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충청도

충북 괴산.낙영산 도명산(동림사-낙영산-형제바위-거북.토끼바위-미륵산성-도명산-화양구곡/8k.5시간)

산꾼 미시령 2016. 5. 22. 22:17

리 여행을 가보지 못한 고교 시절,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산은 보은 속리산이고,

가장 멋진 곳은 괴산 화양동 계곡이며, 가장 좋은 소풍 터는 초정리약수터였다

 그렇게 세 곳은 청주에서 가까운 고향의 자랑거리였다. 그 화양동 계곡을 가면 의례히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으니 우암 송시열이다

그 분은 신채호, 손병희와 더불어 충북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우암 송시열'을 아는가 물으면 100% 안다고 할 것이다.

그럼 그가 누구냐 다시 물으면 정확히 말하는 이가 별로 없다.

 

  우암 송시열! 역사의 인물치고 이 분 처럼 파란만장한 부침의 생을 산 이도 드물리라

 조선왕조 실록에 그 이름이 3천번 이상 나 올 정도이며 선조임금 때 태어나 인조,효종,

현종,숙종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요 학자인데 인조때 장원 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뒷날 효종이 된 봉림 대군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우의정,

좌의정까지... 낙향과 다시부름의 연속이었다

 

 결국 효종에 이르러 제주로 유배당한 후, 국문을 받으러 압송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러나 20년 후 관작이 회복되고 전국 각지에 그를 위한 제향 서원들이 세워지고 오늘까지

그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사상을 기리는 단체. 지자체가 많다.

 

 그의 삶처럼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이다.

북벌론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고양하고, 조선중화사상을 정립하여 문화국가로의 방향타를 제시,

,정조 시절의 문화적 르네상스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와

 

 너무 독선적이고 주변과 불화를 일으키며 당쟁의 거두였다는 비판도 상존한다.

그러나 공자, 주자에 견주어 그를 송자로 칭할 만큼 방대한 학문적 저술과 후학양성의

업적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는 우리고향 충북사람이다.

옥천군 이원에서 태어나고 많은 자취를 화양동 계곡에 남기고, 근처 괴산 청천에 묻혔다

 

5월이 간다

 청소년기의 꿈과 추억이 서린 '화양동 구곡'이 있는  낙영산, 도명산, 거기를 간다

40여리 청주의 남쪽,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고향 땅 산 마루금을 안개 속에

종일 시린 눈으로 보며 그 길을 걷는다

 

아쉬웠다 우리고향 '청주'를 거치지 못하고

'빠른' 길만 안내하는 '네비'는 상주의 '화북IC'를 내려

돌고돌아  '속리산국립공원' 관내인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동림사 주차장에 내려놓는다.

충북 괴산은 청주와 이웃한다. 지역 방위사단이 있는'증평'이 괴산군 안에 있었지만

증평군으로 분리되어

이제는 4만정도의 작은 군이 되었다

 ‘자에서 느끼는 선입견이 있지만 괴산(槐山)자는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동림사 입구에 '낙영산' 빗돌이 있었다

이른바 '또랑조'를 즐기는 분들은 이런 정상석을 반긴다

여기서 찍으면 그 산을 다녀왔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속리산!

그 이름만 들어도 온갖 추억이 생각난다.

어릴적 청주에서 속리산은 '100리'가 넘는 먼 곳 이었다

비포장 도로로 여러 고개를 넘고 특히 '말티고개'를 넘을 때면

모두 내려서 차를 밀어야 했다.

그렇게 소풍을 갔다 속리산 법주사로..

괴산에 가면 진짜 어딜 가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는 선비를 상징한다. 괴산은 실제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은거지였다

동림사 마당엔 이런 엄청난 느티나무가 있었다.  

  뒤로 낙영산을 등지고 아늑하고 정갈한 '동림사',

  신라 경문왕 때 자정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자정법사가 법력이 있다는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여 경문왕이 그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칭호와 공림사의 사명을 지어 액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

 동림사에서 낙영산은 1.8K, 그 낙영산에서 도명산은 다시 1.8K였다

동림사 계곡으로 하여 본격적은 산행은 시작되고..

 여름이다. 점점 숲은 우거지고

발걸음은 더디다

그렇게 여러번 숨을 몰라쉬어야 안부에 오른다

겨울 같으면 벌써 도착했을거다.

신록의 푸르름 속으로 햇살은 진주처럼 쏟아지고

점점 숲은 새소리, 풀벌레 소리로 요란해진다.

