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드리크 하멜’(Hendrick Hammel.1630~92)’이야기.
하멜은 1630년생이니 우리보다 330여살 더 자신 분이다. 18세 때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에
취직해 스페르웨르호를 탔고. 8개월 뒤에 자바섬의 자카르타에 도착해 4년간 무역활동을 했다.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64명중 36명만 겨우 살아남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들이 표착한 곳은 남제주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로 생각,거기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하멜상선전시관도 여기에 있는데, 정확히 어디인가 의견이 분분하다
이 배에는 많은 무역상품이 실려 있었는데, 난파된 배에서 건진 이 물품들을
조선 정부는 모두 돌려주었고 그들은 이것을 팔아 살림에 보태쓰기도 했다.
이미 조정에선 26년전 같은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착, 귀화해 결혼도 하고 두 자녀를
두고 무과에 급제해 훈련도감에 근무하며 병자호란에도 참전한
박연(朴燕.벨테브레. 1595~?)이 있었다.
박연을 통역관으로 보내 하멜을 조사하였고 제주도에 억류돼 있었는데 표착 10개월후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된다.
서울로 끌려와서는 효종의 신문을 받았고, 임금은 이들에게 호패를 내려주며
훈련도감의 박연 아래 배속시켰다. 표류된 외국인을 송환한 예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붙잡아두고 북벌정책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화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외교문제로 번질 공산이 커지자 조정에선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입막음하고 모두 강진으로 유배시켰다.
이리하여 1656년 3월, 이들은 강진 병영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각종 잡역에 동원됐고
하멜 일행은 병기개발에도, 가혹한 사역에 동원 되기했는데 훗날 하멜은 흉년과 질병이
유행할 때 동네사람. 승려에게 도움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게 7년을 보낸 후 흉년으로 이들은 여수.순천.남원으로 분산 수용됐는데 모진 고통의 삶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을 결심, 1666년 9월, 8명이 탈출했고 풍랑을 넘고 넘어 3일 뒤
일본 고도(五島)에 표착했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만에...
하멜은 나가사키에 1년간 체류하면서 지난 13년 동안의 조선에서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험금을 청구할 목적으로....
오랜 형상 끝에 20년만애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그 보고서는
‘하멜표류기’란 책으로 출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멜은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는 독신이었다.
어떤 소설가는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못 잊어 결혼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억류기간에 혼기를 놓친 것이라고 하는데 '하멜 보고서'에는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조선의 문명을 훨씬 일찍 받아드릴 수 있는 기회를 조선정부는 놓쳤고
세계 무역선이 오가던 시절에 조선은 그렇게 캄캄했다.
제주, 강진 그리고 그가 탈출했던 여수엔 거대한 하멜 기념관과 범선, 그리고 동상,
기념공원, 기념등대등이 조성되었다.
그의 고단한 자취가 남아있는 강진, 그리고 해남 장흥, 보성은 꿈같은
남도답사 1번지의 고장이다.
그 곳을 간다. 제암산...
보성이든, 장흥이든, 그 소속은 중요치 않다
거기를 다시 걷는다. 하멜도 거기를 올랐을까? 그의 귀향을 꿈꾸며...
▲ 가을비 일까? 겨울비 일까?
우산속에,
녹차의 고장, 보성의 제암산자연휴양림에 섭니다.
▲ 우리는 제암산- 사자산을 목표로
우측으로 오르고.
▲ 코스가 다른 예쁜 님들은 이산가족이려니
한번 찍자고 졸랐지요.
그러지 않고야 누가 제하고 서겠습니까?
▲ 그래도 남아있는 단풍 정취가
감사했지요.
▲ 4년전 발 빠른 팀들을 따라
이 길을 오르다가 구토까지 했었는데.
▲ 겨울 채비를 하는듯 새 소리, 풀벌레 소리는
이제 고요해졌습니다.
▲ 뜨뜻한 안방 매트에 누워
빈대떡이 붙여 자시지 뭐하러 이 고생이냐고....
