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훗날 교육장를 지낸 사촌형이 사는 ’성남‘ 가는 길은 잠실대교를 건너 들판과
산길을 한참 달려야 했다. 당시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A탄리‘ 지금은 성남 신흥동 일대이다
박정희 시절,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도로를 만드는 대역사에 앞서 청계천에 기대어 살던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로 성남으로 이주시켰고 그 반발로 1971년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南漢山)‘에 있는 산성으로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1626년, 인조시대에 축성하였고 일제 강점기를 지내며 많은 파괴가
있었지만 1963년 사적 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8Km의 성은 4문 16암문, 상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등의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
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병자년(1636년), 청의 태종이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은 임진
7년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조선을 다시 27년만에 철저히 능멸하였다.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인조(1623~1649)는 할 수 없이 1637년 잠실의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항복의 예를 행했는데,
이를 역사는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한다.
이번 추석, 김 훈의 소설을 이병헌. 김윤석 주연으로 영화화한 ‘남한산성’이 개봉된다는 소식이다.
아련한 아픈 역사의 서울을 조망하며 남한산성,
거기를 간다.
▲ 현존하는 우리나라 1,200여개의 산성 중
시설이 가장 완벽한 성으로 손꼽히는 남한산성!
성남시 북동쪽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문으로 가는 길. 남문 옆 터널은 성안과 밖을 통과하는데
성 안은 광주시이고, 밖은 성남시이다.
남한산성에는 크게 4문이 있다
▲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그리고 동쪽의 광주 등
서울을 지키는 4대 외곽 가운데 동쪽에 있던 성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유사시 임금이 거처하기 위해 쌓았으므로
성 안에 행궁(行宮)이 73칸 반, 하궐(下闕)이 154칸 도합 227칸이었다.
▲ 4대 문중에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
남문을 지화문(至和門)이라 한다.
▲ 코스를 잘 못잡아 한참을 오르다 되돌아온다.
먼저된 자가 나중 된다.
▲ 계속 보수는 하는데도
답사 길이 너무 성에 붙었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부분도 상당한듯하다.
▲ 성안으로 들어가 동쪽 수어장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 예정이다.
▲ 그 남문 위에서 밖과 안을 넓게 볼 수 있다.
▲ 이제 시작이다
가파른 오름도, 무릅잡게 만드는 내림도,
그리고 솔바람 시원함의 평지도 있었다.
▲ 흐린 날씨지만 아래 성남시가 아늑하게 보인다.
우측으로 가락, 잠실등과 이어진다.
▲ '위례 신도시' 시가지이다. 오랜 군부대 지역이
이제는 신도시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두 개의 산에 걸쳐있는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봉우리는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482.6m)이고,
북쪽으로 연주봉(467.6m)과 이어진다.
▲남한산의 해발 460m나 되는 고원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지로 1971.3.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외침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았던 것을
후세사람이 여러 번 고쳐 쌓아오다가,
조선 광해군(1608년) 때 본격적으로 개축한 것이 남한산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피신하여
만 2천 여명의 병사와 분전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 잠실, 송파가 보이고
더 우측은 올림픽공원과 연결된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다는 123층, 롯데월드타워......
▲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안양유원지로 하여 올랐던 관악산.
더 좌측으로는 청계산이다.
시험을 앞두고 그 청계산 중턱의 기도원에서
한 주간 공부했던 그 빛나던 시절이 있었지....
▲ 야간에 오르면 야경이 혼미하겠다.
▲ 밝은 날은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처이다
좌측부터 청계산,관악산,계양산,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불암,수락산..
▲수어장대(守禦將臺)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동서남북에 세운 네 장대 중
제일가는 장대였으며 그때 세운 장대 중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여기에 서면 성 안이 환하게 내려다보이고
멀리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의 풍경들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 그 경내에 멋진 소나무가
비극의 역사를 침묵하며 그렇게 서 있다.
▲ 인산인해의 시민들은 주로 수어장대까지만 걷는 모양이다.
▲삼전도의 비극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부터 기인한다.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표방했던
중립 외교노선을 반청노선으로 바꾸었다.
▲청나라와 조선을 형제국으로 보고 서로 예우하고자 했던
청나라 태종은 크게 분노하여 정묘년인 1627년 1월에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이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청이나 조선 양측 모두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협상에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이 강화회담에 나서서
청과 형제관계를 맺기로 하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에 합의하자 청나라는 철수하였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그 조약에 비하여 더 많은 재물,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청나라를 멀리하였고 이를 핑게로
다시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은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고,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그렇게 우익문(右翼門)이라 부르는 서문을 지난다
삼전도의 항복을 위하여 나갔던 문이다.
