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전라도

전남 화순 백아산(덕고개 - 마당바위 삼거리 - 하늘다리 - 천불봉 - 백아산 - 전망대 - 암릉구간 - 백아산 자연휴양림 /8km(4시간)

산꾼 미시령 2016. 5. 15. 20:39

 마전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1762-1836)과 그의 형제들의 집안이 멸절 정도의 고난을

소개하면서 '닫힌 시대에 열린 사상'을 갖고 산 그들의 애환을 큰 아픔으로 기억한 바 있다.

 

오늘은 그의 '하피첩(霞帔帖)'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2005년 수원의 어느 모텔 주인이 건물을 고치려고 갖고 있던 파지(破紙)들을 마당에 내 놓았고,

폐품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자에 눈길이 갔고, 그 책자와 파지를 맞바꿨다.

그러곤 혹시나 싶어 KBS '진품명품'에 내놓았는데, 감정위원인 김영복은 책을 본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었다.

 

'진품명품'은 감정가 1억 원을 매겼고, 그 후 그 '하피첩'은 경매에서  75000만원을 받고

국립민속박물관에 팔렸다.

 

다산1789년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고 앞길이 창창하였지만 격렬한 당쟁에

휘말려 집안의 풍지박산과 함께, 1801년 경상도 장기로, 다음에 강진으로 귀양,

19년을 유배생활을 했는데, 후학양성과 저술의 업적을 우리민족에게 남긴다.

.

 이 기간 동안 두 아들은 여러 번 강진의 아버지를 찾았지만 딸과 부인 洪氏는 단 한 번도

강진 땅을 밟지 않았다.

 

 열여섯 나이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홍 씨는 아들들 편에 옷가지며 밑반찬 등을

보냈는데 이제는 병들고 생전에 보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그리움을 가눌 길 없어,

이미 35년이나 지나 담황색으로 변한 시집 올 때 입고 온 낡은 명주치마 한 벌를 보낸다.

 

 이 치마를 받아든 다산은 어땠을까? 애끓은 마음에 헤진 곳을 놔두고 성한 곳을 잘 마름질하여

3개의 서첨을 만든다. 그 내용은 아들과 손자들에게 세상에 나가 처신하는 법, 학문하는 자세,

효도하는 법등을 애끓는 아버지의 부성으로 엄격하고도 따뜻이 적은 사랑의 글이다.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이라 표지를 썼고...

어머니의 낡은 치마에 쓴 아버지의 글씨인 거다..

 

病妻寄敝裙, 병든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면서,

千里托心素, 천리 먼 길 애틋함을 함께 담았구려.

歲久紅己褪, 흘러간 세월에 붉은빛 다 바래서,

 

悵然念衰暮, 만년의 서글픔 가눌 수가 없네.

裁成小書帖,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

聊寫戒子句,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노라

 

庶幾念二親, 부디 어버이 마음 잘 헤아려,

終身鐫肺腑. 평생토록 가슴 깊이 새기려무나.

 

정의 달,  5!...

길고도 너무도  가혹했던 고통의 시절을 살아가는 다산의 가족..

다시 가슴 뜨거움으로 다가온다..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다.

 

 지리산과 무등산의 연결 고리에 있는 화순의 백아산(白鵝山, 810m)!

현대사의 처절한 비극이 남아있는 그 곳,

그 곳을 걷는다

 

 나에게 최고의 작가조정래’, 그리고 그의 최고의 작품 태백산맥의 

마당바위 장면을 영상처럼 되새기며.....

 

남해-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쪽으로 가다가 '옥과IC'를 빠져 나와

직진하면 곡성방향으로 가는데 '동악산'를 갈 때 그리갔었다.

좌회전하면 담양방향으로 간다

 오래전 막내아이 근무 부대가 그리갔었다.

오늘은 그 '옥과 IC' 에서 우회전을 한다

오산면을 지나고

광주의 남서부에 위치한 '화순군'과 경계한다

그 곳을  막 지나면

'덕고개' 였다. 거기서 산행은 시작되고 ..

신록의 향연의 계절은 전국에서

엄청난 산꾼들을 불러 모았다.