▲ 쌀랑한 몸은 한잔씩을 나누니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 막바지는 제법
고도를 높여 오릅니다.
▲ 이윽고 제암산 정상이 가까워오지만
바람, 구름, 비.....
▲ 낙엽의 길을 지날 땐 후두둑
더 요란한 비처럼 느낍니다.
▲ 그 해 5월은
철쭉 터널 이였지요.
▲ 삼거리를 만납니다.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내장산을 지나, 장흥을 흘러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을 갈라 광양 백운산에서 끝나는 호남정맥길입니다.
▲ 선바위는
저렇게 다가옵니다
.
▲ 병풍바위에 오르면
거기엔 넘어진 비석과 함께 어느 조상님의 묘지가 어지럽고.
▲ 아찔한 거기서 내려다 보면
세찬 바람에 안개가 파도처럼 일렁이었지.
▲ 파도 같기도 하고
보리밭의 일렁임 같기도 하고....
▲ 거기도
작은 선바위가 있습니다.
▲ 언제나 인품이 곳곳하신 조대호고문님,
필자도 저 시절까지
산을 다닐 수 있을까?
▲ 선바위을 지납니다. 동전도 아니고
작은 돌을 던져 얹는다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 다시 까마득히 힘내어 오르면
정상이 다가오는데..
▲ 제암산(帝岩山·778.5m)
'제암(帝岩)'은 임금바위를 뜻합니다. 33m 높이로 우뚝 솟았는데,
.
▲ 주변의 형제바위, 병풍바위, 능바위 등이
임금바위를 향해 절을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 비바람속 목숨 걸 용기는 없습니다.
거기의 정상석을 없애든지, 정상석을 세웠으면
밧줄 하나라도 설치하든지.....
▲ 미끄러운 바위를
핑계로 그냥 내려왔지요.
▲ 바로 아래 정상석이 다시 있는데
철쭉 계절엔 여기도 엄청 줄을 서야 합니다.
▲ 제암산은 전남 장흥과 보성을 경계 짓는 산이지요.
장흥이 62%, 보성이 38%를 차지합니다.
▲ 이 산은 한반도에서 철쭉이 가장먼저 핍니다
매년 5월 초 열리는 장흥의 '제암산 철쭉제'를 시작으로
전국 철쭉 축제가 본격화 될 정도.
▲ 이렇게 열어보이고
금새 안개로 덮힙니다.
▲ 5월엔 일림산까지의
곳곳이 이런 장관입니다.
▲ 그 시절 멘토와 함께 호남정맥(湖南整脈)의 주축을 이룬
제암산(帝岩山·807m)~사자산(獅子山·666m)~667.5m봉(삼비산)~일림산(日林山·626.8m)
15K, 7시간을 우중산행 했습니다.
▲ 우리는 사자산을 향합니다.
깊게 곰재로 내려가야 하지요.
▲ 작은 봉우리,
일명 돌탑봉을 지납니다.
▲ 산등성이의 바람은
체온을 내려 뜨리고.
▲ 조망좋은 날은 천관산도 가까이 뵈지만..
다시 아쉬워 해 봅니다.
▲ 형제바위라고도 하고
가족바위라고도 하는 바위를 지납니다.
▲ 효성 지극한 형제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산나물을 캐러 제암산에 올랐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자리에 솟아났다고 전해지는 바위.....
▲ 어디든 전설, 신화등을 알고 보면
지금 이 시대에 같이 살아있는 듯 느껴집니다.
▲ 거기서 곰재로 길게 내려오며
거세지는 빗줄기에
오늘 사자산을 포기하자고 의견을 모읍니다.
▲ 곰재.. 조금 더 오르면 곰재봉- 사자산으로 이어집니다.
철쭉 평원의 장관이 이어지지요.
▲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곰재는 그 옛날 동학군이 관군에 쫓겨 넘었다는 고개입니다.
▲ 그 시절의 희생으로 오늘이 있고
이런 걷기좋은 시설도 생겼습니다.
