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경상북도

경북 칠곡.영암산.선석산(승오1리-보손지-북봉-영암산-선석산-세종대왕자태실-선석사-주차장(9.5K/5시간)

산꾼 미시령 2018. 5. 27. 21:09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귀인이 되고 못 되고는 태()에 달렸으며 어질거나,

어리석게 되거나, 흥망성쇠가 모두 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소중하게 보관하였고. 그 기원은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항아리에 안치하지만 왕세자나 왕세손 등은 태봉(胎封)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는데

 

 풍수지리상 명당을 찾고, 택일하여 봉송행사등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며 공사를 시작, 완공하였다.

 

 그 후에도 책임관을 두어 돌보게 하고, 춘추로 이상 유무를 보고하게 했고,

태실의 주위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 시켰는데 왕은 300, 대군은 200,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로 그 경계를 정하였다.

 

 태실하면 크게 두 군데를 기억한다

 하나는,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 태실’.

 

 서삼릉 태실은 일제가 조선 정기를 끊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전국의 태실를 이장,

집단으로 조성하였는데 백자 항아리등은 훔치고 싸구려로 바꿔치기하거나, 없애거나,

또 석실도 일본을 상징하는 ()’자 모양으로 바꾸거나 파손했고,

일본식 울타리,조경등으로 철저히 훼손, 파괴하였다.

 

 조선의 존엄을 유린하기 위하여 조선 황실을 일본 황실에 복속된 왕실 중 하나인

이씨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전국 명당에 산재한 조선왕조의 역대 왕실의

태실을 수거했다

 

 현재 국왕 태실 20, 폐비 윤씨 태실, 왕자 태실 19, 왕녀 태실13, 왕손 태실 2기등

55기가 모여 있는 역사의 아픈 현장으로 점차 복원 해가고 있다.

 

 두 번째는, 성주의 세종대왕 자태실(사적 444) 이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실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세종은 21살에 즉위하여 32년을 통치했고 53세를 살았다

그 업적은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조선 임금중 자녀를 가장 많이 뒀는데

소헌왕후에게서 82, 다섯 후궁에게서 102. 184녀를 뒀다.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성군이지만 자녀교육과 가화만사성은 실패한

임금이라고 스스로 한탄했다.

 

 여기 자태실은 세종 20년부터 4년 공사로 조성했는데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었다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다.

그렇게 역사고비에 따라 파괴되거나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역사의 아픔을 다시한번 느끼는 태실, 태봉

 그 역사의 현장 영암산-선석산을 간다.

 언제나 정겨운 님들과 함께....

 

▲ 국도 4호선, 경북 칠곡, 북상읍 승오1리..(태평동)

거기서 산행은 시작 되고..

 

▲ 1K여의 따분한 시멘트 길,

뽕나무 오디를 땁니다, 추억이 달콥 합니다.

 

▲ 작은 저수지...

여기가 '보손지'인줄 알았지만 아니였고..

 

▲ 드디여 큰 저수지

보손리의 '보손저수지'를 만납니다.

 

▲ 41승 버스를 꽉 채운 아름다운 님들...

여기서 편안한 B코스 길은 좌측이고, 모두들 A코스를 택합니다.


▲ 오늘도 '오솔길'은

12명이 동행했습니다.

 

▲ 여기서 영암산은 2.4K...

이 때만 해도 모두 '동네 뒷산'급 이라 생각했습니다.

 

▲ 오늘도 버스에서 5분 강의를 했습니다.

'태실'에 관하여, 그리고 경기 고양의 '서삼릉 태실'과

이 산 넘어 '세종대왕 자태실'에 관하여..

 

▲ 일제시대 조선을 '이 왕가'로 낮춘 일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국의 태실을 모아 파괴, 훼손 했는지...

 

▲ 그래도 국왕 태실20기, 폐비윤씨 태실, 왕자 태실 19기

왕녀 태실 13기,왕손 태실 2기등 총 55기가 모여 있는 '서삼릉 태실'....

 

▲ 습도 많고 바람 한 점 없는 탓일까?

계속 오름 탓일까... 모두들 힘들어 합니다.

 

▲ 산을 골산과 육산으로 나눕니다. 

 바위와 흙으로 이뤄진 산을 뜻합니다.

 

▲ 칠곡 들판이 시원한

첫 조망지를 지나고.

 

▲ 깨끗한 조망은 기대하기 어렵웠지요

 

▲ 그러니까 우측 공룡능선 같은 길을 올라 영암산을 지나

저기 좌측으로 보이는 선석산까지 가야합니다.

 

▲ 우측이 북봉(784m),

좌측이 영암산(782m)입니다.

 

▲ 이제부터 기어오르고 기어내리고

몸을 접고, 구부리고...고난도의 연속입니다.

 

▲ 바위 절벽들...

그래도 암릉 길은 칼날 같은 암릉을 뚫어내는 묘미와

조망이 아름다운 장점이 있습니다.

