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경남.부산.울산

경남남해.금산(두모계곡-부소암-상사암-좌선대-제석봉-일출봉-단군성전-정상-망대-보리암-쌍홍문-도선바위-금산탐방지원센다)

산꾼 미시령 2017. 1. 15. 23:14

 

 모든 종교의 공통점중 하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리라

 그 내용이나 방법, 자세는 각기 다르지만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간곡한 마음으로 그 소원의

성취를 위하여 간구한다.

 

 그 기도의 방법 중 서원기도라는 게 있다. , ‘이러이러한 소원을 들어주시면 이러 이런걸

하겠다는 기도 말이다.

 

 이 기도는 아주 절박할 때, 예를 들어 아들을 못 낳아 구박 박던 이는 아들하나 주시면 당신의

종으로 바치겠나이다했고.

 

 죄를 짓고 목숨을 피해 도망가던 도망자는 살아 다시 이 곳으로 오도록 지켜 주시면 여기에

큰 단을 쌓고 제사를 올리겠나이다’.

 

 절망의 불치병에 걸린 이는 이 병에서 고쳐 주시기만 하면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나이다’.

등등...

 

 그런데 남해의 금산의 유래를 보면 간절한 서원 기도가 나온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개국 하기 전, 이 산 보리암 근처 선은전 터에서 100일 동안 절박한

마음으로, ‘내가 성공적으로 등극하게 되면 이 산 전부를 비단으로 덮겠나이다서원하였단다,

 

 성공적으로 조선을 개국 등극한 그는 이 약속을 지켰을까?

사람은 서원 할 때와 이뤄지고 난 다음의 마음이 같지 않은 법이다.

불가능한 서원를 한 이성계는 말과 글로 때우고 만다

 

 비단으로 산 전체를 덮는 대신 普光山(보광산)’을 비단 ()’자를 써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어 지금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금산(681m)’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인구 45,000명의 남해(南海),

이 섬에 들 때마다 두 명의 위인을 더 기억한다.

 

 한 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이 곳 남해의 "관음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서 "정유재란" 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풍신수길" 의 병사소식에 철군하게 되었고, 경남 사천에 머물고 있던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선 500여척이 노량 앞바다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

 

 이순신이 직접 진두지휘 하여 왜선 400여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 50여척이 "관음포"

도망가는 것을 끝까지 추격하는 과정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이 곳에서 충무공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또 한 분은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이다

   '어머니 그립다는 말을 쓰려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리네.'

 

 그는 공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지만 1689(숙종 15)년에 탄핵으로 남해에

유배된 후 169256세로 병사하였다. 한글 소설 문학의 선구자로서,<구운몽>,

<사씨남정기>,서포만필등을 남겼다.

 

 그의 유배지 남해의 노도에는 그가 생을 마감한 지 325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직접 팠다는 샘터와 초옥터, 그리고 허묘가 남아 그의 자리를 쓸쓸히 메우고 있다.

 

 그리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대문호 서포의 발자취가 그 고뇌 스런 일생과 함께 서려

 있는 남해의 작은 섬 노도는 유배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깊어가는 겨울 날

빛나는 보물섬 남해,

이성계와 충무공, 그리고 서포의 서정이 깃든 그 곳을 간다.

언제나 정겹고 아름다운 님들과 함께...

 

 

▲오늘의 입구 '양아리 두모주차장'이다

두모계곡은 2013년 개방되었는데 중터에

'서불(서학)과차'(서학이 남해를 다녀갔다)라는 암각으로

 

중국에서 서학연구회에서 이 건대한 돌 상(높이2.6m, 무게 3톤)을

기증하여 여기 세웠단다.

중국인들의 열정도 놀랍고, 뭔가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

 

▲ 어느덧 한 해가 흘러

21주년이 된 '장수산악회'  한 해의 무사안녕을 비는 시산제를 올리고

새로운 임원진도 취임한다.

 

 

▲ 배테랑 산악인들이 즐비하고

정겹고 고운 님들이 많이 계신 산악회..

'장수'를 만난건 필자에게 과분한 은혜였으니..

.

 

▲ 같이 마음을 모아

절을 올릴기도하고..

 산대장님의 깔끔한 진행도 돋보였다.

 

 

▲ 오솔길에서 업저버로 온 6명,

그래도 오늘은 봐줄만한 모습은

순전히 맑은 남해의 햇살 덕이니..

 

 

▲ 이제 출발이다 '두모 계곡'은

부소암을 거쳐 상사바위등으로 오르는데

크게 어렵지 않은 포근한 길이다.

