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해남. 두륜산(頭輪山,703m/ 쇄노재-위봉-투구봉(왕복)-구름다리-두륜봉-만일재-북대암-대흥사/6H)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나의 학창시절은 ‘글씨 잘쓰는 사람과 글 잘 쓰는 사람’을 몹시 그리워했고
그리 되고자 노력했다.
되돌아 오늘에 보니 이 것도 저 것도 이루지 못한 회한이 남는다.
전남 해남의 두륜산 아래에는 2018년 유네스코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와 더불어 7대 산사로 등재된 ‘대흥사’가 자리한다.
거기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두 사람의 현판이 있는데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의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이다.
작가 정강철 장편소설 ‘소설 원교-말 없는 붓, 외로운 먹’이란 소설에 의하면 이광사 집안은
조선 왕족 혈통의 명문가였으나 정치 사건에 휘말려 폐족된다. 백부와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원교 자신은 유배령을 받고 함경도 부령에서 7년,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을 살았다.
신지도에 갇힌 그는 끝내 다시 뭍을 밟지 못했고 양명학을 공부했음을 소설은 알려준다.
소설은 그가 어떻게 창조의 길로 나아가 ‘동국진체(조선의 글씨)’를 완성했을까.
작가가 온 힘을 기울였음이 느껴진다.
그보다 80여년 늦게 태어난 추사를 보자, 그는 당신의 최고의 학문이라 자랑하는 북경에 유학했다
신학문과 신예술의 기수가 되어 기고만장했고 50대에 형조참판에 오르고 30년만에
동짓달 외교사절단인 동지부사가 되어 북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영화도 잠시, 정변을 맞아 사형선고를 받았고 벗인 영의정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남아 절해고도 제주도에 귀향간다. 귀양길 추사는 전주, 남원를 거쳐 완도로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다.
추사는 원교의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이가 이광사인데 어찌 그의 글씨를
현판으로 붙여놓고 있는가’ 있는대로 호통을 친다.
초의는 하는 수 없이 원교의 현판을 내리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세월은 흘러 제주도에서 7년 3개월, 햇수로 9년, 귀양살이중 부인상을 당했고 회갑을 맞기도 했다.
외로움과 쓸쓸함과 억울함의 세월동안 추사는 글씨를 썼고 개성적인 글씨 추사체를 완성한다.
63세의 고령으로 풀려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렸고 초의를
만나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던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 도로 달아주게, 내가 그때 잘못했네‘
추사는 영광의 북경이 아니라 아픔의 제주에서 오늘의 추사가 되었다.
유홍준은 ‘원교의 글씨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손칼국수 같고, 추사의 글씨는
탕수육이나 란자완스같이 획이 살지고 윤기가 있다‘고 했다.
거기를 걷는다.
온 산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단풍이 쓸쓸한 낙엽으로 떨어지며
겨울을 준비하는 이 때…
한반도 땅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미처 물러가지 못한
가을의 뒷자락을 붙잡는다.
꼭 대흥사에 들려 조선의 두 명필, 원교와 추사의 글씨를
꼭 보고자 한다.
거기를 걷는다.
늦가을 정취를 맛보고자 한다!
▲어둑한 시간 출발하여 4시간, 한반도 땅끝 해남의
'쇄노재'에 선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고
단풍 사이에 머물고 있는 늦가을 정취.
▲오늘 모든 코스는 암릉 길...
네 발로 기어오르는 길.
▲ 저 건너가 투구봉...
▲ 장수 7명은 제일 산악회의 엎저버로 참여했다.
여성 한 분을 모셔 사진을 찍는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풍경과
섬들이 점점이 수 놓인 다도해까지 땅끝 해남.
▲두륜산의 높이는 703m,
땅 끝에서 남해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 있다.
▲ 이 산은 주봉인 가련봉(迦蓮峰, 703m)을 비롯하여,
두륜봉(頭輪峰, 630m)ㆍ고계봉(高髻峰, 638m)ㆍ
▲ 노승봉(능허대 685m)ㆍ도솔봉(兜率峰, 672m)ㆍ
혈망봉(穴望峰, 379m)ㆍ향로봉(香爐峰, 469m)ㆍ
연화봉(蓮花峰, 613m) 등 8개의 봉우리로 능선을 이룬다.
