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俗離山,1058m]
나에겐 절절한 고향그리움과 어린시절 추억이 묻어나는 가슴 시린 이름이다.
청주에서 보은을 지나 법주사까지, 오늘날 네비게이션은 65K, 1시간이면 닿는다고
알려주지만 어린시절 비포장 그 길은 참 멀고, 힘든 길 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소풍부터, 중학교 시절 1박의 졸업여행, 그리고 그 후 여자 친구만
생기면 시외버스를 타고 법주사를 갔다.청주에서, 서울에서..(손만 잡았음)
비포장 말티고개를 넘어 갈 때는 내려서 버스를 밀고 올라간 적도 있고 주차장에서
‘오리숲’을 지나고, 법주사로 하여 복천암, 문장대-신선대-입석대를 돌아오는
산행의 추억은 지금도 내게는 속리산은 최고로 힘든 산, 최고로 큰 산으로 남아있으니...
산행대장을 하면서 이 고향의 산, 속리산과 그리고 묘봉을 안내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속리산을 가는 산악회를 만나 절절히 그리움이 솟는 그 마음으로 동참하였다.
아련한 추억과 아픔이 있는 그리운 속리산. 법주사
거기를 간다.
속세 넘어 왕이 거닐던 길을 따라서,
▲ '화이트 산악회'와 동행한 날,
설레는 마음으로 경북 상주의 '화북주차장'에서
산행은 시작합니다.
▲ 여기서 바라본 속리산 능선,
그리고 너머 법주사 방향에서 바라본 그 그리운 능선들...
▲ 여러 방향의 그림들이 아름답습니다.
▲ 청주에서 오는 버스도 있고
상주에서 오는 버스도 있네요.
▲ 화북 대형주차장에서
문장대까지는 3.5K, 2시간을 잡아야 합니다.
▲ 속리산은 고운 최치원의 시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에서
그 이름이 연유됩니다.
▲ 존경하는 멘토, 이성묵 회장님과 여러 해를 함께했고
단둘이 동행은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 좌측으로 성불사와 오송폭포가 있지만
그냥 스쳐갑니다.
▲ 백두대간이 지나는 속리산은
우리 땅의 큰 산줄기 13개 가운데 한남정맥, 금북정맥이 가지를 뻗어
김포 문수산까지, 그리고 충남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뻗어가고,
▲ 한강과 금강, 낙동강 세 물 길이 나뉘는 분수령.
최고봉 천왕봉, 문장대, 입석대 등 장대한 바위가 솟구쳤습니다.
▲ 천황봉(1,058m), 비로봉(1,032m), 문장대(1,033m), 관음봉(982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능선이 장쾌하고.
▲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 막바지 2K 길은 여러번 쉬어야 하는
고된 길입니다.
▲ 겨울철 둔한 옷차림은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하고
모양도 나지 않습니다.
▲ 속리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한국 8경중 하나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 어린시절 동네 어른들이
벼르고 별러 나들이를 하면 속리산 법주사를 다녀왔습니다.
▲ 다음 날부터 온 동네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목탁을 들고 나와 놀았습니다.
부자집 아이는 큰 목탁, 가난한 우리는 쪼그만 목탁...
▲ 오르다 힘들면 쉬어가고.
▲ 백일산제단
바위가 돌출해 천장을 이루는 처마바위 쉼터입니다.
▲ 세상엔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우리를 기다리는 좋은 산 들이 많고.
▲ 우리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를 기다리는 좋은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 목놓아 울게했던
삶의 애환의 아픔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는 무뎌지고, 잊혀지고, 견뎌 지는것.
▲ 그러니 실패의 경험도
아쉼의 이별도,
아직도 결별하지 못하고 아파하는 모든 것들.
▲ 산을 찾아 걸으며 훌훌 떨어냅니다
스쳐간 명예도, 돈도, 사랑했던 사람도...
▲ 그렇게 2시간을 땀 흘리면
문장대 입구, 법주사 방향에서 올라온 이들과 만납니다.
▲ 여기서 신선대는 1.1K/
천왕봉은 3.2K 입니다.
▲ 법주사는 5.6K입니다
▲ 문장대(文藏臺)
바위가 하늘을 향해 우뚝솟아 있어서
"항상 구름이 가득 서려있다"고 하여.
▲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흔히 속리산하면 '충북 보은'인데,
문장대는 경북 상주에 속하니 그 주소를 새겼습니다.
▲ 모자를 하나 새로 사봐도
겨울의 차림은 영 볼품없게 합니다.
▲ 단풍의 계절엔 이 계단을
떠밀려 오르고 내려옵니다.