'화순군 북면 이천리'이다.

그렇게  이천리의 '덕고개'에서 정상은 3.5k 다

된비알도 잠깐 있지만  가족끼리도 거뜬 할

포근한 숲길이다.

그렇게 한참을 땀을 흘리면  벌써 절반 가까이

올라온거다. 거기서 목을 축이고..

신록의 계절은 바람도 시원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여유가 있다

그렇게 올라서면 그 유명한 '마당바위'

여기서 하늘 다리를 위하여

좌측으로 올랐다 와야한다.

마당바위! 큰 아픔를 간직하고 있다.

 6·25 당시 사단급 규모인 빨치산 전남지역 총사령부가 주둔했었다.

 피.아간에 교전이 잦았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유골과 유물은 게속 발견되고 있다.

 

내가  최고의 작가로 꼽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제9권'은

여기 마당바위를 이렇게  묘사한다.

 

'마당바위는 사방 어느 쪽에서 보나 빼어나게 생긴 바위 봉우리였다.

 산줄기 위에 우뚝 치솟은 그 모습은 바위의 무게감으로 장중했으며, 위로 뻗치는 기상으로 장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수려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였다. 그 바위는 이십 미터 이상의 위에

그냥 덩그렇게 놓인 형상이 아니고 그 뿌리를 그 거대한 바위가 산 아랫부분과

유연하게 연결을 이루어 자연스러운 조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벼랑바위 사이를 어렵사리 타서 위에 오르면, 거기에 또 하나의 경이가 펼쳐져 있었다.

삼백여 평을 헤아리는 그야말로 넓은 마당이 질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조화인지 바위가 평평해서 된 바위마당이 아니고 흙으로 된 흙마당이었다

그리고 바위는 담을 치듯이 가장자리를 따라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넓은 바위가 흙을 담고 있는 격이었다. 물이 있는 곳에 고기 있는 것이

자연의 철칙이듯이 그 흙에도 갈대·소나무·잔디·풀 같은 것들이 뿌릿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바위는는 살벌하지 않고 그지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흙이 또한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이 명당으로 소문나 오랜 세월 그 언제부턴가 묘 하나가 통명산을 건너다보이는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개도 아니고 꼭 하나인 그 묘는 인근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무수히 파헤쳐져 왔다.

 그런데도 다시 보면 그 자리에 봉분이 솟아 있고는 했다.

그 누구도 상여가 산으로 올라간 것을 본 일이 없었고, 시체를 넣은 관이

그 드높은 벼랑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괭이며 삽을 가지고 마당바위로 치달아 오르는 것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논바닥이 짝짝 갈라지고, 개울이 말라 붕어들이 배를 하얗게 까뒤집는 해였다.

비를 기다리다 못해 나락이 타들고, 굶어 죽게 될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문득 마당바위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또 마당바위에

묘를 썼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

마당바위를 치달아 오른 사람들은

으레 봉분 큼직한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분노한 그들은 인정사정 없이 그 묘를 파헤쳐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기우제를 지냈다. 그 자리는 명당인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의 묘를 써서는 안되는 명당이었다

강철고지에 배치된 조원제는 멀찍하게 솟아 있는 마당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하늘을 배경삼아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 있는 바위는 멋들어지고,

 

몇 차례씩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서서 '조원제'의 가슴을 헤아려 본다)

마당바위를 빼앗긴 지는 오래고, 이제 반 남았던 해방구까지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파악된 일이었지만

 

토벌대들은 군경이 합동으로 작전을 펴면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각 지구를 차례로 돌아가며 공략해대고 있었다.

그건 이쪽의 병력 소모를 꾀하면서, 해방구를 파괴하려는 이중작전이었다.

적들의 그 집중화된 공격에 각 지구들은 어찌할 수 없이 많은 피해를 당해가고 있었다.

 역시 군인들이 가세된 화력전은 그 위력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 조정래

조정래는 여기를 얼마나 많이 오르내려 이렇게 세밀하게

썼을까?

다시한번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에  고개를 숙인다.

거기에 소설에도 나오는 묘 하나가 있었다. 노란 야생화가 예쁘게 핀...

