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전라도

전남 강진.만덕산(석문교구름다리→290봉→암릉→바람재→만덕산 첫봉→갈림길→만덕산정상→백련사(7K.4시간)

산꾼 미시령 2017. 4. 2. 22:25

(康津)’

유홍준이 남도답사1번지라 칭한 이래 누구나 가보고 싶은 고장이 되었다

비취빛 청자와 더불어, ‘다산(茶山)’하멜’(H.Hamel), 그리고 모란이 피기 까지는..’

영랑를 그리며...

 

 짧은 지면이지만, 강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인물,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다시 이야기 해 보려한다...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정치, 경제, 과학, 농학등 다방면으로 천재였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가 죽은 후, 집권층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집안전체가 참수’,‘능지처참’,‘유배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벼랑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죄라면 단지 열린사회를 지향했다는 것으로 닫힌시대, 증오의 시대의 기득권층 미움으로

철저하게, 그야말로 한 인간과 집안을 이 이상 처절하게 멸절 시킬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다산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다산은 5형제중 4째였다.

맏형 약현은 그의 사위 둘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그 사위중 하나가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이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26세에 서소문밖에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고,

그 부인과 아들은 노비가 되는데. 황사영은 훗날 소개 할 기회를 기대 해 본다.

 

 네 살 많은 둘째 형, 약전16년을 유배생활을 하다가 흑산도에서 숨을 거뒀다.

다산의 나이 마흔에 두 형제가 함께 귀향길에 올라 동생은 낯선 적소 강진에서,

형은 그 보다 더 먼 바다너머 흑산도에서, 각기 저 멀리 가몰 거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워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형이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부음을 받던 날

강진의 53살 동생은 통곡하였다.

 

술에 취해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그 통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네

(醉登北山哭 哭聲干蒼穹)

 

 3째 형 약종신유박해때 장남과 함께 처형되었고, 그 부인과 차남, 딸은 기해박해

처형되어 온 식구가 멸절 되었다.

 

 이뿐아니다 다산의 매형 이승훈은 목을 자른 것으로 모자라, 턱뼈도 부서져 없어져 버린

상태로 처형되었는데 경기 광주 천진암천주교 성지에 묻혀있다.

 

 이처럼 천재집안의 형제들이, 단지 열린사회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고 처절하게

멸절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18년의 우배생활에서 우리민족에게 5백 여권의 저술로 화답했고, 흑산도의 형,

약전자산어보등 수십 권의 저서를 남긴다. 이들 천재 형제들이 보여준 학문적 진취와

스스로 제물되어 새로운 신앙세계의 문을 열어준 정신은 오래오래 추앙받아 마땅하리라..

 

 다산의 학문적 깊이와 백성을 사랑한 정신은 시대와 국경을 추월한다.

베트남의 혁명영웅 호치민은 자신의 관속에 목민심서를 넣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마흔에 유배생활을 시작하여 18년후 된 다산은 다행이 57세에 플려나 고향 경기도 남양주의

마재로 돌아갔고 그의 나이 74세에(1836),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나와 다른’ ‘기득권 층과 다른사상을 용납하지 않는  닫힌시대의 무게는 누군가의

어깨 위에 짐으로 지워진다.

 

 나의 오랜 꿈중 하나는 다산의 책을 더 깊히 읽고, 경기의 남양주 능내, 전남 강진, 수원 화성,

그리고 황사영의 성지 충북 제천의 배론, 경기 천진암 성지와 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등을

반드시 답사 할 예정이다.

꼭 그런 기회가 오기를...

 

 그가 머문 자리에 아름다운 길이 있다. 초당에서 백련사를 연결 하는 800m짜리 오솔길은

다산의 길이다.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백련사 학자승 혜장과 교유했다.

 

 혜장과의 인연은  실학과 불교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그들이 머문 이 길은

구도의 길이자 철학의 길이다. 가끔 만덕산에도 올랐을 것이다.

어느 시기엔가는 가깝게 보이는 명산 월출산에도 초의선사와 같이 올랐다.

 

 다산의 숨결이 있는, 18년 유배생활중 무수히 그도 올랐을  만덕산거기를 간다.

아프고 쓰린 다산을 기억하며,

그립고 정겨운 님들과 같이...

 

▲ 토요일 오후, 헐!  

예약한 산악회가  갑자기 취소되고

급하게 구한 어느 산악회는

1시간이나 늦게 출발하여

11:30 되어 내려놓고는 4시간만에 백련사 주차장으로 오랍니다.

 

▲ '다산 유배길'를 걷지 않으면 무슨 의미,

융통성없는 산악회는  다산전시관쪽으론 버스를 댈 수 없다니

택시라도 이용해 보려고 급하게 서둘러 나서 봅니다.

 

▲ 석문공원도 둘러볼 겨를이 없고 ..

새로 설치된 '석문교구름다리'를 건넙니다.

 

▲ 그래도 땅끝기맥을 이 다리라도 이으니 잘 설치된거고

용문사 뒤로 오르던 길 대신 이 길로 모두 오릅니다.

