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는 외국의 여인이 우리나라로 와 황후가 된 여인이 있고, 반대로
우리 여인이 외국으로 가 황후가 된 여인이 있다.
후자는 고려의 공녀로 원나라로 끌려가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이고,
전자는 인도로 알려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바다를 건너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許皇后)(33~189)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허황옥(許黃玉).
그는 수로왕과 혼인하여 11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10명이 아들이었다.
그 10명중 8명은 수로왕의 성을 따서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되었고, 2명은 허황후의 간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 허황후와 수로왕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등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아들중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지리산 자락 칠불사에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허황후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바다를 건너올 때 한사잡물(漢肆雜物, 한나라의
여러 가지 호화로운 물건)을 잔뜩 가져왔는데, 천부경·종정감·사농경 등 중국계 관직을 칭한 것이나,
황옥(皇玉)이라는 이름이 중국 ‘황제’와 관련 있다는 것 등으로 북방 유이민 집단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최근 인도와의 정상회담에서까지 덕담으로 관련지어
이야기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그 시절에 먼 바다건너 타국으로 와 왕비가 되고 문물전래의 조상이 되었다는건
오늘날까지 진취적인 삶의 귀감이 된다
그가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는데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허황후의 전설을 품은 산 무척산(無隻山·702.5m),
오랜만에 거기를 걸어보려한다.
산세좋고 경관 수려한 그 곳을...
▲'무척산 주차장' 거기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나섭니다.
▲우측으로 올라 좌측으로 내려오려고
계획을 했지요.
▲흔들바위.
여기서 보면 여인의 얼굴이 시계방향으로 돌면
남성으로 보이다가.
▲여기서 보면 빛나는
다이몬드처럼 보입니다.
▲수 많은 나뭇군들이
쉬어갔던 곳이겠지요.
▲거기에 앉으면
시원한 풍광이 시작되고.
▲ 나중 읽어 본 경고문은 흔들거나
옆에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이름이 흔들바위라 다들 흔듭니다.
▲무척산은 여기저기 허황후의 어머니에 관한
애뜻한 전설이 담겨있습니다.
▲바위들이 많고 이름들이 즐비하고
거기에 신화도, 전설도 새겨있지요.
▲계속 올라야 하는 길이지만
참 좋은 산이란 생각은 갈수록 깊어지고.
▲탕건바위, 암벽등반등이
줄줄이 어어집니다.
▲거기서 서쪽방향으로는 한림면- 진영
그리고 창원의 여러 산하가 들어왔지요.
▲거기에 '삼쌍연리지'가 있습니다.
▲3개의 연리부분을
설명하는데.
▲첫 연리부분,
한 나무의 두 줄기 같기도 하고.
▲여기가
두번째 연리부분이고.
▲세번째 부분은
바위위로 올라야 보입니다.
▲멀리 진영읍내, 우측으로는 낙동강- 하남읍의 수산....
▲이제 석굴암에서
2K를 올라 온 거지요.
▲그렇게 오르면 정상,
건너로 천태산과 두곡산등이 조망됩니다.
▲무척산(無隻山·702.5m)
김해시의 넉넉한 재정을 자랑하는듯 정상석이 시원합니다.
▲퍽 오래전, 김해의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수요 직체시간에 여기를 오른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표지석...
석굴암에서 올라왔고
결과적으로 길을 잘못들어 백학교까지 가게됩니다.
▲꼭 천지방향으로 가야 원점회귀가 되고
그랬는데, 어느 사람의 잘못 안내로
백운암 방향으로 가고 말았으니....
▲백운암까지 가는 길은 퍽 가파르고
고된 길입니다.
▲천지를 꼭 봐야하는데...김수로왕이 죽어 장사 지낼무렵
땅을 파면 자꾸 물이 솟았고
도인의 안내에 따라 무척산에 천지를 판 이후 그쳤다는데...
▲백운암..
모은암이 허황후의 어머니 은혜를 생각한 암자라면
백운암은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보옥선사)'이 세웠답니다.
▲암자는 아득히 높이 있고
이제서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루하고도 가파른 재미없는 시멘트 포장길을
3K 걸었습니다.