▲ 잠실, 더 우측으로 돌아보면
강동구, 하남시로 이어지고.
▲ 성의 장대함과 그 산중에 맨몸도 오르기 힘든 곳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 힘겨운 역사였을까?
.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하고
삼전도에 내려가 항복하고 만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그리고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인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의 문제 또한 심각했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속가(贖價)를 받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싸도 1인당 25내지 30냥이었고,
대개는 150내지 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에는 1500냥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이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조선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또한 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년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문(戰勝門)이다
승리가 얼마나 절실했겠는가? 그 염원을 담아 붙인 것이리라.
▲병자호란이 끝나고 강화(講和)가 결정된 뒤에도
남한산성을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요충지라고 여긴 인조는
성 안에다 아홉 개의 절을 세워 중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 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僧大將)으로 삼았다.
▲ 하남시인가? 아련하게 내려다 보이고.
▲ 많은 시설들이 터로만 남아있기도 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0년에 걸친 볼모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2개월 만에 비운의 의문사를 당하고,
.
▲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 즉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나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했지만, 참 아쉬운 일이었다.
▲ 성밖 풍경... 나중 안 일이지만
저 코스가 벌봉을 다녀오는 길인데 놓친다..진한 아쉬움.
▲ 깊게 내려서면 장경사이다.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쌓을 때 역승(役僧)들이 머물던 곳으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 비오는 장경사
그렇게 비극의 역사는 말이 없다.
▲ 놓치고 지나친 벌봉... 아쉽게 그렇게 보이고..
▲ 송암정 터...
유난히 소나무가 멋진 곳이었으니..
▲ 비극의 병자호란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사대부 집안의 부녀도 순절한 사람이 많았다.
▲ 또한 바다에 달려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뒤
물에 빠져 죽어 머리 수건이
어지러운 구름처럼 물 위에 떠올랐지만 어느 집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난리가 평정된 뒤에,
되놈에게 붙잡혀 간 사람을 거짓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 하여
정문(旌門)을 세운 사람도 더러 있었다.
▲ 그렇게 깊게 내려서면
동문(左翼門)이다. 옆으론 도로가 나고
▲ 도로가에 세워진 안내판...
도로로 인하여 성은 잠시 단절된다.
▲ 대부분 동문으로 답사는 마치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성안으로 하여 출발지 남문으로 향하지만
▲ 이제 4문은 끝나고 우린 가파르게 한참을 올라
'옹성암문 3,2,1로 향한다.
▲ 비극의 역사에서 환향녀되어 돌아오지만
가문의 정절이라는 이데오르기에
정문(旌門)을 세움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들이 있듯
▲ 조선시대에 세워진 열녀비나 효자비 중
십중팔구는 그러한 사연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병자호란이 끝난 3년 뒤인 1639년(인조17)
삼전도에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까지 세워졌으니...
▲ 역사 속에서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의리
대의명분 때문에 나라에 큰 치욕을 남긴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
▲ 비오는 탓도 있지만
자랑스런 승전의 성이 아닌 치욕의 현장으로 숙연하다.
▲ '팥배나무' 정말 배처럼 생기고
팥처럼 앙증맞다.
▲ 벌써 출발지 남문은 1K가 남지 않았다.
▲ 제2 남옹성터를 지난다
▲ 불룩하게 튀어 나간 터에는
여전히 야생화가 아름답다.
▲ 밖을 내다보면 거대한 이중 방어벽이
전쟁의 거대함을 증언하고.
▲ 남한산성에는 이런 옹성이 5개가 있었다.
▲ 동쪽 광주시의 정경...
말없이 고요하다.
▲ 이제 끝나가는 그 답사 길에는
아름다운 가을이 내렸고.
▲철마다 꽃은 피고
하얀 눈도 쌓이겠다 세월은 그렇게 간다.
▲그렇게 출발지 남문에 닿으면
답사는 마감되는데...
.
▲ 성 안으로 들어 왔던 길...
비가 내린다.
▲ 성 안에는 정성된 탑들도 보이고.
▲ 성 안 관리들의 공덕비도 즐비하다
환란의 현장이니 덕 있던 관리들도 있었겠지.
▲ 이제 성 밖으로 나가려한다.
▲ 버스 주차장까지
안늑한 숲 길을 오르내린다.
그렇게 새벽 4시간을 달려 갔다가 4시간을 걷고
다시 4시간을 버스 전용차로로 달려 내려온 하룻 길..
비극의 역사 때문인가 소리없이 내리는 빗물 때문인가...
그렇게 숙연한 하루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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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 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 밤
잊었던 상처인가
멀리 떠나간 내 사랑은
기약조차 없는데
애가 타도록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山行..그리움따라 > 경기. 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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