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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응봉-설흘산(선구리-안산-칼날능선-응봉산-주흘산-가천다랭이마을(6K/4시간)

산꾼 미시령 2018. 5. 21. 07:43

1년전 찾아 다시 걸었던 그 남해의 남쪽 끝,

응봉산, 설흘산을 또 다시 간다. 서포를 그리며...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i

어머니의 정과 한글을 사랑한 사람이다(母情國文)’

 그는 1637년 인조 15년에, 강화도를 떠나 한양으로 가는 뱃전에서, 20일 전에 병자호란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출산을 하였는데  그 아이가 서포였다.

 

그 아이는 남편을 잃은 전쟁터에서 얻은 귀한 자식이요,

조선 소설사에는 구운몽” “사씨남정기라는 걸작을 남긴 사람이다

 

 서포의 아버지 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부인과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지만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강화도 남문에 올라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혼연히 앉아 폭사했는데. 그 나이 겨우 23세었다.

 

 서포는 1665(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숙종 때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유명한 희빈 장씨일가를 둘러싼 일들로 인해 선천에 유배된다.

 

 그의 다섯 살 위 형의 딸이었던. ‘인경 왕후(仁敬王后)’가 일찍 죽자

숙종은 후비를 얻었는데, 이 여인이 바로 비운의 인현 황후.

 

 자신의 조카딸을 이어 국모가 된 인현 왕후를 김만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현 왕후와 적대에 선, 희빈 장씨를 못 마땅히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 선천 유배 중에 구운몽이 집필되었으며, 168811월에 왕자(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 노도로 다시 유배되어 3년만인 1692. 결국 그 곳에서 56세로 죽었다.

 

 김만중의 삶을 바꿔 놓은 희빈 장씨는 그 후 왕비가 되고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죽은 지,

겨우 2년 뒤에 후궁으로 강등되고 그로부터 7년 후 숙종으로부터 자결을 명 받아

죽음을 당한다.

 

 김만중의 재주는 뛰어났다.

그는 시문집인 서포집》 《서포만필, 구운몽,사씨남정기를 남겼다.

 

사씨남정기의 저작 장소를 두고 경남 남해 망운산(望雲山) 언저리, 또는 노도(櫓島)

저작설로 갈렸는데 서포연보를 통해 남해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해군 서면

 망운산언저리임이 밝혀졌다.

 

 만중은 어머니를 그리는 애절한 사친시를 남겼는데 이 사친시를 짓고 석달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이 소식은 한 달이 지난후 남해 귀양지에 있는 김만중에게 전해졌다.

 

 어머니의 영결조차 못 본 그의 비감 어린 심정이 오죽했으랴! 김만중은 이로부터 2년 뒤,

56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삶을 그렇게 접고 영면하였다.

 

 서포처럼 고달폈던 삶의 자취가 남아있는 가천다랭이마을뒷산,

그 곳을 간다.

정스럽고 아름다운 님들과 같이.....

 

▲ 초가을 날처럼 서늘한 날.

1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남해군 남면 선구리)

 

▲ 우리고향에도 이런 나무가 즐비 했습니다.

여름이면 온 동네 어른, 아이들 놀이터였죠.

 

'바래다랭이 지갯길'

서쪽의 평산항에서 시작하여 총 8코스

120K에 조성된 문화생태탐방로 입니다.

 

 

 

▲ 우측은 고운 모래가 많아 이름 붙여진

'사촌해수욕장'의 사촌마을.

 

 

▲ 멀리 바다 건너에는

여수산업단지입니다.

 

 

▲ 오늘의 엎져버 오솔길은 7명입니다.

 

 

▲ 이제 본격적인 산행입니다.

어제부터 시원해진 바람은 반소매 차림은

좀 쌀쌀하게 느껴집니다.

 

 

▲ 여기를 올 때마다 자기가 옛적, 도 닦던 곳이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도 닦은 이가 왜 나처럼 걸어다니냐?  날아 좀 다니지..

