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부동多富洞...
1950년 6월25일 발발하여 3년간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 시킨 한국전쟁,
그 수 많은 전투 중 3대전투는 ‘장진호 전투’,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다부동전투’이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은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이 있는 곳까지 밀려와
대구, 부산까지 빼앗길 수 있는 절대 절명을 맞이하게 되고.
이에 8월 1일, 한미연합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왜관을 중심으로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른바 ‘워커라인’,
서쪽 왜관에서 마산을 거쳐 진해로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영덕에까지 이르렀다.
이 저지선을 지키지 못하면 전쟁은 끝이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 낙동강전투에 투입된 북한군은 총 13개 사단, 이에 맞서는 한미연합군은 8개 사단이었다.
이 낙동강 방어선을 격파하기 위해 북한군은 일명 ‘8월 공세’를 시작했다.
8월 11일, 육군본부가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하자,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된다.
북한군은 강력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000여 명의 병력과 각종 화기로 필사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국군 제1사단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으로 매우
미약한 전투력을 극복하며 끝까지 다부동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제 1사단만으로는 이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미군과의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고,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해 불과 26분 동안
다부동 일대에 퍼부은 폭탄은 무려 3000여개. 이 융단폭격을 했다
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일대를 뺏고 뺏는 쟁탈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격퇴하고 8월 20일, 적이 다부동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북한군 24,000 여명, 한미연합군 10,000 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55일 만에
다부동 전투는 끝을 맺었다.
다부동 전투 중에서도 산 중턱부터 정상까지가 가파른 암봉으로 이뤄진 유학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처참했다.
학이 노닌다는 뜻의 ‘유학(遊鶴)’이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학산은 비린 쇳내와
피 냄새로 가득했다.
거기를 간다
유학산....69년전, 이 곳에 피흘린 젊은 넋을 위로하며
그렇게 걷는다.
아픔의 마음으로 그렇게 간다.
▲ 추운 1월 말,
'우리들 산악회'는 칠곡의 팥재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 '장수', '오솔길'도 업저버로
참가 하였지요.
▲ 바람은 차고 가슴은 시리지만
69년전 피흘린 젊은 넋들을 생각하면 숙연하였지요.
▲ 유학산 중턱에 자리잡은 도봉사.
비구니 사찰이랍니다.
▲ 유학산... 산 전체 고지마다
치열했던 전쟁의 현장입니다.
▲ 버스에서 5분 강의를 했습니다.
장진호전투와,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6.25 한국전쟁의 3대 전투중 하나인
다부동전투에 대하여.
▲ 전란 두 달도 채되기 전, 전 국토의 10%만 남은
절대 절명의 낙동강 전선.
▲ 한미연합군사령관 워커장군은
이른바 워커라인을 설정, 왜관, 창녕, 마산, 진해와
동쪽으로 영덕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 가파른 바위 봉우리가
어른 키의 50배가 된다고 해서 ‘쉰질바위’라 불리는 곳.
▲ 거기에 도봉사가 있습니다.
면적은 800여평, 법당,요사채, 산신각, 우물등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 도봉사는 팥재 주차장에서 700m,
가파른 길이지만 차량이 오르기도 합니다.
▲ 쉰질바위 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확트인 조망과 더불어 명쾌한 장소에 자리 했습니다.
▲ 어찌 이런 아름 다운 곳이
전쟁의 상처을 안고 있을까?.
▲ 전쟁의 상흔을 보듬어줄
위로자의 사명을 다 해야하겠습니다 이 사찰은...
▲ 거기서 바라본 왜관, 구미 금오산, 김천 황학산.. 그리고 멀리 가야산까지..
그 시절의 아픔을 지켜봤던 산하입니다.
▲ 겸손한 열린 마음만 갖는다면
어느 곳, 여느 글귀에서도 교훈을 얻겠지요.
▲ 낙동강전투의 최대격전지였기에
지금까지도 채 발굴되지 못한 시신들이 묻혀 있습니다.
▲ 그 시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시신을 수습할 겨를없이 피아의 병사들은 그리 나아갔으니..
▲ 현인의 노래가 구슬픕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 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 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 만지니
떠 오른다 네 얼굴이
꽃 같이 별 같이.
▲ 버스 강의 탓인가?
오늘 우리가 힘들게 살지만
그 시절 태어나지 않음이 감사한 것을 서로 고백합니다.
▲ 그 시절, 오늘 생사를 알 길 없는 두려움으로
이 길을 오랐을 16세 전후의 500여 학도병들.
.
