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충북, 그 북쪽 '제천'에는 ‘금봉이’사연이 아픈 반야월의 ‘울고넘는 박달재♪’의 ‘박달재’의
고장이다. 그 마루턱에서 제천을 향해 왼쪽으로 10여리 가면 산골짝 지형이 배를 닮았다하여
이름 붙인 ‘배론’(舟論))이 있다.
지난번 ‘다산’을 소개하면서 그의 맏형 ‘약현’이 사위 둘과 함께 처형되었고 그 사위중 하나가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의 ‘황사영’이라고 소개했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26세에 서소문밖에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고, 그 부인과 아들은 노비가
되었는데 ‘배론’은 그 백서를 쓴 장소다.
70여호의 가구가 옹기 굽던 깊은 산속의 음울한 곳, 이 곳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도들의
마을이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토굴속에서 청나라 주교에게 호소문을 써 보내다
발각되어 ‘능지처참’된 ‘황사영 백서(帛書)’의 현장이 되었다.
‘황사영(黃嗣永)’
1775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다산의 형 ‘약종’을 사사(師事)하여 약관16세에 진사합격을 하였고
‘정조’가 특별히 불러 격려하며 손을 잡아주자 임금과 잡았던 손에 비단을 감고 다녔단다.
촉망받던 그는 명문가 다산의 맏형의 사위가 되고 다산의 조카사위가 된거다.
그는 다산의 집안을 통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모진 박해에도 신앙을 굳게 지켜 청나라에서
파견 온 ‘주문모(周文謨)’신부의 측근으로 활동 하기도 했다
교세가 폭발적으로 늘어 1만명의 교세로 확장되고 천주교를 용인하던 재상 ‘채제공’도, ‘정조’도
타계하자 노론 벽파의 주도세력이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여 300여명의 신도가 순교하였는데.
주문모 신부는 잡혀 효수되고, 이승훈, 정약종등 6명은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유배, 사사되었다.이른바1801년 ‘신유사화(辛酉士禍)’이다.
황사영은 상복으로 위장하고 겨우 배론으로 피신, 웅기굽던 토굴에 숨어지내며 백서를 썼다.
이 백서는 길이 62㎝, 너비38㎝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 먹으로 깨알 같은 글자로 쓴
1만3311자의 편지형식이다.
극심한 불안과 토굴속에서 7개월 동안 쓴 이 편지는 당시 청나라 북경교구장인 ‘구베아(Gouvea)'에게
보내는 장문의 호소문이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청나라 신부 ‘주문모’의 처형과 신유박해의 실상,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실태에 대한
고발이고.
두번 째는 조선에서 천주교 부흥을 위한 방안인데 외국군대가 쳐들어 와야만 구제될 수 있다면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선으로 하여금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하거나, 군함과 군대 5,6만을 보내서 이 박해를 멈춰달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다급한 심정으로 쓴 이 문장으로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황사영과 천주교의 도덕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황사영은 이 편지를 북경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 편에 보내려 했지만 발각된다. 토굴 속 황사영은
잡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 처참되는데. 그의 나이 26세 때다
그의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아내와 아들은 귀양갔다. 아내 정명련은 제주의 관비가 되어
제주로 가는 배에서 2살 아들을 노비가 되지 않도록 추자도에 내려놓고 갔다. 생이별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백서를 1/10로 축소, 가짜 백서를 만들어 청나라에 제출했다. 천주교도들이
서양군대를 끌어들여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다고 한 나쁜 무리임을 물증으로 사용한 샘이다.
진짜 백서는 의금부에 압수 보관하다가 9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갑오개혁 때, 옛 문서를 파기하면서
조선교구장 ‘뮈텔’주교가 인수하였고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 원본은 로마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이 전시될 때마다 천주교도뿐 아니라 관람객들은 그 내용보다도
그 깨알 같은 글씨를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한다.
오늘 날 그 배론은 천주교 성지가 되고, 수녀원, 신학교가 세워지며 ‘황사영 순교현양탑’등 여러
기념관들이 들어서 기념된다
그런 아픈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도, 최근의 민주화 투쟁과정에도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선 자리, 우리의 오늘은 이런 아픔의 터전 위에 이어간다.