 

 

▲ 괘청(快晴)

이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쾌할 쾌 자에 갤 청 자...마음까지 개이고 개운합니다.

 

 

 

▲ 상쾌하다, 병세가 좋아지다

비가 그치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다의 의미들입니다.

.

 

▲ 좌측의 운암마을...뒤로 장등산를 등지고

 앞으로 응봉산을 바라보는 안연한 마을입니다.

 

 

▲ 바람이 시원하여 오름도 좋고.

 

 

▲ 종일 보게되는 인구 30만의 여수, 그리고 오동도가

잡힐듯 가깝습니.

 

 

▲ 가던 길을 멈춰보면

우리의 인생길도 어찌 순탄만 했을까요?

 

 

▲ 작은 성취에 시끄러웠고

작은 좌절에 분노했던 일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집니다.

 

 

▲ 서구리에서 응봉산까지는 2.5K...

 

 

▲ 제법 아기 자기한 칼날 능선도 있고

조망이 좋은 걷기 좋은 길입니다.

 

 

▲ 석유화학단지로 유명한 여수 산단...

부지런히 배들은 오갑니다.

 

 

▲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만 바꾼다면

한 줄기 바람도, 곤충 울음소리도 달리 들리겠지요.

 

 

▲ 바다도 하늘도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뛰는자 위에 노는 자가 있다' 그 말이 생각납니다.

 

 

▲ 큰 것 말고 소박함을 사랑하자

일과, 삶 자체에 메몰되지 말고  마음의 여유로 살아가자

생각도 했습니다.

 

 

▲ 아 여수 반도가 길긴 깁니다.

거기엔 오동도, 돌산의 금오산 향일함....

 

 

▲ 좌측 아래 향촌마을...

길따라 즐비한 펜션들.. 누가다 이용할까?

 어찌 저렇게 많이 허가가 되었을까?.

 

 

▲ 쾌청한 날,

삶의 모든 애환도 그리 맑아지기를....

 

 

▲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감정까지도..

 

 

▲ 그 생각을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자기의 생각과 행동에

정해진 패턴이 생깁니다.

 

 

▲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행인지 모르지만

문제는 남들이 그것을 고집이라 부르는게 문제입니다.

 

 

▲ 어느 시절 엄청 바람이 불던 날

엉금엉금 기어갔던 길들..

 

 

▲ 그 시절을 잠시 추억합니다.

 

 

▲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재현 해 봅니다.

 

 

▲ 가던 이들을 불러 세워

'여기! 여기!' 외치면...멋진 장면이 됩니다.

 

 

▲ 더 많은 유조선 화물선들이 오가야

우리경제도 활기를 찾겠지요.

 

 

▲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女子....

오규환의 시 일부입니다.

 

 

▲ 한 때는 시를 달달 외고 다녔던 때가 있었고

영시 열편쯤은 외우려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

지금은 갑자기 태진아, 조영남 이름도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습니다.

 

 

▲ 이제 설흘산이 멀리 보이고

그 바다 너머로 금산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여기부터는 난간이 설치 되었습니다.

뒤로 응봉산(472m)이, 그 너머로 설흘산(482m)이 보입니다.

 

 

▲ 그렇게 '칼날 능선'의 암릉길은

짜릿합니다.

 

 

▲ 산에 가면 나는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하고 가면 더 좋을네라만!

조 운의 시입니다.

 

 

▲ 펜스, 데크, 철 계단이

그 시절의 스릴을 반감 시키지만....

 

 

▲ 다시 되돌아 보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 소나무가 멋져 '서 보시라' 했습니다만.

회장님은 앞으로는 옆으로 서서 찍어 봐야겠습니다.

가급적.

 

 

 

▲ 이제 응봉산은 저기입니다.

 

 

 

▲ 내 인생에만 뭔가 빠진 것 같고

나 말고 다름 이들은 잘 살고 있는 듯하고

 

나만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자꾸만 늦었다는 생각이 몰려들 때...

