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南九萬)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지 않는가?.
약간 촌스럽기도 하지만, 우리와 동시대 사람의 이름인 듯 정겹다
그러나 이 이름은 우리 모두의 동심의 세월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구나 옛 시조하나 외워보라 하면 우린 ‘태산이 노다하되....‘
아니면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누구나 줄줄 외워간다...
남구만은 이 시조를 쓴 인물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그는 지난 주 소개한 김만중과 동시대 인물이다.
대제학을 지낸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른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화를 입어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
약천은 숙종 당시 격동의 정국을 이끌다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강릉에 유배 되었을 때 지금의 심곡마을에서 ’ 동창이 밝았느냐...‘
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심곡마을에는 남구만의 호와 같은 약천(藥泉)이란
샘이 있어 더욱 정겹고 친근감이 간다. 시조에 등장하는 ‘재넘어’와 ‘사래긴밭(장밭․長田)’이
실제로 소재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에 반한 마을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 있고.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동해휴게소 한 켠엔 그를 기리는
시조비가 1994년 건립돼 잊혀져가는 남구만과 동해의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그가 남해를 다녀갔다.
1679년 남인들의 횡포를 상소하다 역풍을 맞아 남해에 유배된 그는 망운산과 금산에 올라
절경에 심취한 뒤 <제영등망운산(題詠登望雲山)>,<제영등금산(題詠登望錦山)>, 를 남겼다.
‘넝쿨을 휘어잡고 바위를 기어올라 산정에 오르니/
과연 망운이란 이름이 잘 붙여졌음을 알겠구나/
백성들이 성은을 입어 요민(饒民, 살림이 넉넉한 백성)
못지않게 행복한 것을 보니/
이 천한 몸도 몹시 고향 땅이 그리워지는 구나’
200여명의 유배객들의 한과 눈물이 배어 있고
충무공의 마지막 숨결이 들리는 남해,
5월이면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남도의 철쭉 산
‘망운산(望雲山·786m)’ 거기를 간다.
푸른 남해의 출렁임을 가슴 떨림으로 바라보며....
▲오늘은 '우리들 산악회' 회원되어
산을 오릅니다. 이 정도면
어디가서 '까불어도' 두렵지 않으리요..
▲'망운산(786m)'
남해읍의 뒷산 격이요 보물섬, 남해의 최고봉입니다.
▲ 오늘 코스를 더듬어 봅니다
늘 앞사람만 졸졸 쫓아다니는 이는
산 정상에 도착해서야 '언제 와본 산'이라 깨닫습니다.
▲ '화방사'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소재입니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가 연죽사로 창건하여 화방사로 바뀌었고
용문사, 보리암과 함께 남해의 3대 사찰입니다.
▲ 오늘 참석한 '오솔길'의 업저버입니다.
별 봄 품은 없어도
선한 마음만으로도 천대의 복 받을 분들이랍니다.
▲ 조선시대 종이 만드는 일은 주로 절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연유로 종이의 원료가 되는 '산닥나무'가 이 사찰 주변에 많은데
천연기념물 1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거대한 불상들이 즐비합니다.
한 분 한 분의 헌물자 이름도 새겨 있어 그 정성
귀하지만, 거대한 인공적 구조물에 좀 실망도 했습니다.
제 마음이 못 되어 그렇겠지요.
▲ 나중 오르고 보니 '혼자서도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는 길' 이라고
'싱글길' 이라고 적혀 있지만
한 살 더 자신 발 걸음은 힘이 듭니다.
▲ 그래도 잘들 갑니다.
봄 바람의 포근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풀막은 잡념이 사라지고
오직 다리와 발 둘 자리에만 신경이 가니 좋습니다.
▲ 왼쪽 망운산 아래 첫 동네인
오동마을이 2K, 망운산은 1.1K인데 'ㄴ'자 빠졌습니다.
차마 말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웃었습니다
어느 아파트 이름, '0 지 아파트인데 'ㄱ' 글자가 빠졌다는
19금 이야기입니다. 고교 시절엔 이런 이야기 햇지만
지금은 안합니다.
이런 신령스런 산을 오르며 그런 못된 생각을 하다니 참 거시기 합니다.
▲ 그렇게 오르면 '노구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납니다.
주변 넓은 공터에는 화장실도 있고
시원한 샘터도 있습니다.
▲ 정상은 700m를 철쭉 터널로 힘겹게 올라야 합니다.
힘든데 그냥 여기가 정상석이라고 할까 싶습니다.
▲ 거기까지 자동차가 오릅니다.
