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후반,
나는 서울의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학원가는 매일 데모였다. 주된 구호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였고 학교는 휴업, 휴강의 연속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시해사건이 났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가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다음 해, 80년 3월, 어렵게 개학을 했으나 역시 날마다 여기저기서 시위의 연속이었다. 주된 구호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화를 앞당겨라’등 이었다,
그 시위의 절정은 5월 15일 이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시간이 되자 동서남북에서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중앙대,
숙대, 서울대는 남쪽에서, 연대, 이대,서강대는 서쪽에서 건대, 한양대,동국대, 단국대는 동쪽에서, 고대,
한성대, 서울여대, 국민대등은 북에서 모여들었다.
우리는 서소문 새문안 교회 앞에 모여 스크럼을 짠 다음 구호를 외치며 덕수궁- 시청-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갔다. 그 시위는 역사에 기록 될 최고의 인원이었다, 서울역- 남대문- 시청앞까지 인산 인해였고
시위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광화문 앞에서 군경 최류탄에 막혔다
그렇게 9시 넘어 최류탄을 맞으며 강제 해산되었다.
다음날 5월 16일은 5.16 장례식이 있었고 17일은 시위없이 조용한 하루였다.
정부에서 침묵을 하고 있는게 이상했다. 그런데 그 17일 밤 12시, 학교 기숙사로 착검한 총을 든 계엄군이
들이 닥쳤다. 수많은 친구들이 잡혀가고 우린 구타를 당했고,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공포의 긴 밤 이었다.
다음 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국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다, 국회는 해산하고 유명 정치인의
정치금지, 구속등이 이어졌다. 전국은 조용했고 훗날 안 사실은 그 날 광주에서 비극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 휴교령은 2학기까지 이어졌고 요즘처럼 온라인 강의가 없던 그 시절은 독서 과제와 레포트로 수업도,
성적도 대체되어 학사는 운영되었다.
9월, 반성문을 쓴 대학부터 학교 문을 열었다. 우리학교는 가장 늦게 개강했다,
교회 청년들과 한글날 관악산에 놀러가기로 했던 전 날이었다. 강당에 200여명이 유명 교수의 특강을
들으려 앉아 있었다 갑자기 몇몇 선배들이 지난 5월 광주사건에서 죽은 후배 추도식을 한다고 했다.
추도식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교정으로 경찰버스가 들이닥쳤고,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게
출입문이 폐쇄되어 200여명 전원은 백골단의 곤봉 구타 속에 서울 북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열흘 동안 모진 구타와 공포가 이어졌다. A급 5명은 구속되고 B, C급은 ‘삼청교육대’로 편성 되었다.
D급은 여러 절차를 거쳐 훈방된다고 했다. 학도호국단 문화부장이었던 나는 B급으로 삼청교육대가
예정되었고 그 날부터 온갖 구타등이 두려운게 아니라 삼청교육대가 두려웠다.
모두들 전해 들었던 삼청교육대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구석에서 하느님, 부처님...
믿는 신을 부르며 줄줄 울었다. 어느 배짱 좋은 선배들은 몸만 튼튼하면 안 죽는다.
틈 나는대로 엎드려 뻐쳐후 팔 굽혀펴기등 운동을 시켰다.
줄줄 우는 나약한 친구 옆으로 가면 나도 죽을 것 같고, 큰 소리 뻥 잘 치는 후배 옆으로 가면
희망이 있을 것도 같았다. 두려웠다.
그런 두렴의 어느 날 강당으로 모이라 했다. 한 대머리 강사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월남 폐망하던 아침,
탈출하지 못하고 잡혔던 외교관이라 했다. 그 고생한 체험담을 강의했다. 얼마나 공산화가 모질고
두려운 건가가 주 강연 내용이었다. 우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청교육대가 두려울 뿐이었다.