강진(康津)’!
18년 다산의 유배와 그를 둘러싼 형제들, 그리고 조카사위 황사영을 생각하며 만덕산의 반대쪽
덕룡산, 주작산을 걷는다
처연한 상념을 가지고....
언젠가 제천지방의 산을 갈 기회가. 되면 반드시 들려보고 싶다 ‘배론성지’...
이 산행후기의 끝에서 ‘신경림’의 황사영 부부의 아픔을 읊은 시를
‘다시 남한강 상류에 서서’를 옮겨본다
▲ 화사한 봄 날
정겨운 님들이 '소석문'에서 시작합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도암초등학교와 도암중학교 사이로 난
'봉황로'를 따라 1.5K오르면 소석문이 나오고..
▲ 작은 아치형 무지개다리를 건너
곧바로 가파른 등로가 시작됩니다.
전국의 산객들로 정체됩니다.
▲ 오르다 디돌아 보면 '석문산'이 보입니다.
두 주전 저 산 너머, 석문교 하늘다리로 시작하여
'만덕산'으로 걸었습니다.
▲ 앞에는 어느새 경사가 큰 암반으로 이어지고
바닷가 특유의 날카로운 암석과 쇠창살 같은 바위가
하늘을 향합니다.
▲ 밧줄을 양 다리 사이로 하여 매달려 오를 때
뒷 사람이 키가 큰 사람이면 큰 일 납니다.
어딘가 심하게 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저 아래 출발지 소석문이 보이고 그렇게
네 발로 기어 올라옵니다.
▲ 우편에는 '봉황저수지'가 거대합니다.
우측으로 난 도로가 '봉황로'입니다.
▲ 정체되어 '가다서다' '가다 서다'가
자기 페이스대로 걷는 것 보다 갑절 힘이 듭니다.
▲ 종일 궁금했습니다. 덕룡산, 주작산 능선 길에
오르내려야 할 봉들이 몇개나 될까?
아마 30개는 넘지 않을까?
▲ 되돌아 봅니다. 바로 앞이 석문산 그 너머로 만덕산 줄기의
오르내림이 계속되고 그 마지막 솟구침이 만덕산이고 그 우측이
다산의 유배 길이 있는백련사, 다산초당, 다산기념관이 있습니다.
▲ 그 만덕산 너머로 강진만이 깊히 들어와 있고
저 너머는 고려청자 도요지로 유명한 칠량면 입니다
▲ 웅장하면서도 창끝처럼
날카롭게 솟구친 암봉의 연속 입니다.
▲ 가야 할 동봉과 서봉은 저렇게 멀리 있고
수없이 오르내려야 합니다.
▲ 나도 노란색 옷을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뭐라나? 자기들은
문자를 주고 받은게 아니고 '텔레파시' 라던가?
▲ 되돌아 보면 벌써 많이 오르내림이
아득함으로 보입니다.
▲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가
그러다가 힘들면 잠시 이렇게도 쉽니다.
소리가 들리지요
'아이구 죽겠다'
▲ 다산 선생도 이 길을 걸었겠지요
그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데모시절 불렀던
'얼마나 이 길을 걸어야 이 길이 끝이 나나...'
다산의 18년 세월 마음도 그랬겠지요.
▲ 한 주간 만에 산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노랑섞인 연두로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 예쁜 '보라돌이' 님과 사진좀 한번 찍어 보려했더니
눈치없는 불청객들이 꼭 붙습니다.
키들이나 크지 말든지, 얼굴이나 좀 빠지든지...
필자는 이래저래 기 죽습니다.
▲ 아직 숲이 생기기 전의 봄 산행은 뜨겁고
물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 다시 되돌아 보면 만덕산은 아련하고 그 너머로
강진읍이 보입니다.
▲ 암봉과 임봉은 이어지고
그 오르내림은 대 서사시의 파노라마를 보는듯 합니다.
▲ 그래도 남아 있는 진달래가 아니면
무슨 응원을 받아 이렇게 오르내릴 수 있을까요?