▲ 1979년 12월 두륜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위봉을 지나 3거리에서 배낭을 벗어놓고
투구봉을 다녀온다.
▲바다를 달려오느라 더욱 차가워진 바람...
그래도 봄 날같은 온화함.
▲드넓은 평야, 바다를 바라보는 그 곳에 우뚝,
장군의 투구모양 서 있다.
▲깊히 오르내리림은 각오해야 하고
잊지 못할 비경을 가슴에 담는다.
▲힘겹게 오르지만
안 힘든척 해보기도 했지.
▲엉덩이가 크거나 배가 불룩한 사람은
여기를 통과할 수 없었다.
▲오르다 바라보는 암산의 위용,
뒤로 좌측이 두륜봉
가운데는 만일제, 그리고 우측으로 최고봉인 가련봉이다.
▲좌측이 위봉이었고
뒤 삼거리에서 여기를 온거지.
▲아름다운 여인을 모시니
미소가 돌았다.
▲못내 떠나기 아쉬운 가을을 붙잡아
내려온 땅끝, 아름다운 날이다.
▲지질학적 설명이야 의미가 없고
태고적 신비로움에 놀라기만 하자.
▲개인일까 도립공원 관계자일까
사다리의 고마움을 감격하기도 했다.
▲고인은 숯댕이 눈을 갖으셨나보다
'무탈하니 산이나. 댕겼으면 좋겠다..'
고인을 향한 가족, 친구들의 마음이 절절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시절 지질학적 사건이
이런 조각품을 만들었을까?.
▲거기의 명물 하트바위...
쪼개진 하트가 맘에 걸린다.
▲설설 기어 내려와
다시 설설 기어 내려간다.
▲조금은 힘들어도 좋다.
오랜 기다림의 화답이려니
조금 쓸쓸해도 좋다
빛바랜 홀로서기의 증거이므로....
▲그리움도 묻어났고
외로움도 묻어났다
문득 구간구간 생각나는 싯귀가 생각났다.
▲다시 3거리에 오르고
투구봉의 아찔함을 달랬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야 하는 길
반든반들 바위들이
노승의 머리를 닮은듯 했다.
▲서남방향으로 대둔산...
방송 시설이 있다.
▲여러번 밧줄에 무릎은 물론이고
어깨가 얼얼 했다.
▲수직 직변을 밟고 둥근 쇠를 붙들고
아찔한 기어오르기.
▲ 바위에 구멍을 뜷은 것도
그렇게 꼭 올라야 하는건가 그런 생각도 하고.
▲되돌아 보면 공깃돌 올려 놓은듯
아득했지.
▲땅끝 기맥이다. 이 기맥은 호남정맥 국사봉과
삼계봉 사이 노적봉에서
분기하여 최고봉 월출산을 지나
▲ 도갑산-달마산-도솔봉으로 내달리다가....
땅끝에서 남해바다로 스며드는 121k의 산줄기.
▲두륜산은 '큰 언덕'이란 의미의 '한듬' 이던 것이
한자어 '대듬'으로 바뀌고 대둔산으로 불리다가.
▲백두산(白頭山)의 '두'자와 중국 곤륜(崑崙)산맥의 '륜'자의 조합으로
두륜산으로 불리다가 한자까지 두륜산(頭輪山)으로 바뀐다.
▲하늘다리를 오르는 길은 아득했다.
▲되돌아 보면 아득한 풍광.
▲드디어 하늘구름다리를 만난다
얼핏 코끼리 코를 닮은듯도 하고..
▲자연석이 이뤄 놓은무지개형,
일명 홍교라 불리지만 직접 올라가 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 위 너른 바위 전망터에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지만 햇살이 따뜻했다.
▲그저 그냥 좋은 날,
기분 좋아 소리치고 싶은 날...
행복함이란 마음이 가슴으로 가득했다.
▲늘 헌신적인 박기봉 대장님...
