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를 흔히 ‘5천년, 반만년’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주 개천절이 제4351주년이라 했듯이 5천년이 되려면
700여년이 더 흘러야 하고, 그 4351년도 2333을 빼면 2천년 남짓하다.
그 역사를 돌아보면. 고려는 474년 동안 34명의 왕이 집권했고,
27명이 집권한 조선은 518년 동안 존속했다.
그런데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 나라가 있었으니 ‘신라’다. BC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935년 56대,경순왕까지 992년을 존속하여
‘신라천년’이라 부른다.
그 마지막 왕, 경순왕은 전쟁 없이 왕건에게 나라를 이양했고 그 결과로 왕건의 사위가 되어
죽는 날까지 호의호식은 했다, 오래전 필자가 통일기행중 봤던 연천의 그의 무덤은
민통선 안에 초라하게 있었다.
최근엔 성역화하여 크게 조성하였다.
경순왕은 9남 3녀를 뒀다. 그 중 비탄에 젖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신라 재건의 꿈을 안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한다
그러나 금강산까지의 길이 너무 멀고 험해서 충주까지 왔을 때 공주는 병이났고,
할 수 없이 태자는 공주를 두고 떠나야 했다. 그 때 공주가 머무른 절이 본래 ‘월형산 월악사’라
불리던 절이었으나 그 후 ‘월악산 덕주사’로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고교시절 배웠던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
거기에 보면,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년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라했다.
여기 덕주사의 보물 제406호. ‘마애불입상(德周寺磨崖佛立像)은 오빠를 그리며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하지만 덕주사가 이미 350여년전 진평왕 시절에
조성 된 걸 보면 이미 세워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주현미가 노래했다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좀 해다오
그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리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어느덧 한 해가 깊은 가을로 접어든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한이 서린 월악산...
그리운 님들과 거기를 간다.
▲ 송계계곡 코스를 위하여
'동창교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만차되어 3시간을 달려 도착한 님들...
즐거움은 시끄러움으로 하늘에 닿고.
▲ 입구 자광사.
오늘은 덕주공주님 이야기로 시작되었으니
여인님들을 많이 실어 보려고
▲ 조령을 넘어 청풍호반 길을 돌아왔으니
그 즐거움이 오죽하리!.
▲ 늘 남매같은 부러운 초등친구.
몸이 쪼금 동그래서 남매라 한 건 아닙니다.
▲ 자광사...
자세히 돌아 볼 여유가 없습니다.
▲ 나더러 저 영봉을
정녕 오르란 말인가?.
▲ 입구에서 영봉까지는 4.3K.
2시간 반은 잡아야 합니다.
▲ 월악산 산신제 유래도 보지만
읽기가 불편한 낡은 안내판.
▲ 월악은 4가지 길로 오를 수 있습니다.
덕주사에서 시작되는덕주골 코스(6K), 신륵사코스(3.6K),
수산리에서 보덕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
▲ 오늘 우리가 오르는 동창교 코스...
어느 코스이건 악(岳)자가 들어간 산이니
고딤은 각오해야 하고.
▲'강산해'산악회의 정겨운 님들.
다음주는 울주의 간월산을 동행 할 것입니다.
▲ 짙은 단풍을 기대했지만
아직은 이른 계절.
▲ 가파른 돌 계단과 철 계단의 연속인 월악은
경험 많지 않은 산우들께는
결코 호락호락한 산이 아닙니다.
▲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면.
▲ 결국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월악의
비경이 기다릴 터이니..
▲ 해밯 1,000m를 웃도는 십여개의 봉우리가
수려한 병풍을 두른 산.
▲ 첫 전망대를 만나
자세를 잡아 봅니다.
▲ 동쪽으로 수 많은 봉들이 이어지고.
▲ 송계 삼거리까지는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 버스에서 5분 강의를 했습니다.
992년의 신라이야기,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왕' 이야기...
▲ 그리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이야기와
그가 경순왕의 왕비가 된 이야기.
▲ 그리고 월악산이 품고 있는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덕주공주(德周公主)의
애절한 남매 이야기
.
▲ 그리고 오늘 산행의 컨셉(concept)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로 하자고.
▲ 이제 송계 삼거리를 코 앞에 둡니다.
▲ 빛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깊숙이 스며드는 사랑도 있는 법이고
▲ 보일락 말락하는 사랑도 있으며.
▲ 심쿰한 사랑도 있는 법이고
상큼한 사랑도 있는 법이니
▲ '송계삼거리'를 만납니다.
덕주골-덕주사-마애불로 오르면 여기서 만나지요.
▲ 뚜렷한 그리움도 있고
한지처럼 번지는 그리움도 있을 테지.
▲낙석방지용 철책은 마치
비무장지대(DMZ)를 걷는 느낌입니다.
▲ 굳어져서 잘 그려지지 않는 그리움도 있고
굳이 그리지 않고 쓰지 않아도
벅찬, 가슴벅찬 그리움도 있는 법이니.. .
▲ 사랑도, 단풍도, 사람도 각기 다른 개성으로
빛깔을 내고 표현도 하고, 향기도 다르겠지요...