30여분을 그렇게 깔닥고개라고 투덜 거리며 오르면 안부에 닿는다

여기서 낙영산은 500m, 가파르게 올라 다시 내려와야 한다.

대부분 포기하고 그냥 도명산으로도 간다.. 

'미륵산성 안내판' 전체 둘레가 5.1K였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남았다 

전설 이야기가 가슴이 뭉클하다  서로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남매가 내기를 하였다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고, 누이는 이 성을 쌓는다...

먼저 끝내는 이가 어머니를 모시기로 하였다

누가 이겼냐는 중요하지 않다.

요즘 같으면, 상속를 서로 더 받기 내기나,

서로 모시지 않기로  내기를 할거다

어떤가? 우리 고향 충북은 이 정도다! 옛부터...

 정상을 다녀온다고 부지런히 오르다가

 멋진 소나무를 만나고

부지런히 정상을 다녀 중간쯤 내려오니

일행은 비탐지역으로 가기로 했단다

다시 정상으로 올랐다

그 정상에서 가야할 '도명산' 방향도 보며.

간식을 나눈다

정겨운 님들, 푸른 초록의 신록, 시원한 바람..

낙영산은   684m로 암곡미(岩谷美)가 뛰어난 산이다.

'낙영산'이란 뜻은 '산의 그림자가 비추다'

혹은 '그림자가 떨어지다'라는 뜻이라 한다. 

이와 관련한 전설이 있다..

신라 진평왕 때 당고조가 세수를 하기 위하여 세숫물을 받아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산의 모습이 비친다

  이상하게 여겨 신하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이 산을 찾도록 했지만

나라 안에서는 찾지 못 하였는데

어느 날 동자승이 나타나 이 산이  신라국에 있다고 알려줬고

즉시 사신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신라에서도 찾지 못하던 중

  한 도승이 나타나 그 위치를 알려주어 결국 이 산을 찾아내어,

산의 이름을 낙영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런 거창한 전설의 산 치고는 조망도 없고

'좋은 줄'을 모르겟다

세상 욕심에 녹쓴 마음 탓일까?

다들 내려가지만 우린 몰래 '비탐지역'을 가기 위해 5시 방향으로 내려선다.

거기에서 이런 '형제바위'도 만나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찬바람, 모진 세월을 몸으로 이겨가는

소나무들에서 거룩함 마져 느낀다 

'환경탓' '조상탓'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이겨간다 경이롭게...

 

거기서 출발지'동림사'도 내려다 보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맞긴다.

분재처럼 자라는 소나무들..

널따란 바위와, 쉬어가기 참 좋은 곳에서 목을 축이며 .

크고 우람한 것만 찍을수 없는거다

이런 여건에서도 굿굿히 세월을 이겨간다

거기에 기묘한 바위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하나는 거북바위 하나는 토끼바위 라는데

그중  '토끼바위'란다

아무리 찾아도 토끼보다 기린바위가 좋겠.

구워낸 통닭 같기도 하고..

반대쪽 이 바위가 '거북바위'라는데

난 돼지바위라면 좋겠다 생각하였고.

오늘 정겨운 님들의 사진'컨쎕'은 '연인같이'

보이게 찍는 거란다.

그러니까 실제 '연인'은 싫은 거다

'연인처럼 보이게' 만이다

그래도 그 정도 허락이 어디야...

10년만 젊었었도 그렇지 않았을 거다...

저 멀리 속리산 여러 중봉들이 아련하고

그 뒤 어딘가로 우리 고향 땅도 이어질거다. 

짙은 그리움...

이제 여기서 부터 '비탐지역'이다 잡히면 50만원이라는데...

50만원이 어디있어? 잡히면 난 그러려고 한다

'난 안 오려했는데 저 이 대장님이 자꾸 가자했다' 고...

서둘러 가자! 안 잡힘이 우선이니...

'가령산'으로도 가보고 싶었지만 방향은 반대이다.

깊게 내려가 저리로 올라야 한다.

어디를 봐도 이제 완연한 초여름 풍경이다.

5.1K의 미륵 산성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물론 홀어머니를 모시고 싶은 딸이 정성으로 쌓은 거라지만

어두운 역사시대,  민초들의 고달폈던 삶이 배어있으리라..

그렇게 깊게 내려오며

지나온 '낙영산'도 올려다 보고..

수없는 나무들을 종일 놀람으로 보지만

또다시 셔터를 누르게한다.

지난 가을 속리산 묘봉을 갈 때도

똑 같은 풍경이 있었는데...