 

 

▲ 뭘 하고 사느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모든 것이 질문 투성일 때...

 

 

▲ 길을 찾느라 헤매는 건 용감한 거고

그 길에서 이 만큼의 사람들과 만나  자라났고

 

그 수 많은 상황 속에서 이기고 여기 있으니

그 길에서 얻은 것이 이렇게 많은거고

그러니 난 잘 살아 온 것이리라....

 

 

응봉산(472m)

과거 '매봉산'으로 불렸지만 '응봉산'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매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모습을 따서 '매 응()'자가 붙은

전국의 많은 응봉산, 혹은 매봉산과 같은 명명 일것입니다.

 

 

▲ 거기 시원한 조망을 보며 점심을 나누고

건너 '설흘산'으로 갑니.

 

 

▲ 출발지 선구리에서  겨우 2.5K를 왔고,

설흘산 1.8K를 갑니.

 

 

▲ 행복한 포만감에 한 잔씩들 했으니

오죽이나 시끄러울까?.

 

 

▲ 고개를 내밀라!

잘 따릅니다. 오늘따라.

 

 

▲ 응봉산에서 내려가는 육조능선..

 

 

▲ 가야할 설흘산...

이상하다? 작년엔 깎아 놓은 연필 처럼 뽀족 했었는데...

필자의 마음이 순해졌나 봅니다.

 

 

▲ 한 동안의 길은 포근했고.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목월의 시가 생각나는 길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당나라 임제선사가 남긴 말입니다.

 

'수처'(隨處),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삶의 현장이고

'작주(作主)', 그러나 어디든 주인공으로,

주체적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 여기서 가천마을로도 내려가고

우리는 400m 주흘산에 오릅니다.

 

 

설흘산은 '감동을 더 하는 산'이라 합니다.

 

 

이 산에서 돌을 져 날라 108계단의 '삿갓배미'

다랭이 논을 만들고 자식을 키워 낸,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억척스러움이 배어있으니....

 

 

'설흘산 봉수대'

경남기념물 248호입니다.

그산의 봉수를 이어받아 망운산과 여우 돌산도봉수와 연결되는

국가 주요 통신망 이었습니다.

 

 

▲ 지나온 응봉산은 저리 보입니다.

 

 

▲ 설흘산 481m...

 

 

▲ 동쪽으로는 금산,망운산이 보이고

건너엔 서포의 '노도'가 보입니다.

 

 

▲ 바로 아래로는 다랭이 논으로 유명한

가천다랭이 마을입니다.

 

 

▲ 건너 응봉산, 그 너머로

여수반도를 마지막으로 다시 봅니다.

 

 

▲ 좌측으로 금산, 그 아래로

노도입니다.

 

 

▲ 중앙으로는 망운산, 그 안쪽으로는 앵강만이

수려합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i

어머니의 정과 한글을 사랑한 사람입니다(母情國文)’

 

 

▲ 조선 소설사에는 구운몽” “사씨남정기라는

걸작을 남긴 사람입니다.

 

 

 

사씨남정기의 저작 장소를 두고 경남 남해 망운산(望雲山) 언저리,

또는 노도(櫓島) 저작설로 갈렸는데

서포연보를 통해 남해읍에서 그리 멀지 

망운산언저리임이 밝혀졌습니다.

 

 

 

'서포'가 3년간 유배되고

글을 쓰고, 거기서 56세로 죽은 '노도'현재 16가구 43명이 산답니다.

그가 죽은지 326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팠다는 샘터, 초가집, 그의 허묘가 남아 쓸쓸함을 더합니다.

 

 

 

'가천다랭이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너덜겅도 지나야 합니다.

 

 

▲ 여기도 암괴류(巖塊流)가 있습니다

오랜세월 틈 사이로 물이들고 얼고 그래서 쪼개졌다는 설,

 

 

▲ 또 하나는 암석 빙하의내부에 있던 얼음이 소실되어 생긴 지형이라는 설...