 

▲ 거리가 짧다고 안도 했으나

그 길은 오르내림이 심하고 아직 등로, 계단등 시설이 미비하여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 뜨거운 햇살, 힘겹게 오르다 되돌아 봅니다.

방금 건넌 하늘다리, 그리고 석문산이 보입니다.

저 봉 너머엔 석문호가 있을텐데...

 

▲ 길은 험하고 가파릅니다.

만덕산은 수림은 울창하지 않고,

나무들은

가난한집 보릿고개 겨우 넘긴 아이처럼 작고 비쩍 말랐습니다.

 

▲ 지난 주에는 한 겨울같은

 눈 속을 걸었는데

오늘은 초여름 날처럼 긴 옷을 자꾸 걷습니다.

남쪽 땅끝이니...

 

오르내림이 심하니

산 높이에 비하여 여러 산을 오른듯 힘이 듭니다.

땅끝 기맥 종주길이니..

 

▲ 만덕산은 400m대로 낮은 산이지만

크고 작은 암봉 7-8개를 넘나들어야 합니다.

 

▲ 용문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3거리...

이제 겨우 600m를 온 것입니다.

 

▲ 그래도 아기자기한 암릉을 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 끝없이 오르내립니다. 작지만 옹골찬 산입니다.

닿은 곳마다 천혜의 조망처이니

따로 조망바위니, 조망처이니 ..

표시가 필요 없습니다.

 

▲ 강진만이 보이고 벌써 여기 저기

점심을 먹습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 강 같이 길게 강진읍 방향으로 들어온 강진만

그 너머로 고려청자 도요지로 이름났던 '칠량면'이 보입니다.

 

▲ 김훈은 강진만의 산과 바다를

 '따뜻한 요니처럼 조붓하고 아늑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 힘들게 오르면 포근한 길도 있고

진달래등 갖가지 꽃들이 아름답습니다.

 

▲ 흠뻑 땀을 흘리면 다시 바람 시원한 곳을

만납니다. 이제는 전문 산꾼 모양. 엄청 속도가 빠릅니다.

 

다산(茶山)도 이 길을 걸었을까?

가슴 뜨거워 집니다.

 

▲ 그가 태어난지는 250년이 넘었고

그가 18년동안 유배되던 만덕산은 이렇게 남았습니다.

 

▲ 아 이제 저 앞으로 만덕산...

그러나 

가까운듯  저 길이 그리 오르내림이 심합니다.

 

▲ 여러번 '이 건 내려가는 길이 아닌가? 잘못 방향의 길을 들었나?'

그럴만큼 방향도 휘어지고,

   오르내림도 심합니다.

 

▲ 다산은 이 만덕산과 초당에 묻혀서 복사뼈가 문들어 지도록

학문에만 열중해서

 '몸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을

남겼습니다.

 

그 모든 책들이 오직 애민사상, 백성을 사랑한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가 위대한 까닭은 가난한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먼저 보살폈다는데 있고

위정자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은 삶을 보여 준데 있습니다.

조금 너른 공터에서 지난 주 함께 했던

'우리들산악회' 총무님과 그 '일당'들을 만나니

점심이

봄 햇살, 포근한 바람과 함께 많이 시끄럽습니다.

 

▲ 오늘 등로는 거의 이정표가 아쉽습니다.

이제 3K정도 온건데

 수십여리는 걸은듯 합니다.

 

▲ 아 이제 만덕산이 코앞인가?

그러나 깊은 오르내림 서너개가 그 뒤로 숨어 있습니다.

 

▲ 바람재(240m) 사거리에 닿습니다.

유독 바람이 센 고개일까요?

 

되돌아 봅니다

진만을 따라 서남쪽으로 땅 끝까지 구부렁구부렁 이어지는 걸출한 기맥,

 기묘하고 수려한 산맥의 첫머리에 만덕산.

이어 공룡의 이빨을 닮은 산 덕룡산,

대흥사와 아치형 구름다리가 있는 두륜산,

 봉황의 산 주작산(朱雀山, 475m), 미황사가 있는 땅끝 달마산

고구마줄기처럼 엮인입니다

 

▲ 정상인줄 알고 오르지만 아직 아닙니다.

암릉 사이로 깊게 내려가 다시 휘돌아 올라야 합니다.

 

▲ 이 바위는 강진만 반대쪽을 바라봅니다.

 월출산이 그리웠을까요?

조금은 이스터섬의 석상같습니다.

 

▲ 정상 방향으로 건너다 봅니다.

만덕산은 재와 산의 경계가 확연하여

벽같이 곧추선 바위틈으로 올라야 하는 산임을

이제 알겠습니다.

 

▲  정상으로 알았던 암봉,

조망이 정상보다 더 좋은듯 하여 시간을 내 봅니다.

 

▲ 건너다 뵈는 저 봉이 정상인가?

 아닙니다

다시 저리 올랐다 깊히 내려서고

다시 올라야 하지요.