거기에 '하늘 다리'가 있어

명소가 되었다

 201312월 완공된 하늘다리는 해발 756m 지점의 마당바위와

절터바위를 연결하는 연장 66m, 1.2m의 산악 현수교량이다.

심한 바람에 흔들림도 무서운데

아득한 아래가 뵈는 유리판이 있다

상해의 '동방명주타워'가 생각났다.

그 좌측 아래는 빼어난 경치가 기다리고

거기에도 어김없이 봄이 가득했으니.

죄라면 혼돈의 시대에 태어난,  이데오로기의 희생물이 된

피,아의 젊은이들 넋을 기리기 위해 '하늘다리'라 했단다.

화순군의 그 배려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거기서 바라보는 푸른 물결의 사방 조망은

이 시절을 살아가는 감사를 다시 가슴으로 느끼게 하고

남북이 다시 화해와 협력으로

다시는 그런 아픔의 시절이 없기를 빌어본다

'원리'마을 등산로로 올라오면 이리로 올라온다

그 코스가 더 나은듯도 하다

날 좋은 날에는 지리산 천왕봉도, 광주의 무등산도 가까이

조망되겠지만 많은 비가 예보된 오늘은 이렇게

비가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오늘 동행자 셋이다.

겉 폼이야 필자가 제일 밀리지만

미소에서 이겨보려하고, '배를 집어넣자' 소릴 하려다 혼자만 들여밀었다.

여기를 건너갔다 되돌아 오는데

바람이 여간이 아니다.

 

남자가 부들부들 떠는 것도 보기싫지만

여성분이 저벅저벅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야! 아이고 무서워! 그래야 잡아주고 싶은 법이다.

우측으로도 그 푸름이 광활하다

저 아래서 죽어간 빨치산과 군경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나무는 그 시절을 봤을까?

60여년전 일이니 봤을거다  그 엄마 보고싶던 젊은이들이

눈을 못 감으며 죽어가는 것을... 

거기서 우리가 올라 온

덕고개 방향도 되돌아 보고..

이제 다시 내려가자

정상이 남아있으니.. 긴 계단에

삼 끈? 그것으로 엮은, 옛 가마니 스타일 바닥이

고마움을 더 하고..

한 열흘전에는 철쭉의 황홀함이 엄청 났을거다.

 약수터가 있고,  빨치산 군수공장이 있을법한 너른 지역이라

둘러보기도 한다.

거기서 방금 올랐다 내려 온

'하늘 다리' 방향도 되돌아 보고..

백아산 정상을 향하여 걷는다.

앞 여성분 엉덩이가 무지 예뻤다. 동행자 한 분이 '참 예쁩니다 엉덩이가 ..'

그런 말을 해 버린다.

 

'아이고... 큰일나요...'말렸다

그 순간 그 여인이 말한다. 괜찮습니다 즐거우시면 되지..

참 마음도 엉덩이 못지않게 예쁜 분이다.

화순군의 산지는 고생대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고생대의 석회암은  과거 얕고 따뜻한 바다였던 곳에

산호 등이 퇴적되어 이루어진 암석이다.

오늘 산죽길을 많이 만난다

하긴 이 산이 무등산과 지리산의 연결산이라 하잖던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소나무의

앞날도 걱정되고..

그렇게 오래지 않아 

날려 갈듯한 바람속에 정상이 나타난다

백아산(白鵝山)[810m]

 화순군 북동부의 북면에 소재하고 전라남도 곡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화순군 서쪽에 있는 무등산과 멀리 동쪽의 지리산 천왕봉까지

 조망될 만큼 시야가 트여 있는 산이다.

 화순군의 하부에는 석회암층이 있고 

 상부에 석탄층이 형성되어 있어  전라남도에서 석탄과 석회암이 생산되는 유일한 지역이다.

 석회암으로 돌출된 바위는 색깔이 희고 토양이 붉은 편이다

산으로 간 거위들

 목 길게 뽑아 가슴죽지로 퍼득이며 무리지어 산으로 올라가는 거위!

아무리 바람이 세차도 그 거위를 느껴봐야 하는데

너무 가끼이 본 탓일까?

필자의 감성이 무딘 탓일까?

