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그리움따라/경기. 서울

경기동두천.소요산(逍遙山587m/주차장-팔각정-하.중.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정상)-공주봉-자재암-일주문-주차장(약 9km 5시간)

산꾼 미시령 2019. 4. 7. 22:26

요산(逍遙山587m)!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70년대 말, 서울에서의 학업생활은 교회청년들과 함께 다녔던 수도권 여러 곳의 산과 들과

강들과 함께 아스라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강촌, 남이섬, 청평, 가평으로 이어지다가 호반의 도시

춘천으로 향하곤 했다.

 

 또, 복잡한 버스를 타고 남양주를 지나 양수리와 팔당, 그리고 양평을 거쳐 원통,

인제로 하여 미시령을 넘어 설악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 시절 1호선 지하철은 청량리까지가 종점이었다,

 점점 그 노선은 성북역까지로 연장되기도 했는데 성북역에서 경원선 열차로  갈아타면,

의정부, 양주, 동두천를 지나 연천의 전국으로 향하면 인산인해였던 여름날 한탄강

유원지로 가곤하였다.

 

 어느덧 수십변의 세월이 흘렀다.

 봉고 버스를 타고 갔던 동두천의 소요산은 어느 코스로 올랐는지 기억조차 가몰거린다.

지금은 서울 1호선 전철은 계속 연장되어 의정부, 양주, 동두천 그리고 소요산역이 생기기에 이른다.

 

  지방에서도 서울 시내를 거치지 않고 외곽고속도로를 통하여 당일치기

산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곳은 신라의 원효대사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원효대사의 설법을 듣고 깊은 감명을 느껴온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정을 나누고

둘이서 낳은 아이가 바로 설총이었다.

 

 거기를 간다. 동두천시와 포천시 경계에 있는,,,

찬란한 봄날,

내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거기를....

 

▲ 동트기전 나서서 5시간을 달려 온

경기도 동두천의 소요산.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등이

 자주 '소요'(逍遙), 즉 산책을 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 아픈꽃 진달래는 봄바람이 KTX를 탄듯,

남녘과 동시에 만발하고.

 

▲ 우린 입장료도 절약할겸, 소요산 역에서 도보로 오르는

그 길을 올라 하백운대 방향으로 갑니다.

 

▲ 1K여를 힘들여 오르면

매표소 방향에서 오르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 오르내림은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바위길이 어제, 오늘 만든 것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습니다.

 

▲ 오늘 코스는 말발굽 같이 생긴 코스를

시계방향으로 6개의 봉을 도는데, 건너, 저 봉이 마지막 공주봉입니다.

 

▲ 중앙 최고봉이 주봉인 의상대,

그 좌측은 나한대.

 

동두천시와 포천시 경계에 있는 소요산(逍遙山587m)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요석공주는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의 딸,

요석궁에 홀로 있던 요석공주와 원효대사를 짝을 이루게 하여

후에 대유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습니다.

 

▲ 아래 '자재암'에서 오르면 만나는

하백운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를 하던중.

 

이 곳 소요산 원효대에 머물며 다시 수행에 전념하였고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조그만 별궁을 짓고

조석으로 원효대를 향해서 절을 올렸다고...

 

▲스팅거 타프? 

뭐 강력한 미사일 이란 말인가? 하여간 미군들이 많던 도시답습니다 낙서도.

 

▲ 공주봉도 있고,  공주가 살던 별궁터 요석궁터라고 불리워지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 하긴 그 후 삼국통일의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시대를 오면서

최근에 한국전쟁까지..

 

▲ 여기 동두천, 양주, 포천, 연천일대는

전쟁터, 치열했던 전장이였으니...

 

▲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면

중백운대를 만납니다.

 

▲ 산 전체가 말발굽 모양으로 생겨

바위가 병풍처럼 노출되어 성벽을 이루는듯.

 

▲ 그렇게 300m의 상백운대를 향하여

다시 내려서고.

 

▲ 거기서 선녀탕 방향으로 하여

자재암 쪽으로도 가는 삼거리도 만납니다.