▲
'너의 연분홍 미소만 보면
애써 묻어둔 유년의 기억들이
독새풀처럼 돋아나
가슴이 온통 그리움으로 회오리친다.
..
권오범 시인의 시 일부입니다.
▲ 진달래를 보면 어릴적 추억,
배고프던 그 시절, 그 친구들과 무던히도 많이 따먹던
그리움이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말을 꺼내면 너도나도 공감합니다.
▲ 우리나라 진달래 5대 명산은 어디일까요?
비슬산, 천주산, 고려산, 그리고 여기 덕룡산, 주작산 이랍니다.
영취산, 대금산, 황매산은 어쩌구....
▲ 몸으로 오른 봄 날의 암릉 길에서
살아있음의 감동을 느낍니다.
▲ 아득합니다
다시 저기를 어떻게 오를까요?
▲ 그래도 일렬로 서서 잘들 넘나듭니다.
구부리고, 기고, 옆으로 포개고..
▲ 가끔 쇠 손잡이와 밧줄을 의지하여
오르고 내립니다.
▲ 경사진 암릉 길에
오직 의지할 것은 밧줄 뿐입니다.
▲ 고도를 높일수록 길은 더 험해지고
긴장감은 더합니다.
좌우로 아직 초록으로 영글지 못한 연두빛이
아름답습니다.
▲ 다시 되돌아 땅끝 기맥 줄기를 봅니다,
석문산, 만덕산...그 줄기...
▲ 전라도 지방을 올 때마다
넓은 들녘에 감탄합니다. 참 좋은 고장입니다.
▲ 이제 동봉에 올라섭니다.
겨우 3K를 오는데 두 시간이 걸린듯 합니다.
▲ 거기서 인증샷을 남기지만
'장수'의 장날에 이런 펼침막은 좀 미안하기도 합니다.
▲ 다시 길을 나섭니다
저 멀리 해남의 대흥사로 유명한 두륜산도 보입니다.
▲ 통과 테스트 기계 같습니다.
여기를 바로 통과 했다면 날씬한 몸이 겠지요.
가끔 걸리기도 합니다만
그거야 배낭 때문이겠지요..
▲ 바위를 부둥켜 안고 돌아서면
다시 내려서고..
▲ 가야할 길, 봉황인가 룡의 등줄기 런가?
설악의 용아장성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 다시금 경사 끝 암반길이
아름답습니다.
▲ 힘이들면 시 한귀를 읊조립니다.
'산에가면 난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하고 같이가면 더 좋을네라만..'
▲ 어찌 단풍든 산만 좋겠습니까? 눈오는 솔밭 길도
갈대 나무끼는 설산도, 진달래 만발한
오늘 이 길도 ..
고운 님 함께라면 세상은 어디든 천국이겠지요.
▲ 꿈틀거리는 산새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따르다 보면 진정 살아 생동함을
환희로 느낍니다.
▲ 나무, 바위.. 사람들이 건들지만 않는다면
태어난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겠지요.
▲ 여기를 바라보며
지리의 연하선경 길 같다고 느꼈습니다.
▲ 서봉.
덕룡산의 주봉(433m)입니다.
덕룡산 기슭 중앙부에는 커다란 천연동굴이 있어 "용혈'이라고 한다는데
한 줄로 이어져 가는 산행 길에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
▲ 그렇게 날카롭고 가파르게 서봉을 내려서면
아주 잠깐 안연한 바람고개 같습니다.
▲ 거기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나눕니다.
▲ 그 귀절이 생각납니다.
나무는 공부도 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지도 않고
태어난 자리에서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들이 찾아온다고...
저 멀리 어디를 바라보는걸까요?
▲ 다시 길을 나섭니다.
초록치마를 펼쳐입은 듯 화사한 산새...
▲ '주작'은 상서로움의 상징이자 상상의 새로 알려진 '봉황'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좌청롱, 우백호,
그리고 북현무와 '남주작'이라 하지 않습니까?
▲ 덕룡산이 열정적인 태양에 비할만한 골산이라면
주작은 부드러운 달빛에 비할 육산일까요?
▲ 저 봉이 첨봉인 모양입니다.