그날 밤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삼청교육대 부대와 소속까지 편성되었던 우리에게 방침이 바뀌어
오늘밤 낮의 강사가 쓴 ‘월남 팽망 전후 이야기’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전방부대 2박 후 석방 된단다
그 책을 장별로 쪼갰다, 대표 몇 명이 나눠 읽고 발제를 했다 나도 한 챕터를 맡았다
책 내용을 파악한 우리는 신념을 버리고 그 책 내용을 크게 감동한 듯한 내용으로 독후감을 썼다.
결론은 크게 반성했으며 이제부터 데모도 안하고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도 했다.
다음 날 경찰서 마당에 집결한 군용 트럭 뒷 칸에 열 명씩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삼청교육대로
가는 건가? 두려웠다 트럭은 뿔뿔히 흩어졌다.
우리트럭은 어느 깊은 골짜기 작은 부대에 내렸다 구타와 기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속하게 군복으로
갈아 입혀졌다. 몰골이 삼청교육대 입소자들과 비슷했다.
‘우린 죽었다 삼청교육대인가 보다’. 두려웠다. 나중에 안 사실은 전방 체험이었다. 밤중에 휴전선
철책 아래 초소에 한 명씩 배치 되었다. 같은 초소의 현역병들이 우리를 위로했다.
강 건너 깜빡이는 저기가 북한 땅이라 했다. 낮에 기압 때 안경이 부러져 안경 한 알을 들고 현미경 보듯
그 건너를 봤다. 그렇게 3일간 철책 근무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 내려졌다. 꿈에도 그리던 석방인 것이다. 그 열흘 남짓한 기간은
생애 제일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기간이었다. 그 후 신념이 어떻든 노동운동,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등을
하다가 구속되고 복역 후 석방되어 다시 그 길을 가는 이들을 보면 존경스러웠다
당시 구속이라는 것은 오늘과는 딴판 이었다. 무조건 구타와 고문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다시 그 길을
가는 이들, 그 신념이야 동의하든 않든 참 존경스러웠다.
오늘도 지리산을 간다. 많이는 아니어도 서너번의 지리종주등 법정 탐방로는 거의 다 걸어봤다,
어느 골 하나 가슴 아픈 역사가 없는 골이 없지만 특히 세석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발원한 자빠진 골, 연하-촛대봉에서 발원한 도장골, 의신에서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빗점골, 의신에서
세석으로 이어지는 대성골을 지날 때면 더욱 숙연해진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쫓는 자와 쫒기던 이들이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간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다 그렇게 ‘내 몰렸다’ 죄라면 그 시절에 태어난 것, 이리저리 힘든 세월 살다보니 쫓는 자도 되고,
쫓기는 자가 되어 어머니 품같은 지리에서 ‘여옥이’가 되고 ‘최대치’가 된 이들이 수만 명이다,
가슴이 아프다. 남북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제대로 해석도, 평가도, 추모도 없이 금지어가 되어 그 위에
역사가 수 십년 흘렀다.
올 해도 여름이 되었고 그 거림을 다시 간다.
역사의 그 현장을 넘어 세석으로 한신 계곡을 거쳐 백무동으로 넘으려 한다. 다시는 이 한 반도에
이런 비극이 없기를 기도하며 산꾼은 처연히 오늘도 걷는다.
▲아! 지리(智異)
숱한 전설과 우리 역사의 피와 눈물을 함께 해 온 그 곳.
▲거림(巨林), 큰 숲이 있다는 의미일까?
산 새도, 등산객도 조용한 '거림계곡'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2년만에 다시 찾은 거림은
세석으로 가는 최단, 그리고 가장 쉬운 골.
▲'도장골' 1951-1953사이 공비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곳,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여옥이'로 표현된 역사의 아픈 여인의 삶도
이 골짜기에서 이어졌다.
▲이 '거림계곡'은 세석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발원한
'자빠진골'과 연하봉, 촛대봉에서 발원한 '도장골'이
서로만나 이뤄진 계곡.