 

▲ 낙락장송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봄 기운을 머금은  바람은 상쾌합니다.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없고

역사 유물로나 남기를 바랍니. 이런 시설은.

 

▲ 그 높은 양지바른 곳에

작은 묘소가 있는데

증손, 외손의 이름이 죽 이어져 그 수를 헤아립니다.

 

▲ 거기 시원한 바람 앞에 앉아

첫 수확한 '노지' 상추와 함께 점심을 나누었지요.

 

▲ 칼바위 능선...조금은 과장된듯한 이름이지만

날카로운 편마암 암릉과

그 바위곳곳에 세월을 이긴 장송들은 퍽 인상적입니다.

 

▲ 오늘 바위들은

그렇게 칼날 같이 날카롭습니다.

 

봄은 기운이 넘쳐 가고

 봄의 산길은 아직도 여유롭기만 합니다.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 합니다.

 

▲ 유명한 선비들이 자주 산책을 즐겼다...

 산책한다는 말이 소요(逍遙)’ 인데 오늘 길은

험하기 그지없습니다.

 

▲ '이렇게 길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매월당의 여유로움이 부럽기도 합니다.

 

▲ 역사의 깊이가 있는 만큼 운치가 있고,

사연이 있는 만큼 신묘함이 느껴집니다.

 

▲ 그렇게 칼바위 능선을 내려오면

선녀탕과 갈라지는 삼거리....

 

▲ 여기서 나한대 까지 300m...

수행자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일까?  고된 오르막이 기다립니다.

 

▲ 지나온 하, 중, 상백운대는

저렇게 보이고.

 

▲ 나한대에 이르는 끝없는 계단,,,

포만감에 더욱 천근만근 입니다.

 

불교을 수행하며 해탈에 경지에 이른

수행자의 명칭이 나한대라니 쉽게 오를 수야 없는 거지..

 

▲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 그렇게 나한대(羅漢臺571m)

오릅니다.

 

▲ 오늘 오르는 6개 봉가운데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

 

▲ 바로 옆 건너다 보면

최고봉 의상대가 보입니다.

 

▲ 이런 강인함이니

바위속에 터잡고 수십년을 자라겠지요.

 

▲ 그렇게 다시 오르면

주봉(主峰)의상대(義湘臺587m).

 

 

▲ 동서 사방으로 최고의 조망터를

자랑합니다.

 

▲ 젊은날 청년들과 일행되어

여기를 찾았는데.

 

▲ 목 놓아 울게했던 슬픔도

흘러가는 세월 앞에는 무디어지고 잊혀지듯,

기억이 가몰거립니다.

 

▲ 모두들 어느 골골 누구와든지

나처럼 곱게 익어가겠지요.

 

▲ 살짝 개구멍 경고를 뚫고 울타리를 넘어서면

가야할 공주봉은 저리 보이고.

 

▲ 오늘도 멘토는

표정에 변화가 없습니다.

 

▲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은 얼른 내려놓아야..

그래야 '소요'의 평안함과 자유로움이 오겠지요.

 

건너로는 우리가 돌았던 하백운대(440m),

 중백운대(510m), 상백운대(559m)가 아련합니다.

 

▲  북쪽 저 멀리로는

한탄강 다리 건너 있던 연천의 전곡리..

더 뒤로는 북녘 땅 이겠지요.

 

▲ 입이 얼어붙어 '굿-이브닝' 하려다가

'굿- 애푸터 눈!'

그리고 같이 포즈를 취합니다.

 

▲ 이젠 우린 다시 공주봉으로 향합니다.

공주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이제는 두 얼굴로 살지 말자고

이중적인 감정으로 살지 말자고

 

남을 만족시키지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말자고

나 자신을 만족 시키는 삶을 살자고...

 

▲ 저 멀리, 서울 북쪽의 북한산, 수락산

좌측으로 불암산도 보입니다.

대학시절 많이 올랐던 그 곳들....