▲ 오르다 바라본 칠형제바위.
▲ 정상엔 세찬 바람이 붑니다.
안내판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 시베리아를 가 본적이 없지만
다들 시베리아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 우측으로 관음봉, 그리고 묘봉
상학봉이 그리움으로 이어집니다.
▲ 앞 삼각봉이 관음봉, 그 줄기로 따라가면
암릉이 일품이었던 묘봉, 상학봉...
▲ 저 아래로는 법주사가
우측 너머로는 낙영산, 도장산, 백악산, 군자산
그리고 대아산까지 그리움으로 들어옵니다.
▲ 좌측으로는 문수봉, 신선대, 입석대
그리고 천왕봉으로 이어지고.
▲기암고봉, 울창한 수림, 깊고 수려한 계곡,
폭포 등의 뛰어난 자연경관
▲법주사를 비롯한 수 많은 문화유적 등이 조화를 이루고
이 일대가 1969년에 국민관광지로,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 저 앞 봉이 천왕봉,
3.2K를 오르내려야 합니다.
▲ 다시 내려와 어느 예쁜 여성분이 사진을 찍어 준다하여
다시 서 봅니다.
▲ 내가 처음 여기를 올랐던 어린 시절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 구름 속에 갈무리 져 운장대(雲藏臺)라 하다가
세조(世祖)가 이 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했답니다.
▲ 그 시절 이 아래엔 거대한 휴게소가 있어
먹고 마시고 시끄러운 잔치집 같았는데
잘 정비 되었습니다.
▲ 문수봉 방향으로 오르다 되돌아 본
문장대.
▲ 이제 우리는 신선대 방향으로
오르내립니다.
▲ 다시 되돌아 본
그리움과 추억의 문장대...
▲ 속리산의 기반암은
화강암·변성퇴적암입니다.
▲ 여기를 올 때마다 만나는 멋진 소나무,
그 힘든 정상의 바람속에 굿굿하게 자람이 사랑스럽습니다.
▲ 지나온 문수봉,,,,.
올 겨울은 어디를 가든지 소담스레 눈 덮힌 모습를
보기 어렵습니다.
▲ 신선대에서 서서
멋진 풍경을 봅니다.
▲ 산행과 씨름은 멘토를 이길 수 없지만
폼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속으로만 그리 생각도 합니다.
▲ 신선대 거기엔 화장실도
휴게소도 있습니다.
▲ 신선대 (1,026m)
백학이 날고 신설들이 노닐었다는 ...
안내석 위치가 영 그렇습니다.
▲ 어떻게 재료들을 지고 올라와
음식을 만들까?
참이슬 5,000원, 캔맥 4,000원....
▲ 이제 우린 능선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진한 아쉼..
▲ 여기 삼거리에서 천왕봉은 2.1K
아래 경업대는 400m, 법주사는 5.1K입니다.
▲ 한참을 가파르게 내려와야 합니다
단풍의 계절은 만산홍엽의 절정이었습니다.
▲ 올려다 본 신선대.
그 시절 그 친구들도 같이 올려다 봤던,,,
저 봉은 나를 기억할까?
▲ 올려다 본 입석대(1,016m)
임경업 장군이 7년 수도끝에 세운 것이랍니다.
▲ 임경업, 광해군때 급제하여 인조반정을 거쳐 이괄의 난,
병자호란등을 거친 명장입니다. 순천의 낙안군수를 지내기도 했고
▲ 병자호란후 모함으로 52세에 죽어
충주에 그 묘소가 있습니다.
▲ 그가 7년 수도했다는 경업대에서
그렇게 사방을 둘러봅니다.
▲ 산은 언제나 그렇게 있지만
그 산을 오르는 인생의 마음은 세월따라
삶의 애환따라 다르게 다가옵니다.
▲ '충북'표시한 트럭만 봐도
고향어른을 만난듯 반가운 내고향 '충북'!
'행복한 산행, 잘사는 충북'일까?
'행복한 보은,
잘사는 충북'일까?
▲ 신선대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철계단.
▲ 절정의 단풍 시절엔
긴 줄의 정체가 심한 곳입니다.
▲ 그 철계단을 내려가기전 우측으로
'관음암'을 갑니다.
▲ 젊은 시절 이 바위틈을 통과 할 때면
갑자기 바위가 붙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 그 속에 약수가 흐르지만
지금은 얼었고.
▲ 그 작은 터전에 세워진 암자
관음암.
▲ 남쪽방향으로
호쾌한 조망은 시원하기도 합니다.
▲ 수천명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겨라....