▲그 입구엔 '천황사'란 큰 사찰이 있고,
탐방지원센터 옆에는 '길상암'이란 절도 있다.
▲반가운 멋진 소나무, 세석에서 여기로 올 때면
거림마을에 다 왔다는 이정표 같은.
▲분수없는 사람들이
산에서도, 동네 산책 길에도
왕왕 거리기도 하지.
▲여기 거림골은 아픔의 현장.
기록들을 보면 한국전쟁 함박 눈이 펑펑 내리던 시절.
▲토벌대에 쫓기던 빨치산들이 날이 저물면서
도장골, 거림골, 벽소령 아래 빗점골등지에서
이 넘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토벌대의
포탄들은 하얀 눈위에 피와 불마다를 만들고
하룻밤 사이에 일만여명의 젊은 목숨들이 처참하게 쓰러졌다.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시절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지리산에 몸을 숨겨 불안했던 그 삶
▲꽃다운 젊디젊은 청춘들을 묻었으니...
언제나 숙연히 명복을 빕니다.
▲어느시절 비탐지역인 거림마을-길상암-그리고 도장골..
이영희부대가 악양보급투쟁으로 유명한 비탐지역을 돌아
청학 연못을 가봐야 하는데....
▲무더운 날, 위로받고 싶은 날..
애써 마음을 가다듦고
길을 간다.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
깊은 계곡만큼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고.
▲세석을 다시 간다는
설렘은 발걸음을 더 빠르게 이어갔지.
▲어느덧 '북해도교'.
생각보다 빨리 만나는건, 세석에서 내려올 땐
이 다리를 만나면 길이 편안해졌다 생각했었지.
▲여기부터 아득한 오름,
한신계곡 오른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늘 거림 코스의 최고의 가파른 길.
▲시끄럽던 대화도 조용해 지고
깊은 황소 숨소리 같은 힘듦이 이어졌지.
▲백세시대, 요즘 60대는 청춘이라 말들 하지만
한 여름에도 가을을 준비하듯
그렇게 인생은 이어지는 게지.
▲중간쯤 만난 상단 쉼터,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아야 한다는 설명이 더 심장을 뛰게한다.
▲세석은 지리의 육거리 같은
말하자면 교통 요충지.
영신봉에서 남부능선으로 이어진 낙남정맥의 출발지.
▲ 준비운동도, 중간중간 스트레칭도, 산행을 마치고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차분하질 못한다.
▲지리산 /권경업
오를수록
가슴 저린 산
서럽게 서럽게
눈물나는 산.
▲쫓기던 이 좇던 이
영문 없이 끌려간
핏덩이까지
아물어간 상혼에도
고통은 남아.
▲유월 짙푸른
한을 삭이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하나됨을 바라초로에 반백이 다 되도록.
▲골마다 영마
바람으로 흐느끼
지리산은 서러운 .
▲그렇게 '돌마리영'포인트가 나오는데.
안내판도 없어지고.
▲ 멀리 청학동 뒷산, 삼신봉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외삼신봉으로 낙남정맥이,
우측으로 내삼신봉-쌍계사-성제봉이 보이던 그 풍경은 구름에 가렸다.
▲맑은 물은 청하한 소리로 흘러가고.
여름 매미소리도 싱그러웠다.
▲반가운 세석교를 만나고
여기서 부터 세석은 편안한 오름 길.
▲그 최상단 계곡물에 띰을 씻고
세석을 만날 채비를 다시 했다.
▲마치 내 살아온 날들의 인생길 처럼
비탈진 길을 몇 굽이 돌아 돌아.
▲어느덧 만나는 가을의 야생화 풍경들...
그 시절 화려했던 답사 길을 그리워했다.
▲이제 햇살을 맑아지고
싱그런 바람으로 환영을 하고.
▲그림같은 길,
거림에서 세석의 길은 , 노고단 고개에서 노고단과 더불어
탐방로예약제가 실시되는 생태계의 보고.
▲반가운 삼거리.