가족단위로 철축의 계절에는
많이 올라오겠습니다.
▲ 철쭉 군락지를 관통하여 전망대에 서면
망망한 남해바다와, 하동화력발전소,
그리고 '갈사만', 새로 건설되는 '제2남해대교'도 보입니다.
▲ 5월에는 굉장하겠습니다.
의령의 자굴산, 보성의 제암산, 그리고 지리산 바래봉,
해남의 가학산, 산청의 황매산,
,
5월이면 철쭉이 환상적인 명산들 입니다.
▲ 이제 저기만 오르면 정상입니다.
힘을 모아 오릅니다.
▲ 망운산(望雲山.786m)입니다
남해군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망운'이란 이름 그대로 정상에 서서 먼 구름을 바라봅니다.
▲ 아득히 먼 구름 아래로
지리산 천왕봉, 광양의 백운산이 보이고
한려수도의 빼어난 풍광이 펼쳐집니다.
▲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정상석은
크고 우람한 새로운 정상석에 밀려나 있습니다.
▲ 우측으로 금오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그리운 지리의 주능선이 노고, 반야봉부터 천왕봉까지
펼져집니다.
▲ 남동쪽으로는 우측에서 지난 주 올랐던 응봉산과 그 옆으로 설흘산
그 우측으로는 납산과 남해의 자랑, 금산도 보입니다.
납산은 '호구산'을 그리 부르는데 원숭이를 닮아서랍니다.
호구산을 납산으로, 원산으로 부르다가 어느 곳에는 남산이라고도
기록합니다.
앞의 뽀족한 관능적인 산은
오늘 가야 할 '관대봉'입니다.
▲ 아! 그런데
시산제 장소가 바뀌어 다시 내려오랍니다.
점심을 준다니 안 내려갈 수도 없고
툴툴거리며 내려갑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 뿌연 날씨가 아쉽습니다.
지리능선, 하동화력, 갈사만...
그 우측 안쪽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쟁터
관음포입니다. 거기서 돌아가셨습니다.
좌측으로는 여수의 석유화학단지가 손에 닿을듯 합니다.
▲ 정성을 모두어 시산제가 진행됩니다.
포근한 날씨에 정성을 다합니다.
▲ 오늘 우리처럼 업저버로 참석한
정겨운 '장수' 님들입니다.
인물이 훤하여 어디가서 밥은 굶지 않을듯 합니다.
▲ 절은 삼배를 합니다.
정성을 다하는 의미겠지요.
▲ 비빔밥은 들기름을 듬뿍넣어 맛이 있고, 수육, 떡,
과일,,,거기에 라면까지 끓여 온갖 것으로 배물리 먹고
모두들 우측 임도로 오르지만
우린 좌측으로 돌아 '망운사'를 갑니다
▲ 망운산 아래 자리한 '망운사'
천년 고찰입니다.
▲ 너덜겅도 경이롭게 지납니다.
남구만이 쓴 시에 나오는 너덜겅이 여기일까요?
누구는 이를 '돌 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강은 700m가 넘습니다.
▲ 망운사는 금산의 '보리암'이나,
여수 돌산의 '향일암' 같은 멋진 조망터 입니다.
▲ 망운사의 성각스님은 부산시 무형문화제 19호
선화 기능 보유자입니다
▲ 그 곳의 항아리 하나까지 정겹습니다.
▲ 정갈한 경내와 뒤로는 높다란 망운산 정상,
그리고 앞으로는 남해읍과 바다가 넓게 펼쳐집니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고 있는 산새'랍니다.
▲ 이제 우린 관대봉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길을 찾아 떠납니다.
▲ 뿌연 날씨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경치는
일품입니다. 점점이 떠 잇는 섬들로 하여
더욱 그러합니다.
▲ 아! 사공이 많으면 그것도 탈이 나는 법...
쉽게 가려다 너덜겅을 이리저리 한참을 헤맵니다.
▲ 길은 나오지 않고
힘은 듭니다. 여름이라면 더 했을 겁니다.
▲ 겨우 길을 찾아 안도합니다.
'탓'을 할 수있지만
그냥 웃습니다.
▲ 이럴때는 일부러 위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더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눈 앞만 봅니다.
▲ 그렇게 안부에 닿으면
망운산 정상 아래 입니다.
▲ 처음엔 여기가 시산제 예정지였습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쉬웠을까요?
돌고 돌아 올라온 겁니다.
▲ 거기서 올랐던 정상도 올려다 봅니다
이제 우리는 관대봉으로 향합니다.
