밀려

그 모진 고생들을 했겠지요..

 

 

▲ 이현상,그밖 여러지도자들의 최후가

상세하게 소개되어 한참을 읽어봅니다.

 

 

▲ '정순덕'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아낙네가

밀려간 남편으로 인하여 빨치산 아내로 모진 능욕을 당하고

죽어도 남편곁에서 죽자 그리 지리산에 스며들고...

 

 

▲ 그는 모든 소탕완료가 선언된 후에도 살아남아

 6년후, 1963년 생포되어 모질고 끓질긴 삶을 살았습니다.

 

 

▲ 전시관은 작고 내용도

뱀사골입구 전시관에 비하면 초라합니다.

 

 

▲ 이념이 무엇인지. 조국이 무엇인지...

쫓던 자, 쫓기던 자... 다 우리 형제들 이었거늘....

그 아픈 생활에 묵념을 올렸습니다.

 

 

▲ 작은 역사관 건물,,,

철원의 옛 공산당 당사 비슷한 모습이라

좀 그러했습니다. 요즘 건축물로 좀 바꿨으면 합니다.

 

 

"의신마을"

 "()" 이 머물고 갔다고 할정도로 풍광이 수려하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그렇게 40여 가구가 살아갑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세석과 벽소령의 깊은 품 속에서...

 

 

▲그렇게 정겨운 님들과  함께 걸어 본 "지리산" 자락의

 "서산대사 옛 길"

 물소리 새소리를 들어가면서 명상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최상의 "힐링" 장소 ...

나를 돌아보는 길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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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서산대사

 

눈 덮인 들을 걸어갈 때/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不須胡亂行부수호란행)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