하여간 세월은 1만-8만년이 흘렀답니다.

우리보다 수만년 먼저 살아 온 할아버지 돌이지요

 

 

'가천다랭이 마을'

'옛날 한 농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논을 세어보니

한 배미가 부족했습니다 여러번 다시 세어 봐도...

 

 

▲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한참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 했고.

 찾는 것을 포기하고 옆에 벗어둔 삿갓을 들고 일어 서려는데

 

그 아래에 한 배미의 논이 숨겨져 있었답니다.

하긴 가장 작은 논은 3평이라니...

 

 

가천 다랭이 마을..

남해군 남면 홍현리 입니다.

그 고달폈던 삶은 2005년 국가지정 '명승'이 되었습니다

문화재의 일종입니다.

 

 

하나하나 맨 손으로 쌓아올린 108계단 논들,

그 근면성과 억척과 눈물과 땀이

하나하나 배어 있는 장구한 세월,

.

 

그 땅 뙈기에 각인 되었을 무명씨들의 분투를 생각하면

왠지 숙연해 집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명승, 더 현대식 집들어 늘어나지 않고

문화재 처럼 잘 보존되어 가길 바래봅니다.

 

 

바래'는 척박한 환경에서 바다를 생명으로 여기고

물 때에 맞춰 갯벌과 갯바위등에서

해초류와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 지갯길도, 바래길도

한과 아픔의 세월이 만든 길을

후손들은 '관광'으로 걷습니.

 

 

▲ 그 조상의 땀과 눈물의 길은

아벤다 향이 가득한 길이 되었습니다.

 

 

▲ '바래'질로 아팠던 해안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 서포의 어머니 사랑노래를 음미하여

그렇게 서 봤습니다.

 

 

성채처럼 에두른 응봉산, 설흘산의 기기묘묘함과

아기자기한 해안 풍광까지....

참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가천 암수바위(경남민속재료 제13호)

'암수바위' 5.9m높이의 발기찬 숫 바위와

그 우측에 4.9m의 만삭의 여인의 몸을 닮은 암바위입니다.

 

 

조선 영조27년에 이 고을 현령에게 한 노인이 꿈으로 나타나

'가천에 묻혀있는 나를 일으켜 달라' 그리하여 묻힌 암수바위가 세상에 나왔고

그 후로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제사를 매년 올린답니다.

 

 

▲ 여기를 올 때마다 최고의 포토존을 위해

좌측 언덕위로 오릅니다.

 

 

▲ 위로 응봉-주흘산이 성채처럼 에두른  기기묘묘함과

땀과 고난으로 쌓은 108계단 논들... 아기자기한 해안 풍광까지....

 

 

 

 

 

▲ 여기를 명승으로 발견하고 지정했던 유홍준교수는 

다랭이 논을 물을 대지 않고 밭으로 사용하면 머지않아 

무너질 걱정을 합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명승, 더 현대식 집들어 늘어나지 않고

문화재 처럼 잘 보존되어 가길 다시 바래봅니다.

 

 

서포 김만중은 남해 노도에서 죽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대전에 그의 비가 이렇게 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국문을 사랑한 아름다운 사람,

그는 우리 문학사의 큰 자랑이요 기둥입니다.

 

 

▲  보물섬 남해

선구리에서 시작하여

칼날봉을 지나 응봉, 설흘산으로 이어졌던 하룻 길..

 

다랭이 마을을 만든 무명씨 민초들과

서포 김만중의 생각으로 그렇게 걷던 하루

참 감사한 하루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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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친(思親) - 어머니를 그리며 -

/ 김만중(金萬重)

今朝欲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字未成時淚已滋 (자미성시루기자)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선복척)

集中應缺海南詩 (집중응결해남시)

 

 

오늘 아침 사친의 시 쓰려 하는데

글씨도 이루기 전에 눈물 먼저 가리우네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 도로 던져 버렸나

응당 문집 가운데 해남의 시 빠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