 

 

▲ 30분 오르면 만나는 '양아리 석각(石刻)'

 고대문화의 귀중한 유적이다.(경남기념물 제6호)

 이 석각은 가로 7m, 세로 4m 규모의 너럭바위 위에 가로 1m, 세로 50크기로 새겨진

그림 또는 그림문자다.

 

진시황의 명은 방은 방사(方士) 서불(徐不, 혹은 서복.徐福)이

동남동녀 500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으려 남해에 왔지만

 

구하지 못하고 사냥만 하고 돌아갔다는 전설과 함께 여기에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이 이곳을 다녀가다)란 글을 남겼다는건데...

 

 

▲ 하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왜? 진시황 시대에는 이미 중국에 한자가 사용되었는데

한자가 아닌 이런 상형문자를 남겼을끼? 거란이나 산스크리트 문자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지만

선사시대의 남해인들의 자취이니 고귀한 자료이다.

.

 

▲ 찬 날씨 점퍼를 벗었다 입었다 할무렵

조망이 열리기 시작한다.

 

 

▲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원..

기온이 떨어지니 오히려 이런 맑은 풍광이

비단산의 이름에 어울리는 날씨가 되고..

 

 

 

▲ 여러번 와도 남해의 해안선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건너가 남해읍이고

 그 너머로 여수반도도 아름답다.

 

 

▲ 바위 굴을 기어가는게 스릴이 있는데

이런 거대한 시설은 좀 멋이없고..

.

 

▲ 우린 이 굴을 통과하기로 했다.

기어가기도하고 몸을 오무렸다 펼치기도 하지..

.

 

▲ 이렇게 통과하고..

 

 

▲ 그렇게 오르면 '부소암'이다.

'암' 이 암자를 의미하는줄 알았는데

바위암자를 쓴다.

  

 

▲ 좌측으로 상사바위 뒷쪽을 병풍처럼 이고

전면과 우측의 조망이 놀라운 곳에

어찌 이렇게 암자를 지었을까?

 

 

▲ 암자에서 바라본 정면 바다.

상주해수욕장에서 우측으로 넘어 온 마을이다.

.

 

▲ 돌단을 쌓고 어디서 물길을 만들었는지

아담한 수행터 암자가 놀라웠다.

.

 

▲ 비가 새는가..

부소암을 등지고 앉은 암자는

어울리지 않는 에어컨 실외기가 눈에 띄었으니..

여기도 여름은 더운가 보다.

 

 

▲ 거기서 일행을들 만나

햇살앞에  서 보기도 하고...

.

 

▲ 제34경 부소암.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갔다는

전설은 전해진다는데..

 

 

▲ 아쉽게 부소암을 떠나

상사바위로 간다

 

 

▲ 2.5K를 온거구 이제 크게 오름의

길은 없다 이제부터 유람이다..

 

 

▲ 되돌아본 '부소암' 너머 쪽에 암자가 있는거다

제34경 부소암, 거대하다..

 

 

▲ 그렇게 정상은 꽁꽁 얼었다.

남해안을 빼고 전국 어디를 가든 오늘은 눈이 있을건데..

 

 

 

▲ 상사바위 입구에서 '뫼우' 팀들을 만난다

거기 중심에 '보라돌이'님이 빛나고....

빠르기가 날르는 호랑이들이다.

 

 

▲ 상사바위

거기에 서면 좌측으로 보리암과 38경 바위들이 놀랍게 다가오고

 

 

▲ 그 상사바위에서 바라보는 '상주 은모래 해수욕장'

어느 해인가 저기서 텐트를 치고 여름을 즐겼었다.

그 좌측 선창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돌기도 했지...

 

 

▲ 우람한 바위들과 파란하늘...

누구나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 상사바위에 엎드려 보기도 했다.

필자가 낀 사진도 있지만

뒤로 보리암을 담은 이 사진이 멋찌다.

 

 

▲ 건너 '보리암'을 당겨보기도 ...

 

 

  그 곳에서 바라본 모습을 담은 해설판이다.

옮겨온 사진이고...

 

 

▲ 만일 금산에 대하여 '수능을 본다면 이 38경 순서와 이름을 외웠을 거다

그냥 놔두면 38경 뿐이겠는가? 보는 이들마다 상상력이 수백 수천의

모습 이었으리니...

창의성 면에서는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건 불만이다.

.

 

▲ 자기를 흠모하다 상사병에 걸린 총각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마음의 양반가 유부녀는

측은히 여겨 이 바위에서 '상사'를 풀었단다.

몸을 허락했다는 건데,,, 그 에로틱한 전설에

아주 찐한 농담이 한바탕 웃음이 된다.

 

아마도 남자들은 모두 머슴이 부럽단 생각을 했을게다.