 

▲ 공주봉은 깊에 내려가 올라야 합니다.

 

▲ 동두천 시내와

산 아래로 군부대들이 정갈하게 보입니다.

 

▲ 봄... 마음이 흔들려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계절이겠지요.

 

▲ 여기서 우측으로 일주문 방향으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주봉은 가야하지 않겠는가!.

 

▲ 누가 알아 요석공주의 마음을 가진

공주님을 만나게 될런지....

 

▲ 하기야 나를 돌아보면

세월 앉은 주름진 얼굴에 공주님이든 선녀님이든

거기 계셔도 무슨 상관 이랴...

 

▲ 방금 지나왔던 나한대, 의상대.

 

▲ 어디 공주님을 만나는 길이 그리 쉬울까..

마지막 긴 호흡을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어디 내 얼굴에만 있을라구.

바위에도, 나무에도 있는 법이니..

 

공주봉(526m)

 여섯 봉우리중 마지막 입니다.

 

▲ 공주님은 안계시고

널다란 평지만 쓸쓸히

요석공주의 말년처럼 그리 서 있습니다.

 

▲ 원효를 따라 설총을 데리고

여기와, 원효를 만나지 못하고 밤낮으로 원효를 향하여 절을 올리던 모자는.

 

▲ 원효의 죽음이후

수행자가 되어 원효의 길을 가지요.

 

▲ 이제 깊히 내려갑니다.

 

▲ 조망좋은 바위에도 오르고.

 

▲ 지겨울 정도의 계단과

너널 길이 기다립니다.

 

▲ 방금 올랐던 바위 조망터.

 

▲ 자재암을 향하여 깊게 내려갑니다.

 

▲ 이 계곡에도 봄이 찾아와

많은 이들이 발을 담그기도 합니다.

 

▲ 자재암을 다녀와야 합니다.

108계단을 넘어서.

 

▲ 108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해탈문.

 

▲좌측으로 내려서면 원효대가 있습니다.

 

▲ 원효대는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곳입니다.

 

▲ 작은 암자를 지나고.

 

▲ 자재암은 다시 저리 올라야 합니다.

 

▲ 이 곳 일대는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재암(自在庵)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로서,

 

원효대사가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합니다.

 

효폭포,,

사람이 서 위는 위치보다 더 깊은 아래로 떨어져 마치 지하로 빨려가는듯.

 

▲원효샘.

고려시대 시인 백운 이규보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

 

▲ 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들이킵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이 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고,.

 

▲  자재무애의 

자재암.

 

▲ 수도권 사람들이 전철을 타고와

계곡 길을 따라 여기까지 다녀가는듯.

 

▲ 위로는 원효대, 좌측으론 폭포,

우측엔 원효굴.

 

▲ 내려오면 가믐속 폭포를  만나고.

 

▲ 그 앞으로는 원효굴도 만납니다.

 

▲ 그렇게 걷기좋은 햇살과 바람을 쐬이며

일주문, 그리고 주차장까지 걷습니.

 

▲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은 그렇게 서 있고, 언제나 다시 올지 모르는.

이 길..

 

▲ 길 옆으로 요석궁터의 포토존도

만들어져 있습니.

 

▲ 작지만 수많은 역사인물들과 관련된 산, 소요산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직을 잃고 여기에 머물기도 했다는 군요.

 

▲ 요석공주를 기려 요석공원도 조성되고

곳곳에 원효와 요석공주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놨습니다.

 

▲ 옛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리어 오던 소요산

 소요산 역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고, 수도권에서 가까워

 여름이나 봄나들 그리고 가을단풍길이 좋겠습니다.

 

▲ 보기엔 산책이나 하다 내려올것 같지만

오르내림이 많고 만만치 않은 산행입니.

 

▲ 그렇게 5시간을 달려와, 5시간을 걸은 소요산 길,

아득한 젊은 날의 추억이 베어있던 날

보드라운 봄바람속 하루의 추억은

오래오래 기억되리니...

감사한 시절, 과분한 은혜 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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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기형도(196019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