오늘 최고의 진달래 풍경을 보여줍니다.
혹, 숨을 들이키고 스톱 한건 아니겠지요?
뱃살의 양호함이...
▲ '수채화'가 이런건가보다
대자연의 빛깔에 활홀 해 합니다.
▲ 여기서 수양마을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 저렇게 올라 앉아 그 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냅니다.
이룬것 없는 생이 부끄러워집니다.
▲ 지나온 길....멀리왔습니다.
▲이제 이 암릉길만 지나면
주작의 길이 저렇게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봉황의 화려한 날개일까요?
▲ 오늘 산행길은 인생길 같습니다.
올레길도, 게곡도 있고, 또한 공룡 등줄기 같은 바위와 억새평원도 있고...
산죽의 밭을 지나기도 합니다.
▲ 어디서 이런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 힘들게 오르고 나면
도드라진 바위에 압도 되고..
▲ 소금강이라 부르면 좀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냥 '남도의 금강'이라면 타당하겠지요.
▲ 왜 안치환이 꽃보다 사람 이라고 노래했는지
조금 알듯합니다.
▲ 모든 외로움을 이겨낸 사람은
아름답다는 걸까요?
▲ 인공적 예술가 뇌라서
이렇게 빚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월을 몸으로 지나온 모습에서
차라리 거룩성을 느낍니다.
▲ 창끝 이런가!
가고자 하는 꿈의 의지이런가!
▲ 다녀온 길인지
나아갈 길인지 그져 혼미 할 따름입니다.
▲ 대만의 '야류지질공원'의 여왕머리바위가
생각났습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단단한 바위도
이리저리 깎아 내는가 봅니다.
▲ 꽃들은 마지막까지
혼미하게 합니다.
▲ 오늘 제일 바람좋고
동백나무 그늘 아늑한 곳에서 한 잔씩 나누니...
그 기쁨은 배가 됩니다.
▲ 저 능선따라 꽃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정체의 길일까 오르내림의 탓일까?
몸도 마음도 시간도 이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 마지막 까지 첨탑 같은 바위들
기기묘묘 합니다.
▲ 신문사 정원에 세우면 딱 좋은
펜의 조형물 같기도 합니다.
▲ 이제 우리는 '수양마을'로 내려가려 합니다.
그 길은 2.2K.
마음모아 다시 서 봅니다.
▲ 정현종 시인이 그랬습니다.
나무들은 난대로가 그냥 집 한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 지를!.
▲ 그렇게 포근한 길 내려서면 수양마을....
그 넓은 강진만을 바라보며 평화롭습니다.
▲ 바람따라 들 길을 갑니다.
밀밭 사잇길을 걸어 봄 날의 그 길을..
▲ 오늘 종일 넘나든 뫼들...
우측에서 좌측으로 그리 걸었습니다.
▲ 그렇게 내려선 수양마을..
덕룡, 주작산을 평풍처럼 휘두른 그 좋은 마을이
오래오래 하나된 마음으로 하나된 마을로
풍요가 넘치기를 빕니다.
▲ 18년 다산의 유배길은 이 마을에도 이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남도 1번지 강진....
▲ 그렇게 내려 와 만덕산 출발지 석문공원 주차장에서
새콤한 무침으로 한 잔씩 하시니 즐거움이 더합니다.
헌신적인 분들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 거기서 머문 정겨운 님들과의 하루 ....
저물어 갑니다.
또 다른 추억과 그리움을 새기며..
▲ 3년전 아픈 역사가 된 세월호,
오늘 3주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 우리사회의 갈등과 이념의 상징이 되어
안타깝지만
오늘 하루, 마음모아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께 위로를, 그리고 미귀환 아홉 분도 다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 남도 1번지, 다산의 유배길이 아픈 강진군,
오래오래 풍요로운 고장이 되기를 또한 기원합니다.
▲ 서두에서 소개한 아픈 역사 '황사영백서사건',
황사영이 이 토굴에서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 길이 62㎝, 너비38㎝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
먹으로 깨알 같은 글자로 쓴 1만3311자의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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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 - 신경림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부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리라 한다
궃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山行..그리움따라 > 전라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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