▲ 역사는 그렇게 흐릅니다.
그림 같은 두 분은 얼마나 친한지는 모를 일입니다.
▲ 서편제의 창시자도
보성인물 이었군요.
▲ 서편제, 동편제..
판소리의 대가들 인가봅니다.
▲ 선녀의 광장이라는데
비만 내립니다.
▲ 다른 코스로 갔던 예쁜 님들도
여기를 다녀갔습니다.
▲ 거기도, 우리도
밥 먹을 자리를 찾아 헤맵니다.
▲ 더늠길의 '더늠'은 판소리에서 따왔는데.
어떤 명창이 부른 판소리 특정 대목이 사람들에게서 큰 사랑을 받으면,
이를 누구누구의 더늠이라고 부른답니다.
▲ 이처럼 더늠길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자는 뜻이 담겼겠지요.
▲ 더늠길은 사랑로, 청춘로, 햇살로, 치유로,
행복로, 호랑이 발자국로 등 6개의
서로 다른 이름의 작은 길로 다시 나뉘어졌습니다.
▲ 치유로와 햇살로가 마주치는 지점은 해발 500m 높이인데,
"사람이 가장 편한 느낌을 받는 고도"랍니다.
▲ 마지막 가을이 아쉬운듯
애기 단풍잎이 애처롭고.
▲ 5.74㎞ 덱 '더늠길'
가족 트레킹으로 최적이겠습니다.
▲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을 고마워하며
진수성찬을 나눕니다.
▲ 몸은 더 떨리고
사진까지 그러했습니다.
▲ 자연 휴양림의 방갈로
펜션, 야영장등 시설들이 아름답습니다.
▲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
혹은 표현을 약간 달리 해 '사랑의 기쁨'이라고도 합니다.
5월의 그 시절을 기대해 봅니다.
▲ 그렇게 출발지
자연휴양림 입구를 만납니다.
▲ 그렇게 우측으로 올라
곰재산-사자산을 포기하고 하산했습니다.
▲ 그렇게 내려와
보성 녹차밭이 있는 '율포해수욕장' 인근 식당에서
즐거움을 나눴지요.
▲ '율포해수욕장'
아주 오래전 여기에 본부처럼 텐트를 쳐놓고
아침마다 영암,무안,고창, 보성, 장흥, 강진, 해남, 목포, 진도, 완도
▲ 3박 4일을 남도 전역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혼자가 아니였지요
그렇다고 남성끼리 였겠습니까?.
▲ 아침이면 해수탕이 옆에 있어
편리했지요.
▲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얼굴의 주름은 늘었습니다.
▲헨드리크 하멜’(Hendrick Hammel.1630~92)’
버스에서 5분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아픈 삶에 대하여
.
▲ 그의 전시관과 동상등이
왜 제주와 강진과 여수에 있는지에 대하여.
(본 글 서두 참조)
▲ 1630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하멜...
18세에 동인도 회사에 취직하여 무역 항해에 나서고....
▲ 360여년전에 일본으로 가려다
태풍을 만나 제주에 표착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여러번의 탈줄 시도로 강진으로 유배되고....
▲ 결국 여수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으로 갔고,
보험금을 청구할 목적으로 13년의
조선생활을 보고서를 적었는데.
▲ 훗날 그것이 '헤멜 표류기' 가 되었다는....
그의 아픈 귀향의 마음을 더듭었지요.
▲ 그렇게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비가내리던 날에
다시 찾은 보성-장흥의 제암산,
여름이면 파릇한 초원으로 힘 넘치는 정열을 과시하던 산등성이는
가을을 맞아 억새로 반짝이며 보는 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한겨울에는 흰눈인 내륙의 고산준령인양 냉랭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 새 봄이 오면 신록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철쭉 향연을 그 곳.
정겨운 님들과 그렇게 걸은 추억을 다시 뒤로하고
12월을 열어갑니다
. 그리운 님들이여!--------
가 을 / 릴케(1875-1926)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