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대표하는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140년 뒤에 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일연(一然, 1206-1289)
그는 지금의 경북 경산에 태어났고, 9세에 광주 무량사에서 공부했으며, 5년후
설악산의 진전사로 출가하였다. 1227년에 승과에 장원급제하여 공무원이 된다.
당시는 사찰에서 국가업무를 대행했기에 대선사, 왕사, 국사등의 지위가 있었으며
과거 시험을 통하여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공무원인 승려가 어찌하여 역사서를 썼을까?
설민석은 ‘우리나라 역사중 내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시절을 꼽으라면 고려라’고 했다
고려는 백성들이 살기에 최악의 시대였다, 원나라의 간섭과 긴 몽고와의 전쟁, 왕은 강화도로 피난 갔고
원 황제의 사위가 되어야 했으며, 100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은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 기댈 곳이 없게 만든 시대였다.
백성들은 기대 곳을 찾아 불교로 몰려들었고 이런 백성들에게 일연스님은
우니나라 조상들이 얼마나 위대하며 귀한 나라인지 자존감을 심고자 역사를 재밌게 이야기 했다.
이미 대몽항쟁 그 어려운 시절에 팔만대장경을 이룬 나라가 아니던가!
이에 그 역사이야기를 역사서로 기록했다.
1285년에 쓴 5권 3책의 역사....
삼국사기가 왕조중심의 역사기록이라면 삼국유사는 그 기록에 빠졌거나 들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쓴,
예를 들면 단군신화 같은 이야기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 외에도 단군(檀君)의 사적(史蹟), 신화, 전설, 설화, 향가(鄕歌) 등이
풍부히 수록된 귀중한 자료이다.(국보 제306호). 최근 범어사를 가보니 거기 삼국유사가 국보로
승격(국보306-4)되었다는 현수막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4번째 국보이다.
삼국유사는 군위 인각사에서 발간되었고 일연은 1277년 72세에 운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니 운문사에서 삼국유사가 구상되고 쓰였으리라.
최근 스님이 82세에 입적한 인각사 거기에 인각사보각국사비가 복원되었다. 스님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비로 고려 충렬왕 21년(1259)에 문인 청분(淸玢)에 의해 세워졌는데,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짓고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만들었다.
인각사보각국사비는 왕희지 글씨 때문에 중국 사신이 탁본을 떠가기도 하는 등 중국에까지도
알려져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이후 무절제한 탁본으로 크게 훼손돼 현재는
비의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다.
그 일연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비슬산(琵瑟山·1083m),
국내 100대 명산 중 40∼50위권에 드는 명산이다. 대구 달성과 경북 청도,
경남 창녕에 걸쳐 있고 최고봉 천왕봉은 달성군 유가면에 소재한다.
대구에서는 ‘북(北)팔공, 남(南)비슬’로 부른다. 산세에 따라 팔공산을 남자에,
비슬산을 여자에 비유한다.
거기를 걷는다. 참꽃의 사절이면 더 좋겠지만
조용한 겨울산, 신선이 거금고 타는 형상을 보려한다...
------
‘비슬산 가는 길’ /조오현스님(1932년~2018)
비슬산 굽잇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