▲ 그 분들의 희생이 있기에
오늘 우리는 평화로운 발걸음으로 이 길을 갑니다.
▲ 도봉사에서 유학정 까지는 780m.
빨간모자는 여전히 나도 한번 사봐?
유혹입니다.
▲ 유학정(遊鶴亭)
학이 노닐만한 풍광과 바람이 시원하지만.
▲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아홉번 주인이 바뀐 치열했던 고지.
▲ 그 붉은 핏빛 서사(敍事)였건만,
오늘은 모든 것을 다 망각한 듯 한가롭기만 합니다.
▲ 839m...
그래서 그 치열한 839고지 전투가 전사(戰史)로 남았습니다.
▲칠곡에는 칠곡이 없습니다.
구 칠곡읍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고,
▲ 지금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는 왜관으로
3읍, 5개면의 12만 인구
왜관과 다부동을 잇는 낙동강전투가 남긴 전쟁의 흔적이 칠곡의 가장 큰 문화유산입니다.
▲ 유학산과 가산의 산비탈에 묻힌 주검들은
이제 진토(塵土)되어 있으련만,
▲ 그 위를 녹음방초가 무심하게 뒤덮고.
어쩌다 모습을 드러내는 주검의 흔적을 쓰다듬는 산 자의 진혼은 애달픕니다.
▲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 원산이 고향으로
칠곡에서 머물렀던 구상 시인은 그리 읊었습니다.
▲ 이제 837고지가 저리 보이고
저 멀리 대구의 팔공산이 보입니다.
▲ 내려온 길을
되돌아 보았지요.
▲칠곡은 전쟁의 터전이었습니다.
왕건과 견훤의 혈투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상흔
그리고 6·25 …
다시 또 69여년 … .
▲ 거대한 바위덩이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솟아난.
신선대..
동서사방 거침이 없습니다.
▲ 왜관과 가야산도 저리 보이고.
▲ 신선대에서 바라본 다부동 ...
저기에 8월 16일 B29, 98대가 26분간
960톤(3000여발)
융단폭격을 가했습니다.
▲ 대구 방향은 안개속에 가렸고
우측 너머로 비슬산이 희미합니다.
▲ 이제 837고지를 향하여
길을 갑니다.
▲몇번의 오르내림과.
▲ 거치러진 암봉길을 넘고 넘어가면.
▲837봉
837봉 역시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 당시 이 '837고지'는 대구 진입로를 방어하는 최고 요충지였고.
인민군 제13사단이 먼저 점령한 고지를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1대3의 숫적 열세를 딛고 탈환한 곳. .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매일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V자형 소나무'가 있습니다.
당초 세 줄기로 뻗은 소나무를 등산로를 위해 한 줄기를 잘라냈답니다.
▲ 소나무는 전쟁 이후일거다
아니다. 300년은 된 나무다.. 토론에 결론은 나지 않습니다.
▲ 아래로 대구로 향하는 중앙고속도로
그리고 다부IC와 전적 기념관.
▲ 단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8월초 낙동강까지 밀려,
임시수도 대구를 방어함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
지켜려는자나 무너뜨리려는 자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어
양측을 통틀어 무려 3만4천명의 젊은 영혼들이 이 곳에서 희생되었습니다.
▲ '장수' 부잣집 옆에.
여인도 없는 가난한 '오솔길'도 비닐 쉘터를 쳤지요.
▲ 그리고 맛있단 소리를 내서는 안됩니다
이런 맛있는 거는 소리없이 몰래 먹어야 합니다.
▲ 그렇게 배불리 먹은 두 동(棟)의 비닐쉘터 가족은
한결 친해진 모습.
▲ 이제 바람도 잦고
포만감에 행복한 발걸음...
▲ 바위 옆을 지나며
젖꼭지 같다는 생각을 속으로만 했습니다.
여인들이 들으면 변태라 할까봐
▲ 온화해진 바람, 따뜻한 햇살..
가벼워진 마음..
▲ 그 동요가 생각납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 날이나 눈보라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
▲ 아름다운 여인분들을 서 보시라 했지만
측광의 사진이 영.. 송구한 마음.
▲ 어느 산악회이든
어떻게 죄다 여인들 이름을 외우시냐고
놀려드림이 죄송하여 한 컷..
▲ 어느 산이든 큰 잔치를 벌이는
'우리들..'.
'디다' 보지만 뭘 먹고 가란 소리를 안합니다.
▲ 전국 어디를 가든 눈이 없는
건조한 겨울...먼지가 납니다.
▲우리...