▲모르는 길을 걷는 피곤함,
도착한 백학교에서 가을 메뚜기를 봅니다.
▲하산길에서 2K면 되는 것을
재미없는 5K길을 내려 왔으니....
▲거기서 물으니 여기는 상동면 여차리이고
무척산 주차장까지는 12K...
하는 수 없이 콜택시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추억이 서린 하산길을 잃어버리고
불안히 길게 걸은 산행,,,
어느 산이든 더욱 신중하게 준비 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지요.
▲김해시내를 통과하여
'수로왕릉'을 찾았습니다.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를 건국한
시조 김수로왕릉(사적73호).
▲입구의 너른 잔디밭이
퍽 인상적이었지요.
▲왕궁(봉황대) 동북쪽에 조성되었는데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는 5m입니다.
▲가락국 중엽에 조각되었다니
그 아름다움과 함께 아득한 역사를 증언합니다.
▲숭신각과 그 안에는
신도비가 있지요.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족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42-199)
이런 형태를 납릉(納陵)이라합니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지요.
▲고대사 연구가 빈약하고
특히 가야시대의 역사연구가 늘 아쉽습니다.
▲제향 제례등을 위한 여러 전각들이
역사의 위엄을 더합니다.
▲숭선전,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
▲숭선전을 들어가는 숭인문이
한참동안 발길을 잡습니다.
▲담 너머로 본 숭선전...
엄숙함이 느껴집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15일에
춘추제례(경남 무형문화재 11호)를 제향합니다.
▲거기서 바삐 발길을 돌려 1.5K를 달려오면
수로왕비릉(허황후/ 사적 74호)이 나옵니다.
▲구지봉 동쪽에 위치하여 비문에는
'보주태후허씨릉'이라 적혀있습니다.
▲들어가는 구남문,
좌측이 구지봉입니다.
▲왕비는 16세 나이에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와 왕비가 되었고
18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동쪽 분산에서 서쪽 구지봉으로 흐르는 능선에
위치하니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거북이 형상으로 말하면 어깨 어디쯤될까..
오히려 평지의 수로왕릉보다 아름답다는 생각과
왜 그리 지극했던 내외의 릉이 떨어져 있을까?...
▲공주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는다는 돌....
이민 가는 사람이 고향 땅 흙이나 돌을 가져가는 마음 이었겠지요.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는 파사석탑, 일명 진풍탑
(경남 문화재 자료 227호).
▲호계사에 있던 것을 절이 불타 없어지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1873년 여기로 옮겼다고.
▲역사의 왕도(王都) 김해에 더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고, 모으고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 공주에게 김수로가 청혼을 하자 자기는 공주이니
왕이어야 청혼을 받아준다고 했고
그래서 김수로는 가락국을 건국했고 왕이 되었다니....
그 진한 러브스토리에 감동합니다.
▲인도의 수상등 외교사절이 여기를 오면
참 많이 고마워하고 긍지를 느낄듯...
그들이 심은 기념식수입니다.
▲구지봉으로 가는 산책로... 구지봉은 목을 자른듯 도로가 났고
그래도 지금은 터널로 이었습니다.
그 후 인물이 다시 이어져 노무현대통령이 나왔다고들 하지요.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의지'
42년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상자가 내려왔고
그 속에는 6개의 알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다하여 수로(首露)라 했다지요.
▲백성들이 수로왕을 불렀던 '구지가'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서동요와 함께 지금도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등에
자주 출제되지요.
▲거기에 고인돌(지석묘)가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한석봉 글씨의
구지봉석(龜旨峰石)이 새겨졌습니다.
▲수로왕과 허황후가 거닐던 정원 같은
대성동고분군을 갔어야 하는데
시간이 여의치 못하여 '연지공원'에 갑니다.
▲아이들, 청소년, 노인, 젊은가족...
김해는 젊은 도시답습니다.
▲좀더 여유있게 돌아볼 것을.. 시간이 바빠
인제대학교-가야테마파크길로 하여
분산성으로 오릅니다.
▲황후의 전설이 곳곳에 서려있는 분산성.