필자? 난  도덕선생이다. ㅎ

 

 

▲ 그 너머에는 점심식탁인듯

'인절미'가 놓여있고..

두 남녀의 '상사를 푼 후' 배고픔의 대비였던가?

 

 

▲ 우측에 앉은 필자를 찍어주기 위해

저런 멋진 폼을 잡지만 앞면은 '뒤태' 같지가 않다.

 

 

▲ 그렇게 '금산산장' 방향으로 내려오다보면

꽃송이 같은 바위에 기묘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디서나 대통령 탄핵 이야기는 싸움으로 끝나지만

남녀상열비사는 즐거움이 된다.

 

 

▲ '좌선대'.

신라의 고승 원효. 의상. 운필거사가

수도좌선을 하였고 그 앉던 흔적이 남아있다는데

올라 가보는게 허락되자 않았다.

 

 

▲ 그 좌선대 사이로

맑은 햇살을 담아보기도 하고...

 

 

▲ 그렇게 좌선대 바위를 다시 되돌아본다.

 

 

▲ 제석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풍경들...

 

 

▲ 맑은 햇살도 좋지만 이 곳에

눈이라도 쌓였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져보고..

 

 

 

▲ '일월봉' 누가 올려놨을까? 빙하시대에 어쩌구 하는

과학적 설명은 억겁의 세월에 현기증이 난다.

필자가 뽀빠이 되어 올려다 놓은거다.

 

 

▲ 흔들바위... 이름판 때문에 오르는 모두가

한번씩 흔들어 보지만....

 

 

▲  단군 성전입구 헬기장엔 찬바람속 인파가 넘치지만

신은 우리에게 최고의 식탁을 허락하셨다.

확트인 조망과,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 그리고 따뜻한  햇살...

 

라면을 끓였다 걸리면 벌금이 크다.

걸리면 내가 가져온게 아니다라 우길거다.

 

 

 

▲ 거기에서 건너로 상사바위와

좌선대(중간)도 보고

밑으로는 음식을 파는 금산 산장이.

 

 

좌측 '일월봉' 위에서 한 부부가 바다를 향해

정성된 절을 여러번하고, 그 아래는 전망대다

 

 

▲멀리는 다도해 섬들이 서포 김만중의 '노도'와 함께

빛난.

 

 

그렇게 오르면 정상은 코앞이다.

정부가 지정한 명승 제39호인  남해 금산(錦山)이다.

 

'명승'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볼거리는 38경에 달하는 기암괴봉들과

 그림같이 펼쳐진 짙푸른 다도해를 비롯해 지천으로 널려 있다.

,

 

 

▲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5m).

고려시대부터 국토의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봉수대이다.

 

 

▲ 거기에서 해맑은 정겨운 님들을

담아보고... 촬영 할때만큼은 필자가 왕이다.

웃으라 하면 웃고, 배를 드밀라 하면 순순히 따르니.....

 

 

▲ 윗 사진에 필자가 빠졌으니

어찌 샘이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싣는다.

 

 

▲ 망대에서 바라본 동쪽,

턱 밑까지 차가 올라오고 거대한 주차장이 있으니

부츠구두를 신고 정상에 오르는 인파가 즐비하다.

 

 

▲ 불쏘시게 넣던 거기에 들어가보라 명령에

다들 그렇게 한다.

액운은 불사르고 활활 한 해 열정적인  삶들이 되시라고 빌며 촬영한

필자의 마음을 아실랑가?

 

 

▲ '인증샷'은 현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엣인들이 다녀갔음을 즐비하게 바위에 남겼다

'유홍문 상금산(쌍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

 

놀라운 인물을 발견했다  연산군 시절에 태어나 풍기군수를 지냈고

성리학의 대가로 백운동서원등 우리나라 서원운동의 창시자 '주세붕'

그도 다녀갔다.

함안군 칠서에 그의 묘지도, 사당도 있다.

 

 

▲ 즐비한 좌우의 옛인들의 인증샷 글 옆에

작은 소망들이 쌓이기도 하고...

 

 

▲ 그렇게 좌측으로 내려오면 보리암이다.

어떤 이는 여기가 보리암인줄 알고

스쳐 주차장으로 내려 가기도 한다.

 

 

▲ 그 보리암 우측에는 거대한 대장봉과 향리암이

자리하고...

 

 

▲ 그 내려가는 길에 동전을 붙이며 소원을 빌어보기도 한다

동전에 바위에 붙는 이는 오늘밤 아들을 얻게 된다나?