 

▲ 골산과 육산 어느 산이 걷기에 더 좋을까?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 암릉을 뚫어 내는 쾌감과

부드러운 흙 길이나 호젓한 숲 길이 주는 영감...

 

이러 하거늘 산에서 얻는

 카타르시스는 서로 비교 할 수 없는 거지요.

 

▲ 삐죽삐죽 깎아지른 바위 절벽들...

오르면 그 짜릿함은 덤으로 얻고..

 

▲ 암봉의 연속됨은 마치 칼날 위에 선듯

아찔함을 더 합니다.

 

▲ 가풀막을 기어 오르면

누구나 미남 미녀의 모습입니다.

 

▲ 사직 찍을 때 만큼은 웃던 이들도

오늘은 헉헉 소리만 들립니다.

 

▲ 위험, 우회로를 여러번 만나지만

암릉 길의 그 묘미를 어찌 할 수 없습니다.

 

▲ 아직도 오를 길은 저리 남아 있고.

여러번 쉬어야 합니다.


▲ '위험한 암릉'은 세 곳 인데

그렇게 짜릿하게 넘어 온 길들...

 

▲ 이제 여름 산행은 1리터이상

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잎에 보실거릴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김지하의 '형님'이란 시 일부 입니다.

 

▲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박두진의 '청산도'는 그리 시작했습니다.

 

▲ 스케일  큰 등산지도로 여기를 보면

동으로 팔공산, 서로는 민주지산, 남서로는 가야산이 위치합니다.

 

▲ '칼 날같은 능선' 이란 표현이

왜 있는지 실감도 되고.

 

 

▲ 대롱대롱 로프를 잡고 기어 올라보면

앞으로 펼져질 바위 등성이가 나보란 듯이 버팁니다.

 

▲ 사방이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올랐을 때의

그 성취감, 짜릿함...

.

▲ 쾌감도 좋거니와 경관과 조망이

'끝내 줍니다'.

 

▲ 자기 선 자리를 탓하지 않고

철 따라 꽃을 피워 내는 강인함....

 

▲ 그렇게 북봉(784m)에 닿습니다.

영암산은 400m를 다시 좌측으로 오르내려야 합니다.

 

▲ 저렇게 .. 깊히 내려서지 말고

출렁다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 끝까지 체력을 시험하는듯 합니다.

 

▲ 우측 성주방향,,,깊게 상처는 나고

그 옆으로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흐릅니다.

 

▲ 가끔은 되돌아 보자

서럽고 힘든 세월도 같이..

 

영암산(鈴岩山·784m)

성주 쪽에서 보면 암봉이 워낭처럼 보인다 해서 방울 바위산,

방울 영(鈴)자를 써서

 영암산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 여기가 정상인줄 알았는데

저기 선석산까지 또 가야한다는 소리에

남감한 형제...

 

▲ 그도 그럴 것이 저 곳이라니..

선석산 말입니다.

.

▲ 자, 그래도  힘을 내어

깊히 내려갑니다.

 

▲ 그렇게 600m를

가파르게 내려와 지침으로, 넘어가지 않는 점심을

그래도 서로 나눕니다.

 

▲ 처음 출발지 '보손지'에서 B코스를 따라 오르면

여기서 만납니다.

 

▲ 나무 사이로 영암산을 올려다 보면

얼마나 가파르게 내려 왔는지...

 

▲ 이젠 선석산 2.2K를 향해 갑니다.

 

▲ 그러니까 영암산에서 선석산까지는 2.8K

언제 그랬냐는듯 바위가 없고,

등성이가 넓으며, 판판한 흙산입니다.


선석산으로 가는 길은

세 번째 '위험한 암릉'만 거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 해 집니다.

 

▲ 그래도 여러번 쉬며

여기서 앉아 가는 모노레일 이라도 있음 좋겠다

상상합니다.

.

▲ 하늘이 보인다! 그러다가

여러번 실망한 끝에 정말 정상에 닿습니다.

 

정상에서는 비룡산, 시묘산, 영암산으로 갈림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남쪽 방향인 비룡산으로 이어 걷는 산꾼들도 많지만

 칠곡 쪽으로 하산 하기 위해서는 시묘산 방면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 중간에 '세종대왕 자태실'로 내려가는 안내판이 있어

많은 분들이 그리로 갔지만

길을 잘못들어 자태실을 못 보고 말았습니다.

 

선석산(禪石山·742m)

서진산(棲鎭山)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상은 넓지만 조망은 수목에 가렸습니다.

 

▲ 이제 시멘트 포장 길과 만나는 불광교는

정상에서 1.8K 더 가야합니다.

 

▲용바위를 만납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선석산에서 가장 웅비해

예부터 용바위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얼핏 봐선 평범한 바위로 보이나

끄트머리에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면 수긍이 갑니다.

 

▲ 누가봐도 '의자바위'입니다.

의자는 '용상'급 이지만 앉은 이들은 엄금?

어림 없을듯 합니다.