▲분산성(盆山城. 사적66호)
김해시내 어디서든 늘 보이던 그 곳을 왔습니다.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
조선 전기에 '박위'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리하였고,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고종 8년(1871)에 다시 쌓았습니다.
▲역사의 향기와
아름다운 길.
▲정상 부근에 있는 비석 4기의 충의각.
좌측 2기는 흥선대원군의 불망비로 정현석이 성을 보수후
세웠습니다.
▲세번째 비석은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한 박위장군을 기리는 비석.
▲ 네번째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 부사의
불망비(1874)...
왜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100년전 정현석 부사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도
있었던듯.
▲김해는 선어산에서 분산성으로 내려뻗은 긴 산 줄기가
동서로 가라놓은 형국이지요.
▲ 성 안에는 해은사,
봉수대, 충의각 등이 있습니다.
▲ 예사롭지 않은 돌들
이런 돌들이 성벽의 재료가 되었는지.
▲돌 뒤편으로는 호젓한 길도 나오고.
▲분산성을 만장대라고도 하는데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최전선기지이니
만길이나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흥선대원군이 내려줬다는 휘호와 낙관.
1999년 여기에 새겼답니다.
▲ 만리 타국에서 온 황후는 여기에 자주올라
바다건너 고국을 그리워 했겠지요
'왕후의 노을'..이 되었습니다.
▲ 가야 시대의 분산성...
그 아름다움을 새깁니다.
▲ 봉수대밑 작은 정상석...
만장대란 이름도 정겹습니다.
▲봉수대... 얼마나 왜국의 침략이 잦았을까?
여기 봉수대에 서면 사방 거칠 것이 없습니다.
▲ 東김해... 저 멀리 낙동강 넘어
부산시내도 훤합니다.
▲ 낙동강은 西낙동강으로
갈라져 김해평야를 적시고
▲남쪽 방향과 西김해.
평화로운 인구 56만의 고장입니다.
▲남쪽으로 너른 김해평야...
허황후 시절엔 바다였겠지요.
▲서김해와 저 멀리 장유,
그 좌측으로 율하신도시.
▲ 아래 중앙으로 수로왕릉,
우측으로 왕비릉입니다.
▲좌측으로 西낙동강이
'사행천'이 무엇인가 보여주고.
▲성벽은 그렇게 흘러가고
우측이 비석이 있던 충의각입니다.
▲일몰시간을 맞춰 한 시간을 기다리며
성벽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과일로 먹고
그러나 왕후가 봤던 노을은 구름 속에 가리웠으니....
▲일몰이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발 걸음..
하나 둘 불은 밝혀지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성벽을 내려오고.
▲성안의 해은사(海恩寺)을 찾았습니다.
▲황후의 오빠 장유화상이 파도를 이기고 건너와서는
안전하게 보호해준 바다의 은혜를 기억하고 세운 절...
▲어둡지만 조용한 마음으로
들어가 봅니다.
▲영산전에는 부처님이 빛나고.
▲우측 대왕전 안에는
수로왕과 왕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지요.
▲그 앞에는 봉돌이 쌓여 있고.
▲뒤로 산신각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불빛이 빛나고.
▲파사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피고 싶었지만 어두워진 시각
황후의 노을과 함께 다음으로 미룹니다.
드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의 유장함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김해의 역사를 호흡할 수 있는 김해의 진산 분산....
황후의 그리움에 물든 일몰의 장관을 다시 기대하며 하산하였으니...
김해 시내에서 분산성을 올려다보면 황토색 성곽이
머리띠를 두른 듯한 모습으로 의연하였으니...
그 김해시민의 행복도 그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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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고 내가우네
♬ 정든 님 사랑에 우는 마음
모르시나 모르시나요
무정한 당신이
내 마음 아실 때엔
땅을 치며 후회하련만
어차피 가신다면
이름마저 잊으리
정주고 내가 우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정든 님 모습을 행여나
잊을때는 잊을때는
무정한 당신이
내 마음 꾸짖으니
야속하고 우울하련만
괴로움 남기시고
그대 어이 가려하오
첫사랑 고백하던
그 말씀을 잊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