 

 

관찰사 이재현? 이완용 당숙 이다 경남관찰사(도지사)를 지냈으며

일사능약이후 의병토벌에 앞장선 친일파중의 친일파다.

 

'사천군수 남해서리 윤순백', 비교적 평판이 좋던 그가

 관찰사를 수행하여 보리암을 구경했나보다.

 

교훈을 얻는다 인증샤를 남기기 전에 행실이 좋았어야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리라.

 

 

 

▲ 그 관찰사 '이재현' 때문에 침을 밷고 싶은 불쾌함이

한발 내려서면 보리암 건물사이로 펼쳐진 장관으로 치유된다.

 

 

▲보리암은 강화 보문암,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과 더불어

 국내 4대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

 

 

이 암자는 신라 신문왕대 원효대사가 지은 보광사로 지은 것을

17세기 조선 현종이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 됐다.

.

 

▲보리암 3층 석탑이다.(경남유형문화재74호)

인도여인이었던 가락국  김수로 왕의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비보(裨補) 성격의 3층 석탑이다....

.

 

암자 입구에 우물 모양으로 생긴 약수가

 얼음을 동동 띄운 채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발을 붙잡는다.

 

 

 

▲ 거기서 한컷 담기도 했었지..

이렇게 웃게 한건  순전히 필자의 능력이다.

 

 

▲  보리암의 보광전을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서면

흰색의 관음상 뒷모습과 마주친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해수 관음상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거기의 인파들도 놀랍다.

 

 

 

 

▲불교신자는아니지만 이 자애로움에

평안을 느낀다.

 

 

▲ 거기에서 필자도 '낑가'

보기도 했.

아차 여기서 이성계에 관련된

 '이태조기단'을 다녀와야하는데 놓친다.

 

 

 

▲ 전망좋은 곳에서 정성을 다해 복을비는 이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우린 쌍홍문으로 향한.

 

 

▲ 그렇게 내려서면 '음성굴'..

 생김으로 봐서

여인의 어디를 상상하는데

한자를 보니 소리음, 소리성를 쓴다.

 

해수 관음상 아래에 그런 형이하학적 상상을 해서야 쓰겠는가!

그래도 한자는 지우고 싶었다.

 

 

▲ 내려서면 쌍홍문이다.

이 걸 찍기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보리암에서 10분쯤 걸어 도착한 쌍홍문은

금산의 관문이다.

 

 

 

말 그대로 무지개 모양의 문이 두 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해탈문'이다.

 

 

▲ 거기서 내고향 청주에서 온 어느 여인에게 부탁하여

포즈를 취한다. 정성을 다하는 그 여인이

오래오래 복이 있기를 빌었다.

 

 

▲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장군암도,

네 신선이 놀았다는 '사선대'도 있고..

 

 

▲ 옛 이름 천양문도 신라의 원효가 지었다는 쌍홍문도

의미있는 이름이다.

하여간 그 안에는 수천명이 피난해도 될듯햇으니...

 

 

 

▲그렇게 40여분 내려서면 '금산탐방지원센터'이다.

좋은 님들과 함께한 하루!

비단결같은 겨울 바람에 맑은 햇살도 감사했으니....

 

 

 

▲다도해를 품은 산악공원 금산.

발아래 잡힐듯한 다도해의 모습과 함께 오래오래

몽우병적 그리움이 사무칠듯하.

 

 

 

▲ 거듭. 38경이나 이름붙은 건 좀 아쉽다

8경정도 붙이고 나머지는

우리국민의 창의적 사고에 맡겼으면 좋겠다.

 

 

 

▲ 그렇게 죽방렴으로 유명한 삼동면

아이들 체험활동 때 왔던 남해청소년수련원 위 깔끔한 집에서

말깔스런 매운탕으로 배도 불리고 한잔 했으니...

한 해동안 수고하신 회장님과 총장님으로 하여

부족함이 없는 하루였다.

 

 

 

▲그렇게 고운 님들과 함께 하루

편온함이 그리움이 되고 ..

 

 

 

 

▲더 없이 어울리는  날씨속에

우리도, 정겨운  '장수'도 오래오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

..........................................

 

1973년에 남해를 여행하던 <둘다섯>은 금산 보리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발아래는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상주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며

"캄캄한 밤바다에 작은 불빛이 외롭게 떠가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느낌을 그대로 메모해 즉석에서 흥얼거려 보니 어느 정도 노래가 되어

밤배를 완성하게 되었다.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가야하는 밤배는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영위해 가는

 어민들의 운명이기도 해,

그래서밤배>는 그들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다"고 했다

 

밤배/둘다섯

 

검은 빛 바다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 가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출때면

작은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음

볼사람 찾는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음

볼사람 찾는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