천불봉, 바위굴..여기저기 살피고

바라보고... 흰 거위를 찾기에 여념이없다.

이제 서둘러 내려가자

비를 맞지 않아야 한다.

시원한 바람은 자꾸 발을 붙잡고..

어디를 둘러봐도

신록의 물결은 가슴 뛰게 하고...

점심을 나누고

반대쪽 능선도 바라본다

바위와 소나무, 같이 있어 빛난다

'동행', '공존'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안부에 내려서니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구분 없이 즐거움에 시끄럽다.

여기저기 한잔씩. 한쪽씩 얻어 먹고.. 

기차 바위같은 전망 바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 물결속의 녹음도 즐겨보고..

그렇게 내려오면 갈림길이다.

어디로든 가도 되지만 우린 먼길로 가자

동행자 이 대장님은 이게 자기 거란다.

작년 겨울, 내가 '지고' 올라와 정상까지 가려다

꾀가 나, 잠시 세워 둔건데..

우리 '조정래'님은 

개인사와 민족사가 두루 얽혔고 풍경과 전설까지 어우러진 태백산맥’을

어떻게 그리 썼을까?

벌써 8년전, 5월의 '봉하마을'의 비보에 달려간 나는 먼저 와 있는 그 분을

빗속 처마밑에서 발견하고 달려가 덥석 손을 잡았다  

 

길은 철계단과 바윗사이 틈새로 이어져

 짜릿함이 더하는데..

그런 '태백산맥'를  이 민족 위에 남긴 그에게

밤마다 걸려온 협박전화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아픈 사연이 있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1990년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

1991년 전국 대학생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1위..

 1995가장 읽고 싶은 책` 1, 1996년 독자 선정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1,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1,

1997년 대하소설로 1백 쇄 발간(최초), 1999‘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문인들이 뽑은 지난 1백 년 동안의 소설 중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

숱한 명성들과 함께 커다란 영향력을 증거한다

이 달 말, 덕유 종주를 신청했는데

동행하자고,  같이 걷자고  '꼬시는' 중이다.

꼭 그렇게 되리라...

 

이 풍광은 내려다 볼 때보다 쳐다볼 때가 더 멋있다.

하산하면서 가끔씩 뒤로 올려다 봐야한다..

반대로 올라오는 두 여인을 만났다.

뭔 말이고 말을 붙여보고 싶게 무지 예뻤다.

봄이라 그런가?

급하게 말 붙인다는게 '여기로도  올라오는 길이 있군요?'

 

금방  대답이 돌아온다.

'내려가는 길이면 올라올 수 있잖소?'

본전도 못 찾았다.

힘들게 바위를 떠 바치고 살아가는 나무

그 상처도 아프고...

예쁜 여인에게 그런 소릴 들은 나도 아프다.

안 예뻤다. 화장발 이었겠지..

숲 사이로 방금 내려온

그 곳도 다시 올려다보고

이제 숲은 편안해 졌다.

막바지가 다가오니 아쉼이 몰려든다.

하늘다리 아래 강물처럼 흐르던 운무,

마당바위를 지나 어느 능선에 푸른 철죽나무의 물결

 조정래의 묘사로 더 가슴 뭉클했던

현대사의 고난의 현장...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속에 담아둘수 밖에  없는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

  늘 그랬듯이 또 오늘 두고 길을 떠난다.

'백아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한다

그 진한 아쉼을 거기에 내려놓고..

백아산은 아름다웠다. 게다가 산길도 잘 정비되어 있어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산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껴야 더 크게 다가오겠지..

보물 1683-2호인 '하피첩'霞帔帖

'다산'도, '조정래'도

가장 존경하는 분들로 모시고 살아가는

필자야 말로  진실로 복받은 인생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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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둴이 간다

며칠전 조선일보에 소개된 시 한 편을 옮겨본다

 

엄마의 향수

온종일

어시장 좌판에서

생선 장사하시는

울 엄마 향수는 멘소래담입니다.

 

생선 비린내도

퉁퉁 부어오른 종아리도

멘소래담이면

쏴아아 가라않습니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고마운 향수입니다.

 -김 현 욱(19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