저 멀리, 하산하여 버스가 옆으로 지나 갈 저수지가 보이고

 국내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성주참외 비닐하우스가 호수처럼 장관을 이룹니다.

 

▲ 태봉바위

여기에서 세종대왕 자태실의

 '태봉'을 살핀 장소랍니다.

 

▲여기 태봉바위에서  볼록 솟은 동산인 세종대왕 자태실이 보입니다.

 혹자는 이 지점이 연꽃의 한 가운데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골짜기 양 편의 산 줄기가 여자의 양다리이며

태실이 위치한 자리가 여성의 음부에 해당 된다고도 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낙점한 만큼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니겠는가..

 

▲ 삼거리, 빛나는 봉사꾼 '우리들....'의 총무님들입니다.

여기서 비룡산으로 가지만

우린 세종 자태실을 위하여 불광교로 갑니다.

 

▲ 지루할 만큼 가파른 길을

 한참을 내려 가고.

 

▲ 불광교를 만납니다.

여기서 부터 지루한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집니다.

 

▲ 영암산에서 5.1K..

그렇게 걸었습니다.

 

▲ 선석사와 자태실은

한참을 내려와야 했고

 

▲ 그렇게 산행은 마쳐갑니다.

 

▲ 우람한 소나무의 용트림에 놀랄 즈음

주차장에 닿으면

선석사는 좌측으로 400m 입니.

 

▲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400m, 선석사가 위치하고

 300m 아래에 '태실문화관'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자태실의 수호사찰인 '선석사'

  신라 효소왕 때(692) 의상 대사가 현 사찰의 서편에 창건, 신광사로 명명했지만

고려 공민왕 때 나옹 선사가 주지로 오면서 절터를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이를 위해 터를 닦던 중 큰 바위가 나와

절이름을 터를 닦는다는 의미의 선() 자와

돌 석() 자를 써서 선석사로 명명했다 전해 옵니다.


▲ '태장전' 오늘날도

자녀손들의 태를 여기 보관 한답니다.

 

그렇게 현재 장소로 옮길 때

 발견된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뜰 앞에 묻힌 채

그 일부가 땅 위에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 급하게 다시 세종대왕 자태실의

태봉에 오릅니다.

 

▲ 그 오르는 길에서

생명존중의 엄숙함을 느낍니다.

 

세종대왕 자태실(子胎室)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형태의 유적은 유례가 없습니다.

 

▲ 21세에 즉위하여 32년을 재임하다가

53세에 가신 세종..

정비, 소헌왕후에게서 8남 2녀, 5 후궁에게서 10남 2녀, 18남 4녀를 두었습니다.

 

▲ 영암-선석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그 가운데 솟은 태봉...

문외한인 우리가 봐도 천하명당 답습니다.

 

▲ 세종 20(1438)- 24(1442) 사이에 조성된 태실

 세종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모여 있습니다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은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 돼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그 시절 한양에서 이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자태실을 조성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했을까? 숙여해 집니다.

 

▲ 세조와 멀리 떨어져,  끝에 위치한 단종 태실...

눈물이 났습니다. 그 아픈 생애가 생각나서...

 

입구 위치한  수양대군(세조)의 태실

 왕이 됐는데도 태를 옮겨가지 않은 이유는 유달리 형제애를 강조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태실을 옮기지 않은 대신

임금의 태실인 태봉(胎封)으로 봉하고 가봉비를 세웠습니다.

 

▲좌측 영암산에서 우측 선석산..

그 아래 위치한 태봉...천하 명당입니다.

 

▲ 그렇게  성주 초천면에 내려와

흠뻑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 그렇게 강가에 앉은 자리에서

뒷풀이를 합니다.

 

▲ 제목이 뭘까?

 배추잎를 비롯한 채소에 얇은 쇠고기..

거기에 작은 만두를 넣어 끓인 뜨거운 한 그릇.

 

▲  봉사꾼 총무님, 부회장님,,,

언제나 '우리들..'의  빛나는 헌신으로 

  곤함과 지침은 저만치 사라져 갑니다.

 

▲ 전국에 있는 소중한 태실...

이런 보물등을 일제는 바꿔치기, 파괴,,,그리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얼마나 생명을 존귀히 여겼는지..

그 엄숙함을 느낍니다.

 

▲ 경기 고양의 '서삼릉 태실'

민족정기를 끊고자 전국 명당에 산재 했던 태실을 일제는 이렇게 모아

일본식 담을 두르고, 일(日) 자형의 석실에,

일본 연호 비석을 세워 파괴했습니다.

 

▲ 그렇게 생명존중의 마음으로

정겨운 님들과 함께 했던 빛나는 하루!

영암-선석산의 추억은

그렇게 저물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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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있는 풍경/ 윤수천

 

산을 내려갈 때에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고개를 세운 채 내려갈 수는 없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면

,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이것이다

산이 보여주려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푸르다는 것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을 보여주려고

산은 날마다 손을 내밀어

오라 오라 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