▲ 멀리 금수산 방향의 마루금도
그리움이 되고.
▲ 그 시절 눈보라 속 소나무도
반가이 다시 만납니다.
▲ 아래로는 신륵사 방향에서
오르는 계곡도 봅니다.
▲ 거대한 철 계단이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 어디에 서나 빛나는
강산해의 부회장님.
▲ 월악은 험준하여 정상의 봉우리는 마치 석상을
둘러친듯 바위봉의 연속입니다.
▲ 몇년전 왔을 때의 겨울의 모습.
덕주사에서 보덕암을 거쳐 수산교까지 걸었습니다.
▲ 영봉을 동서로 8K의 송계계곡과
16K의 용하계곡이 쌍벽을 이뤄 넓은 암반, 천연수림이
어우러진 절경입니다.
▲ 한국의 마터호른으로 오르는 길이니
어찌 힘들지 않으랴.
▲힘든 계단을 걷노라면 이런 명상을 합니다
'될 일은 애쓰지 않아도 쉽게 풀리고
안 될 일은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다.'
▲ 삶을 살아가면서 배우는 건,
풀리지 않는 일을 푸는 방법에 대해서도 아니고
안될 일을 되게 하는 법을 아는 것도 아니라..
▲ 그런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래서 순응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것.
.
▲ 그 것이 될 일과 안 될 일의 경계에 선
내 할 일이 아닐런지....
▲ 이제 끝없는 정상도
300m를 남기고.
▲ 월악산(月岳山)은 달이 뜨면
주봉인 국사봉 영봉(靈峰·1097m)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
▲ 힘들게 오른 정상은 절대 눈과 가슴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월악산. 주봉인 영봉(1,097m)을 중심으로
북쪽의 중봉, 하봉으로 이어진 굵직한 바위 능선과
▲ 만수봉, 금수산, 신선봉, 도락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 웅장한 경치를 자랑하는 월악산은
많은 고찰과 문화재까지 두루 품고 있어서
1984년 우리나라 17번째 국립공원이 됐습니다
▲ 북쪽으로 향하면 중봉, 하봉...
그리고 보덕암과 수산교까지 이어집니다.
▲ 따뜻한 햇살,
아름다운 풍경...그 매서웠던 한 겨울 산행를 회상합니다.
▲ 동쪽으로는 신륵사 방향...
가장 가까운 코스지만 신륵사는 승용차만
겨우 오를 수 있답니다.
▲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고
후백제의 견훤이 이 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 이름만큼이나 산이 높고 그 세(勢)가 험악해서
설악산, 치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산’ 중 하나로 꼽힙니다.
▲ 그 높은 곳에서 점심을 나눕니다.
따뜻한 마음을 곁들여서.
▲ 그리고 길을 나서야지...
그 긴 철계단을 아직 내려간게 아니니.
▲ 월악의 천혜의 지형은 예로부터
월악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많았습니다.
.
▲ 지금의 충북 제천, 충주, 단양과
경북 문경 일대를 말하는 중원(中原)!
▲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중원을 장악하는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유 때문입니다.
▲ 근세에도 '동학농민혁명' 때
관군에 패퇴한 서장옥(전봉준의 스승)이
숨어든 곳도 월악산이었고,
▲ 광복 후 빨치산들이 최후를 마친 곳도 이 곳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산 주변엔 많은 역사적 상흔과
전설이 서려있습니다.
▲ 청풍호를 끼고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월악산
▲ 다시 '송계 삼거리'를 만납니다.
▲ 정상 능선엔 단풍이 시작되었지만
더 내려 가긴엔 기다려야 할듯.
▲ 앞에서 본 영봉,
가파른 거대한 하나의 암석덩어리.
▲ 뒤로하여 계단,
'천국 계단' 같은 계단이 이어집니다.
▲ 그래도 고운 단풍이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 사랑하자, 사랑하자
지금.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사랑하자, 지금.
▲ 사랑을 알아볼 수 없는 날이 올거구
사람에게 달려갈 수 없는 날도 곧 올 것이니..
▲ 사랑을 잡을 힘이 없는 날이
곧 오니까.
▲ 월악은 암봉 주위가 10리 길이란 기록이 맞는 모양입니다.
암봉 전체와 청풍(충주호)호를 볼 수 있는 992봉.
▲ 언제나 웃음이 선한
그래서 정겨운, 장수산악회의 하광효 산행대장님.
▲ 처가가 제천인 우리 이성묵 회장님.
그 덕에 '아이스께끼'를 돌렸습니다
오는 길에.
▲ 그리고 필자.
좋은 산을 소개한다는것이
늘 고생을 시킵니다.
▲ 언제나 활기찬, 오솔길의 손순옥 총무님,
시인이면서, 수필, 문학공부에 열중입니다.
▲ 2년간 필자와 복지관 '산야초 교실'의
짝지였답니다.
고향이 청송이라는 것 밖에 모릅니다.
▲ 오늘도 바쁜, 광산 김보이 선생님.