여기서 음양샘-삼신봉으로 하여 청학동으로로 가고,
아픔의 현장 대성골로 하여 의신마을로 갔었지
▲ 모두 10K의 아득한 길 이었다.
▲지천으로 짙은 색으로 피어난 동자꽃.
▲물이 풍부한 세석에서 맘껏 물을 마시고
병에도 채우고.
▲아! 반가운 세석 대피소
같이했던 그리운 이들을 기억했다.
.
▲세석은 백무동- 한신계곡으로 오르기도 하고,
거림에서 오기도 하며,
지리 종주길에 늘 함께 했던 길.
▲여기서 백무동은 6.5K, 장터목은 3.4K
창학동, 의신마을은 각각 10K의 아득한 길.
▲세석은 지리 여러방향에서
오가는 이들의 마음의 고향같은 곳.
▲좀 지나면 하얀 쑥부쟁이,
보랏빛 구절초 세상도 되겠다.
▲'세석대피소'
여러번, 여러번 머물렀던 곳.
▲아 '세석'
이 일대를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 부르는데
‘평’은 ‘坪’의 와오(訛誤)일 것이요,
‘전’은 ‘坪’을 다시 한번 더 역(譯)한 것이리라.
▲한 예쁜 여인이 스스로 '찍어 드릴까요?'
어디서나 감사한 손길을 만나는
복 받은 삶.
▲세석평(細石坪)이라 쓴 것이 옳겠다
‘세석’이란 것은 지금 속(俗)이 ‘잔돌밭’이라 하니
세석은 분명히 세석이겠지마는
실제에 있어서 ‘잔돌’이라고는 없다니
그 원뜻이 자못 의심스럽다.
▲여기에 천막촌이 생겼었다는 꿈 같던 시절...
모두가 전설같은 산꾼들의 이야기.
▲지난 겨울 촛대봉에서 눈 내리는 풍경으로 봤던 그 곳,
싱그러운 여름, 여름 이야기.
▲거기서 일행은 점심을 나누고
모두가 즐거워 했지.
▲산꾼들이 즐겨먹는 즉석 밥,
요즘은 버너없이도 물도 끓이고 밥도 하는 세상.
▲아쉽게 거기를 떠난다.
세석은 지리 7개 대피소중 가장
인원이 많은 240 수용시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건
꼭 인물, 인품만은 아닐것이야.
▲주황색 원추리가 어쩌다 올해는 걸어보지 못한
덕유종주 길도 그립게 하고.
▲여기저기기 가을 야생화가
계절을 채비한다.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긴 한신계곡의 여정.
▲노란 마타리 꽃,
작고 노란꽃이 모여있어 꽃이된다.
▲생각같으면 촛대봉까지라도 올라
세석평전을 보고가야 하는데
뜨거운 햇살은 그럴 여유가 없었지.
▲아! 이 나무,
백무동에서 여기롤 올 때면
다 왔다는 이정표 같던 나무.
▲오늘은 이 나무부터 힘든 길이 시작되는 샘..
길고 지루 한 길이다.
▲깊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여건에서는
큰 바위로 지탱한다. 나무는 불평하지 않는다.
▲1.3K길은 힘든 가파른 길.
마의 구간임에 틀림없다
▲'나무와도 찍으니 나와도 찍자'
말 하려다 말았다.
▲한신폭포, 수량이 적다,
지난 겨울 큰 빙폭의 그 곳.
▲나무들의 산, 꽃들의 산, 짐승들의 산
그들에게 안겨주는 따뜻한 위안.
▲머물고 싶은 순간처럼
그 빛깔들도 계절따라 변화하는위대한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꼈지.
▲그렇게 아득한 1.3K를 내려왔지만
가야할 곳은 5.2K.
▲배낭털이를 하는거야
남겨가면 안되는 거야.
▲그래도 게곡 바람은 시원했으니
내 마음을 위로하는듯.
