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웬지 그립고 아픈 감성의 꽃이다
봉숭아처럼 우리의 정서와 어울리는 꽃도 없으리라
‘봉숭아’ 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옛 일기장을 꺼내 펼치듯
가슴에 아련한 온갖 추억들이 녹아있는 꽃물이 든다. 가슴에.
봉숭아 꽃잎과 잎 몇 개, 그리고 백반이라는 것을 넣고 찢어 가지고는
아주까리 잎이나, 칡잎을 부드럽게 비벼 칡껍질의 끈으로 묶었다.
그렇게 열손가락을 부채 살 모양 펴고 물들기를 기다리면 되는거였다.
소쩍새 울여대는 밤, 보릿집 모깃불 연기 곁, 멍석에 누워 별을 세다 잠들면
누가 안아 뉘었는지 아침이면 안방에 있었다
아침이 되면 언제 빠졌는지 두어 손가락 것은 빠져 나뒹굴고, 나머지를 소중히 벗겨내면
열 손가락 거기에 선연한 반달이 떠 있지 않던가!
담 밑의 봉숭아를 보면 그 시절 열 손가락 손톱마다 떠 있던 반달의 그 시절이 어찌 그립지
않으랴!
그 곱던 누이를 주름진 할머니로 만드는 잔인한 재주의 세월, 세월이여!
오늘도 봉숭아 꽃을 보면 그 누이는 아주까리 잎대신 ‘랩’으로 싼 열손가락을 부채처럼
펼쳐보이는 천진함은 그대로인데...세월은 흘렀다.
그 반달이 꺾여지는 것이 아까워 손톱깎기도 삼갔던 그 봉숭아 꽃물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시절이여..
또 다시 여름이 오고 세월 얹은 담벼락 밑 작은 꽃 밭에는 오늘도 봉숭아 꽃이 자라고 있다.
4주전 다녀온 천왕봉!
거기를 간다.
짙어진 깊은 여름날에...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출처 :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통권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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