그 분의 헌신과 열정은 늘 모든이들에게 감동이지요.
▲ 여간하여 사진 찍히실 일이 없어
일부러 서 보시라 했습니다.
역전의 '해병대 대위'의 늠름함.
▲ 그리고 늘 인품도 아름다운 장수 산악회 최순임 회장님.
필자의 큰 누님이 '순임'이라서 더 정겹습니다.
▲ 여기서 눈을 돌리면 문경 주흘산, 남쪽으로 만수봉, 포암산
대미산, 다량산, 금수산, 가은산, ...
▲ 투구봉,옥순봉, 구담봉, 제비봉, 황정산,
황장산, 북바위산등이 거침없지만....
▲ 백두대간 길을 포함하여
구분이 어렵습니다.
▲ 하얀 암릉에 노송들이
함께여서 조화를 이루고.
▲ 이제부터 마애불까지
가파른 철계단 연속의 길은 누구나 후들거립니다.
▲ 사랑하자, 지금
사랑할 수 없는 날이 오리니
곧 올 것이니까....
▲ 그리고 걷자, 부지런히
걷는 것도, 아름다운 경탄도 끝이 있는 날이 올 것 이니까.
▲ 굴곡진 산행 길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듯.
▲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은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일 겁니다.
▲ 덕주 공주의 이야기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 탓일까? '그리움'의 단어가 종일
맵돕니다.
▲ '그리다'라는 말은
태어나자마자 부터 눈물을 안고 태어났으니...
▲ 그리, 욺...
당신을 그리워하다, 당신을 그리다가
우는 건가 봅니다.
▲ 그러니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눈물 흘리는 것은 태어 날적 부터의
숙명인가.
▲ 그리움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
심장이 뛰도록 해준 사람이 아닌,
심장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아닌...
▲ 그래도 심장을 녹슬지 않게 만들어 주는 사람,
지금 내 곁에 있는 정겨운 산우님들 이려니...
▲ 엄청난 계단을 걷는 이도
더구나 이 계단을 만든 이들도 참 대단하단 생각도 하고.
▲ 그렇게 도착하면 '마애불'에
도착합니다.
▲ 보물 406호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堤川 德周寺 磨崖如來立像)'
▲ 이 마애불은 터만 남은 상덕주사 화강암 바위에 조각한
높이 13m의 마애불, 얼굴 부분은 조금 부조(浮彫)형식으로
몸통으로 가면서 선각(線刻)만 되어 있습니다.
▲ 그 앞의 은행나무도
전설 하나쯤 간직함직 합니다.
▲♫금강산 천리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블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님의 소식을♪
▲ 주현미가 그리 노래했으니
월악산은 그리움의 산입니다.
▲ 덕주산성...
최근에 복원한듯 합니다.
▲ 덕주사를 세운 것은 신라 진평왕 9년(586)이라고 합니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는 '上덕주사'가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는
'下덕주사'가 있었다고 하니.
▲ 上덕주사는 1951년 불타 없어지고,
下덕주사는 어느때 없어졌는지 기록조차 없다고.
▲1996년 재건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대웅전을 1998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 그렇게 영봉에서 4.9K를 왔고
주차장까지는 1K를 걸어야 합니다.
▲힘들여 오르지 않아도
정상에 선 느낌을 받습니다.
▲ 덕주공주의 그리움이 서린 덕주사.
▲ 덕주사 앞에는 사진과 같은 돌이 세 개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낯 뜨겁지 않은지 '남근석'이라고 명명하고
이 남근석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덕주사의 봉우리가 여자 얼굴 모습이다.
' 또는 '월악산이 음기가 왕성한 산이다.' 등...
그래서 음기를 누르려고 남근석을 배치했다고 ...
▲지리산 같이 흙으로 이루어진 산은 여성의 산이요
그래서 지리산 최고 산신은 '마고할미'인데.
.
▲ 설악, 치악, 월악,등 바위로 이루어진 산은
남성의 산 같은데 음기가 강하다니...
모르겠습니다.
▲ 그렇게 가을은 깊어가고
그리움은 더 해 갑니다.
▲ 덕주사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는
덕주산성 북문....
'동국여지승람' '고려사'에 처음 등장 합니다.
▲ 그렇게 그리운 님들과 함께 걸은 월악의 길.
▲ 동창교에서 출발하여 송계삼거리, 그리고 영봉을 찍고
마애불, 덕주골로 내려온 10여K, 6시간의 길.
▲ 근처 추억이 서린 충주 '수안보'에 도착하여
정을 나눕니다. 즐거움을 나눕니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
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년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정비석이 산정무한에서 그렇게 적은 금강산의 마의태자 묘.
▲ 숲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압니다
초록에도 그린에도
담을수 없는 색깔이 숲에 있다는 것을....
그리운 님들과 함께 걸은 명산, 월악...
당신은 바로 그런 숲 이었습니다.
그리운 산이여, 그리운 님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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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주현미.노래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달아
천년사직 한이서린
1천 3백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블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좀해다오
그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리먼길
흘러가는 저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