▲가파른 길, 좁은 바위 틈만 위험이 있는건 아니야
위험은 바로 내 곁에 내 일상에 있는 거니까.
▲수 많은 이들이 사연을 안고 오르내리던 길..
지난 겨울 이 길은 홀로였다.
▲수억년 물이 흐르고 그 위를 돌들이 구르고
그렇게 물길이 나고, 소가 생기고.
▲우람한 나무를 만나면
이 나무는 그 시절 쫒는 자와 쫒는 자의 치열함을 봤을까?.
▲복잡한 삶에서 멀어질수록,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하나씩 하나씩 가지치기가 되는거야.
▲가을이면 폭포와 단풍나무와 그림이 되는 곳.
5층 폭포라 했다 그 이름을.
▲자연, 태풍이나 홍수는 어마어마하기도 하지만
이런 세밀한 경탄스런 아름다움도.
▲폭포가 교훈했다 좋은 풍경, 아닌 풍경이 없는거야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이 없듯,
우리 생각이 그리 만들 뿐.
▲가내소의 전설
먼 옛날 한 도인이 12년 수행의 마지막 시험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 채 건너가고 있었다.
▲이를 본 지리산 마고할멈의 셋째 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해 물에 빠뜨렸다. 이에 도인은
“에이~ 나의 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고 탄식하며 떠났다고.
그 후 사람들은 이 곳을 '가내소'라고 불렀다.
▲그렇게 떨어진 사람들이 어찌 그 도인뿐이겠는가?
유혹말고, 진실한 사랑의 밧줄이 항구에 배를 대듯
그렇게 어느날 불가항력으로 던져진다면
그 줄 한번 잡아도 되지않을까?.
▲ '한신계곡은 여러 설화가 있다
신라화랑 '한신'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를 만나서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이후로 비가 내리면 혼령들 꽹과리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고. ..
▲또 다른 설은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 해서
한신계곡 (寒身溪谷) 이라고도 하며,
▲또한 옛날 중국의 장수 '한신'이
잠시 몸을 피했던 곳이라 해서
한신계곡 (漢信溪谷) 이라고도 한다.
▲201년 국가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된
이 계곡은 '첫날들이 폭포', '가내소폭포',
'오층폭포' '한신폭포'등이 있다
▲첫 나들이 폭포를 지난다.
더위와 긴 길손은 내려가기 바빴지.
▲지난 겨울, 여기를 지날땐
빙벽의 연속이었지
▲길은 평안해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너구러움을 향해.
▲이제 열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생각도 가볍게
삶도 그렇게.
능력없으니 열심이라도 내자, 그 삶이 다 옳았던건 아니니까.
▲손에 무언가를 넣으려 아둥바둥한 시절,
이젠 멀게만 느껴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으로.
편안, 그게 좋으니.
▲그렇게 한신계곡의 답사를 마치고
또 다른 그리움으로 찾아가기로 한다.
▲백무동, 여기서 세석은 6.5K. 여러시간이 걸리는 아득한 길,
장터목 대피소는 5.8K.
인내가 필요했던 길 이었다.
▲거기에 탐방지원센터가 있고
뜨거운 햇살은 다시 시작되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야
과태료 대상자라 하겠지만
이 계절 아니면 이런 호사를 어디서 누리겠는가!.
▲그렇게 그리운 세석을 다시 찾던날,
백무동을 떠난 우리 차량은 산청의 어느 식당에서.
▲석쇠 불고기정식이라던가?
11,000원짜리로 즐거움을 나눴으니......
뜨거운 여름 날에
외롭게 걸은 뜨거운 그리움의 길...
아쉽고 그리운 그 길을 다시 걸을 그 날을 꿈꾸며
감사한 길을 걸은
감사한 날, 가슴벅찬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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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이선희 노래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 할 수가 없죠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께요
취한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지 않죠
영원한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 할 수가 없죠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테죠
먼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 생에 못다한 사랑
이 생에 못다한 인연
먼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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