▲ 저 아래 계곡 끝에
세심정-법주사가 있습니다.
▲ 작지만 아름다운
기도처 이겠습니다.
▲ 거긴 얼마나 추운 바람이 불었던지
볼이 얼얼 합니다.
▲ 먹이를 갖다 놓은 걸 보면
늘 여기서 사나 봅니다.
▲ 같이 걷던 그 시절, 그 친구들..
어느 골에선가 나처럼 세월의 나이를 먹어 가겠지요.
▲ 그리고 한참을 내려오면
겨울엔 비어있는 금강골 휴게소.
▲ 그 시절이 그립고
서러운 옛 추억이 밀려옵니다.
▲ 그 추억의 '금강골', 돌고 돌아
내려옵니다.
▲ 화강함 그리고 변성퇴적암이란 설명을
실감 합니다.
▲ 이 계곡의 단풍 시절엔
정신이 혼미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선비들의 별서정원이 떠오르는 비로산장
고 김태환 씨가 지은 개인 산장으로, 52년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은 대를 이어 가족이 운영합니다.
▲ 바람 좋은 계절에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계곡 물소리 벗 삼아 하룻밤 묵어가고 싶습니다.
▲ 속세를 떠나는 속리산 이름처럼
어느 날 삶의 모든 시간을 로그아웃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 그렇게 내려서면 세심정.
문장대에서 중사자암,냉천골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과 만납니다.
▲ 어려웠던 13세기
골마다 수행하는 자, 고승, 도인들이.
▲ 이 절구로 하여
한 그릇 밥을 얻었겠지요.
▲ 좌측은 문장대에서 냉천골로 내려오는 길,
우측은 방금 내려온 금강골 길.
▲ 여기서 부터 법주사까지
'세조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 여기는 세조가 목욕하다가
월광태자를 만나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 세심정 위엔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났다는 시원한 '복천' 물맛의
복천암이 있습니다.
▲ 겨울은 그렇게
식수원 저수지도 꽁꽁 얼리고.
▲ 이 호젓한 세조길은
최근에 조성되었습니다.
▲ 곳곳에 세조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을 설명합니다.
▲ 눈섭바위... 어디가 그런지 잘 안보입니다.
▲ 법주사((法主寺/사적 명승지4호), )
553년(신라 진흥왕14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 국보와
사천왕석등, 대웅전, 원통보전, 마애여래의상, 신법천문도병풍.. 보물등
문화재가 많습니다.
▲ 2층 대웅보전, 보물 915호입니다.
6학년 국민학생시절
처음 감격으로 봤던 그 건물, 국보, 보물들..
▲ 쌍사자 석등, 국보 5호입니다.
그 시절엔 누각이 없었지요.
▲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등 7곳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란 이름으로 등재를 결정했습니다.
▲ 쌀 400가마로 밥짓던 대형 쇠솥
보물1413, 어린시절 봐던 그 모습 그대롭니다.
▲ 법주사 석련지
국보 제64호입니다.
▲ 당간지주...
내고향 청주에도 옛 '청주극장' 광장에
이 문화재가 있습니다.
▲ 추래암
제 어릴적에는 저 위에 500년된 작은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 그 옆에 미소짓는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보물216호입니다.
▲ 속리산은 법주사의 문화재뿐 아니라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과 속리산의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 어린시절 단체사진 찍던
일주문 '호서제일가람'.
▲ 주차장까지의 '오리숲(2K)
추억과 행복의 길입니다.
▲ 그 시절 '속리산관광호텔' 앞의 소나무 숲..
레이크힐스 호텔로 바뀌었지만
소나무는 그대롭니다.
▲ 추억이 서린 아름다운 법주사 그리고 속리산..
그렇게 하루 해가 찬바람과 함께 저물어 갑니다.
▲정이품송 [正二品松.천연기념물 103호]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조의 이야기와 함께
수령 600여년 지났지만 세월엔 장사가 없는듯 우람한 모습은 잃었지만
여전히 속리산의 상징입니다.
▲ 속리산을 가려면 비포장 12구비 '말티재'를
차에서 내려 차를 밀면서 넘어야 했습니다.
포장되면서 많이 길이 넓어지고 구부러진 길이 바로 서더니
최근엔 터널이 생겨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 그렇게 며칠전부턴 설렘속에 기다렸던
내 고향 충북의
속리산,법주사 산행길...
다시금 아픈 추억을 남기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온 하루.
내 고향, 속리산...
영원히 거기 그렇게 있을 것입니다
추억과 그리움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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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힌 산길에서 / 정희성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히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깊이 사랑을 새겨 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