▲ 남해읍입니다. 군청소재지이고
도립남해대학, 유배문학관등이 있습니다.
▲ 망운산 정상을 다시봅니다
우측 아래에 망운사가 있는 겁니다.
▲ 다시 관대봉 1.3K를 앞두고
서 봅니다.
▲좀 실망스럽습니다.
KBS중계탑, 전봇대, 임도... 어지럽습니다.
저기 오는 분들은 알바하다 되돌아 오는 거랍니다.
약간 고소했습니다. 워낙 우리가 힘들게 올랐으니...
▲ 여수 산업단지도 선명합니다.
▲ 망운산에는 아픈 역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1945년 8월 8일, 해방을 한 주 남긴 날이지요, 미공군폭격기 한 대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군수 공장을 폭격하고 귀대하다가
대공포를 맞고 이 산에서 격추됩니다.
이를 목격한 남해의 고 김덕영씨가 달려가 시산 11구를 수습합니다.
후에 시신들은 미국으로 송환되고 김씨는 미국 시민공로훈장을 받습니다.
11년후 여기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1958년 국민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립니다.
▲ 가야할 '관대봉'
사모관대를 닮았다고하여 그리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여인의 봉곳한 가슴을 닮았다고
관능적이라 합니다.
▲ 내려오는 길은 가파릅니다
우측이 정상이었고 가운데 능선을 따라 내려와
관대봉으로 가파르게 오릅니다.
▲ 이제 남해읍은 아주 가까이 보입니다.
▲그렇게 오르면 그 '관대봉'
15m 바위에 서서
그 아찔한 조망을 즐깁니다.
▲ 저 멀리 지난 주 올랐던 응봉산,
설흘산이 보입니다.
▲ 그렇게 내려와 하산 길을 채촉합니다.
▲ 관대봉에서 정상은 1.7K,
남해읍까지는 2.7K 입니다.
이정표를 이해하는데 한참 연구를 해야 합니다.
▲ 여기서 300m가면 약수가 꽐꽐 나옵니다
남해읍민들의 운동 코스로 좋겠습니다.
▲ 남해에는 편백나무가 즐비합니다.
방향물질인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발생해
삼림욕장으로서는 으뜸 이랍니다.
기분이 좋아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 묻지마세요 물어보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마세요...
... 여기까지 왔는데 앞만보고 왔는데... ...
♪
서산으로 가는 청춘 너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아 가지를 말아라...
▲ ... 흘러간 내 청춘 잘한 것도 없는데....
♪
.... 그렇게 구성지게 부르고 나니
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 오래된 산소를 만납니다.
후손들의 정성에 복을 빌어 봅니다.
▲ 그리고 나면 한참을
대나무 숲으로 이어집니다.
참 쓰임새가 많았는데 플라스틱등으로 이젠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 그렇게 남해여중 옆으로 하산을 하고
뜨거운 목욕물에 호사를 누리고 나서
남해 '유배문학관'을 찾습니다.
한양에서 남해까지 천삼백리쯤 되겠지요
그 긴 길을 강을 넘고 고개를 넘으며 유배를 왔습니다.
▲ 서포 김만중, 약천 남구만을 비롯한 고려부터 조선까지
남해로 유배온 유배객 200여명이
화전별곡, 구운몽, 사씨남정기, 남해문견록...
주옥같은 유배문학을 남겼습니다.
▲ 지난 주 소개했던 김만중과 그의 사친시가
유배문학관 앞 마당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 세월의 주름 진 얼굴,,,
그렇게 봄 바람에 서 봤습니다.
▲ 인구 45,000의 남해,
여러번 가봐도 보물섬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난 달부터 금산과, 응봉산, 설흘산, 가천 다랭이마을..
오늘 망운산에 이르기까지
가슴 찡한 추억이 됩니다.
오래오래 아름다운 풍광을 잘 간직하여
아늑한 고장으로 거기 있기를 바랍니다.
▲ 서두에 소개한 남구만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추억을 떠 올려봅니다.
그렇게 시끄럽고 아름다웠던 하루
이제
고운님들과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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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노래 / 박인희
촛불 속에 너를 바라본다
달빛으로 별빛으로 너를 바라본다
눈으로 바라보기 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너
너를 우러르면
달 같은 한 얼굴이 떠오른다
한 순간만이라도
밤바다를 둘이 함께 바라보고 싶은 얼굴
공기를 느낄 수 있는
홀로 너를 우러르다
내가 먼저 눈을 감으면
말 안해도 너는 알지
내가 흘러가야 하는 곳을
남해
내 가슴 앞에 나는 빈 배로 떠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