태어나서 적어도 한번 쯤은 누군가로 부터
지독한 사랑을 받을, 그리고 해 볼 이유가 충분이 있지 않을까?
▲ 그리움에 물을 부면 그리움이 자라나고
...
▲ 이제 674 고지를 향해 힘을 냅니다.
▲ '674고지'
대구 북편관문 국도와 왜관방면 도로를 잇는 중요 방어지역으로서
국군 제1사단이 인민군 제13사단과 맞서 40여일 동안 10여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뀐...
,
▲ 그야말로 혈전의 현장.
'674고지' 인근 능선의 좌우 사면을 보니 거의 절벽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 어떻게 저런 곳으로 올라와
고지를 점령했을까 ...수류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전우의 시신을 넘고 넘어서..
▲ 그래도 산 자는
비장의 복분자 주에 즐거워들 하고..
▲ 웃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푸르뫼' 가족들도 서 보시라 했습니다.
▲ 그렇게 산행은 아쉽게 막을 내리고
'다부동전적기념관'으로 향합니다.
▲ 양측 통털어 3만 4천의 희생자를 낸 다부동전투,
영화 '태극기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곳....
▲ 그 영혼을 달래고 기억하고자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 다부동(多富洞)..
부자들이 많은 동네라 하여 붙여졌다고 하는데..
▲1981년 개관한 이 기념관에는 충혼비와 함께 6·25전쟁과
다부동전투에 대한 설명과
당시 사용됐던 각종 무기 등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 실외에는 비행기, 전차, 장갑차 등도 전시돼 있어
역사교육뿐 아니라 볼거리로서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입장료 무료.
▲ 육군 제3군단 소속 학도병 동성중 3학년 이우근.
그가 쓴 편지는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수류탄을 던져넣어 적을 죽인 뒤 두려움에 떨며 고뇌하는 마음과
가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에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묻어있습니다.
▲ “전쟁이 끝나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
그 뒤에다 “내복을 빨아 입으며 문득 수의를 떠올렸다”고 고백합니다.
.
▲ 그러고 살아서 어머니에게 돌아가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이가 시린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다고 적었는데...
그 꿈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 막 열여섯 나이의 학도병은 그러나
그 엄마와 상추쌈을 먹어보지 못하고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사망했고
보내지 못한 이 편지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습니다.
▲ 글로 적지만 않았지,
이우근보다 더 어린 나이의 기막힌 죽음이 왜 없었을까.
▲ 구국용사 충혼비...
▲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
북으로 흘러가고 /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발 /
나는 그만 이 은원의 무덤 앞에 /
목 놓아 버린다 (구상의 시 '적군 묘지 앞에서' 중)'
▲ 전적 기념관을 들어갑니다.
▲ 승리를 위해
죽음을 맞이한 용감한 이들의 혈투.
▲ 55일간의 전투.
▲ 그래도 버스 5분 강의가 관심을 일으켰나
산우님들 모두가 둘러봅니다.
▲ 주인 잃은 철모.
▲ 최근 발굴된
여러 유품들이 가슴을 애립니다.
▲ 낯선 산하에 피흘려
이 강토를 지킨 영령들!....
▲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깃발.
▲ 필자도 숙연함으로 서 봅니다.
▲ 묵념하는 세 분을 발견하고
셧터를 눌렀으나... 너무 짧은 시간의 아쉼.
▲ 다부동 전투에 참가한 군인 명각비(2,165명).
▲ 그 명단에는 국군과 미군이 있었습니다.
▲'구국용사지묘(救國勇士之墓)
1994년부터 97년까지 8차례에 걸쳐 주변을 발굴해 나온 시신들 중
인적사항을 알 수 없는 259구를 이곳에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 평화를 위한 고귀한 영령들....
거기는 평화 기념관이었습니다.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이렇게 전쟁을 했습니다
그 날에.
▲ 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
삶과 죽음의 경계, 시산혈하(屍山血河)의 그 전선에서 치열했던 전쟁...
▲ 조지훈의 시, 다부원(多富院)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
▲ 나이키 유도탄을 끝으로
그 기념관을 내려섭니다.
▲ 다시 올려본 오늘의 산행 유학산 코스..
다부동 전투참상의 아픔 네가 보았구나
6. 25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학산.
학이 노닐었다는 그 곳..
▲1950년 8월 1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전투 동안 아군, 적군 포함해 3만 4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다부동 전투의 현장 유학산...
69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 겨울에 걸은 그 곳,
6·25 전쟁 최대 격전지에서
빚어낸 참상의 아픔들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
다부원에서/ 조지훈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 무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