 

▲ 강진만,

그리고 아련한 봄 날의 산 그리메 실루엣 앞에 

필자도 서 봅니다.

 

▲ 이제는 산행뿐 아니라 포토 자세도

필자를 능가합니다.

모두들..

 

▲ 되돌아 오는 길에 만난 작은 소나무...

힘겨워 보여 아픕니다.

 오래오래 잘 자라기를 바래봅니다.

 

▲ 다산은 백련사의 '혜장'을 만나 오래 교류했습니다.

같이 만덕산도 오르고,

어느핸가는 초의선사와 함께

저 멀리 월출산도 올랐습니다.

 

▲ 그래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은 다산과 혜장이 교류한

철학의 길입니다. 두 천재는 유배와 방랑의 언저리에서 서로를 갈망하며

신학문을 추구했습니다.

 

▲ 마당봉 이랍니다.

어느 분의  정성이 귀해 보입니다.

 

▲ 이제 정말 정상이 보입니다.

한번더 깊게 내려가야합니다.

 

▲ 여기서 깃대봉은 가마득한 500m,

그냥 다산초당 방향으로 내려들 갑니다.

 

▲ 마지막 힘을 내 봅니다. 다산이 흑산도에 유배된 형 '약전'을

한없이 그리워하며 눈물로 바라봤을 터 입니다.

 

▲ 되돌아보면 방금 다녀온 봉들이 '참 멀리 왔다'

싶습니다.

 

▲ 저렇게 정상은 마지막 인내를 요구합니다.

 

 

▲ 힘이들면 되돌아 서서 숨을 고릅니다

다산도 이랬겠지요.

 

만덕산(萬德山·408.6m) 깃대봉.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소중한 님들과 서 봅니다.

 

▲ 여기서 땅끝 기맥은 필봉으로 이어지고

백련사까지는 750m,

가파르게 내려가면 됩니다.

 

▲ 그 강진만 끝으로 강진읍이 자리합니다.

 

▲ 북쪽으로는 멀리 월출산이 아련합니다.

다산도 여기서 월출산을 그리워 했겠지요.

 

▲ 만덕산 깃대봉,

청렴봉으로도 부른답니다.

 

▲ 이제 백련사로 내려섭니다.

가파른 그 길을 갑니다.

 

▲  다산초당길을 포기해야만 하는 시간,

아쉽기가 그지없습니다.

 

▲ 그냥 이 길에서 다산의 향취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18년의 유배생활, 풍찬 노숙의 다산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니...

 

▲'백련사'

통일신라말 839년에 창건되고

고려때 불교자정운동의 하나인 '백련결사의 요람'이랍니다.

 

▲ 융성했던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의 억불로 쇠퇴하다가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이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이 곳에 오면서 다시 융성 했습니다.

 

▲ 효령은 여기서 8년을 거쳐했고,

이 대웅보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인데

술 취해 쓴 것 같이 삐뚤삐뚤하여 일명 '취서체'로 부릅니다.

 

▲ 그 뒤로는 동백숲을 이룹니다.

이 동백림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다산도 가고, 혜장 스님도 가고

세월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 대웅보전 앞의 만경루...

아담한 배치는 아니지만 크도 작도 않은 규모로

만덕산 기슭 남향으로 자리합니다.

 

▲ 가장 안쪽의 배롱나무도 아름답고

승주의 선암사 못지않은

정갈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는듯합니다.

 

▲ 이제 우측의 다산초당 길,

그 꿈 같은 길을 포기하고

서둘러 내려가야 합니다.

뜰 앞의 우람한 배롱나무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줍니다.

 

▲ 우측 동백림 그 길로 가야 하는데...

택시로라도 되돌아 올 한 시간이 아쉽고,

 

융통성 없는 산악회의 배려가 분노로 남습니다.

 

▲ 이미 4시간이 다 찼고,

강진만을 바라보며 100m 주차장으로 향합니다.

 

▲ 포기하고 나니 더 사뭇 아쉬운 다산초당의 길....

깃대봉을 포기하고 저리로 다녀왔어야 했을까?

아주아주 아쉽습니다.

 

▲ 언제 한번 다시 강진을 찾아

영랑생가도 돌아보고,  다산 초당의 길을 꼭 돌아봐야 할듯합니다.

머지않은 날에...

 

▲그렇게 아쉽고도 아픈 하루가 가고

 

▲ 다산 초당, 다산 기념관, 다산수련원등을

안내도로 봅니다.

 

▲ 가보지 못한 다산초당..아쉽게 사진을

옮겨봅니다.

 

▲ 다산의 단순 명료한 그 글씨도 아쉽고...

 

 

▲ 그렇게 '남도답사일번지' 강진 땅.

남도의 끝자락 만덕산 기슭에서 머문 하루...

 

다신의 위대한 업적이 세월을 뛰어넘어 민족의 자랑으로 남은 땅...

낮지만 암릉 오르내리며 만킥한 조망의 즐거움이 오래오래

추억이 되겠지요

 깊은 아쉼움과 함께...

...........................

 

 

뿌리의 길/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