그렇게 깊히 내려왔다가  다시 한참을 할탁거리며 오르면 안부에 닿는다

거기서 점심을 나누며,

이 슬랩으로 오르까 여러번 망설인다

그냥, 정상 길로 가기로 했다

겁이나서는 절대 아니다

  과태료 50만원이 무서워서이다

기차바위라던가?

긴 바위가 있었다. 건너다 보고..

바위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그 긴 세월을 살아갈까?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은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의 무딘 발걸음을 힘들게 붙잡고..

녹음 짙은 그 길을 그렇게 오르고 내려간다 

 정상은 코앞인데..

뭐가 가장 문제일까?

수분? 영양분? 쎈 바람을 이길 지탱력?

뭐 하나 도와 드릴게 없다. 노송의 자태가 의연함과 함께

아름다움을 동시에 뽐내는듯...

멀리 톱니바퀴처럼 봉들이 보인다

묘봉 옆에 문장대인데 여기서는 살짝 가려진다

다음주 '덕유종주'도 이런 풍경 이겠지

가슴 설레도 보고.. 

경이로운 나무들을 다시 보고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도명산(643m)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으며,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천혜의 계곡 화양동을 안고 있는 명산이다.

정상은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높고 큰 바위에 올라 앉아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

계곡도, 능선도, 느림의 미학을 자랑하는 충청인을 닮은듯도 하고. 

모두들  얼랐던 길을 도로 내려가 '낙영사'터와 마애불을 보러가지만

우린 긴 코스를 타고

화양구곡을 행하여 간다

엄마나무, 새끼나무라 불러보기도 하고..

구곡(九曲)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던 산중계곡이다.

저 멀리 그 계곡이 보인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춥지않은 4K의 계곡이다. 

선비들은 아름다운 물굽이 아홉 군데를 정한 뒤 각각 이름을 붙이고

정자를 지어 한가롭게 거처했다.

바위에 굽이의 이름을 새기고 시를 지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인공적은 구조물을 세웠던 자리인가

여러가지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 마디씩하지만

별로 타당한 이야긴 나오지 않는다.  

오늘 동행자 정겨운 분들이다.

시원한 바람처럼

힘든 세월의 삶을 산행의 즐거움으로 이겨간다

방금 내려온  도명산 정상도 다시 올려다 보고..

여러번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화양구곡을 향한다.

숲의 아늑함에 감사하고

때로는 너덜지대도 있지만 포근한 숲길이다. 

그렇게 길게 내려오다가

잠시쉬며

엉덩이 이야기로 한바탕 웃으면 되는거다

괴산에는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계구곡, 갈은구곡,

연하구곡 등 모두 여섯 개의 구곡이 있다.

 

이 중에 화양구곡은 조선중기 좌의정, 송시열이 성리학을 공부하며 거닐던 곳이다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에 있는 것 같으니

무릉도원을 어찌 찾겟는가?'

송시열의 경탄이다.

계곡 건너편에 양반다리를 하듯 앉아 있는 서실(書室)이다.

 송시열이 만년에 강학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란다.

공부는 저절로 될듯 싶다.

아! 그런데 ...

세월 탓인가?  바닥이 반들반들 너럭바위로 깔렸던 그 시절의 계곡은

'보'가 만들어 지고, 자동차 길이 나고

... 그 시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송시열 선생 유적은 반듯하게 복원되었지만

낯설고...

꿈으로 그려온 화양 구곡은 간곳 없다...

2011년 데크로 길을 만들어 년중 500만명이 다녀간다는

'산막이 옛 길' 을 가보고 싶지만 가질 못하고...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흐르는 물을 따라 가다보면

누구나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시인이 될 듯싶다.

그렇게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처음으로 문경 온천에서 목욕으로 피로를 푼다.

오늘의 컨셉인

'연인처럼 보이게'

어느 사진일까? ..정겹운 님들과 나눈 즐거운 하루는 마감되고...

....................................

많이 바뀐 고향의 산들이지만

고향 근처를 왔으니  한 시를 읽어본다

 

+ 고향과 엄마

 

아무리 외로운

떠돌이 인생이더라도

 

태어난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아무리 볼품없고

가난한 인생이라고 해도

 

나를 낳아 준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지.

 

지금은 고향을

멀리 떠나 살아도

 

이제는 엄마가

곁에 아니 계시어도

 

그리운 고향

그리운 엄마

 

가슴속에 있네

영영 잊을 수가 없네.

(정연복·시인,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