돼지목살, 삼겹살 여러개를 철판까지 짊어지고
그렇게 기어올랐던 거다.
▲맑음 날이면 저 멀리 한라산까지 조망된단다.
우측으로 완도 바다들...
우측 산줄기는 주작-덕룡산으로 흐른다
▲가을은 마음이 흔들려도 포기하지 말아아햘 계절,
높은 건물을 지으려 땅을 깊게 파듯이
아득한 한반도의 끝은 겨울 채비를 한다.
▲포만감으로 행복한 님들...
존경하는 님들.. 사랑에는 조건이 딱 하나 있어요
'무 조 건'
▲거기를 떠나며
우리에게 오지랖을 지워달라고
우리의 오지랖 몇 마디에 누군가는 용기를 잃고,
누군가는 도전을 포기했던 것을.
▲그렇게 두륜봉에 선다.
최고봉은 건너 가련봉이지만 오늘은 우리 여기까지만 걷기도 했다.
▲한 형님이 그랬다
난 이제 이 산 마지막일 거다...
어디를 가든 그런 생각이 드는 나이였지만 ... 짙은 가을만큼이나 세월이 아팠다.
▲다시 계단으로 내려와 돌아가는 길,
올랐던 두륜봉 옆 모습은 이랬다.
▲저기가 최고봉 가련봉이다. 그 너머로는 오심재, 노승봉
그리고 케이블 카가 있는 고계봉으로 이어진다.
▲만일재에 선다. 늦은 가을 억새는 하얀 잎은 다 떨구고.
짧은 연화선경길 같은 풍광을 나타낸다.
▲저기는 방금 내려온 두륜봉....
짙은 그리움이 내려온다 그리움을 품지않고 살아가는 이는 없을거야
닿을 수 없는 인연을 향한 아쉬움.
▲거기서 편안한 왼쪽 길로 낼려갈 수 있지만
우린 문화재를 보려 북미륵암 방향으로 향한다
만일암지를 반굴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유서 깊은 대흥사의 만일암...
그 자리 앉음이 비범했다.
그 앞으로는 '천년수'가 위용을 자랑한다.
▲천년수, 느티나무다. 수령 1100년, 둘레 9;6M
1999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18년 전라남도 정도 천년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위로가 필요한 가슴...
나무를 안아 위로를 받고 싶은 두 사람.
▲꼼꼼히 천년수의 전설과 내용을 공부한다.
▲북미륵암으로 가는 길은 600여 m
남쪽 기슭은 다뜻했고 평화스러 길.
▲인간은 외로움이 사무치면
자신의 그림자라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사랑을 줄 대상을 찾지못해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면 어느 순간 곪는다고...
▲이름하여 '솔로 감기 취약론'이란
그럴듯한 '구라'를 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사시사철 감기를 달고 살지.
▲거기에 자리 잡아 한 6개월 수행을 해 볼까?
아마 반쯤 도사는 되지 않을까....
▲북 미륵암이다.
가련봉을 너머 노승봉- 오심재로 하여 여기로 오기도 한다.
여기서 만일재는 0.8K, 대흥사 대웅전은 1.6K내려간다.
▲두륜봉- 만일재- 가련봉- 노승봉- 오심재- 고계봉...
참 아름다운 암릉 구간이다.
▲여기에 온 이유는 국보 제 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보기위해서다.
나라의 변고가 생기면 심하게 땀을 흔린다는...
▲닫힌 문을 살면시 열고 마애여래 좌상을 본다.
▲삼층석탑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않고
그렇게 서있다.
▲용화전, 마애여래좌상,
보물이 있는 건물이다.
▲북미륵암은 두듄산 북쪽에 있다하여 이름을 얻었다.
남쪽엔 남미륵암이 위치한다.
▲거기서 1.6k 조금 가파은 길은
만추의 서정을 안고 걷기 좋다.
▲드디어 만나는 대흥사.
2018년 유네스코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와 더불어 7대 산사로 등재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를 비롯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한 조선의 명찰이다.
▲서산대사는 85세에 묘향산에서 입적하면서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당신의 의발을 두륜산 둘 것을 유연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시신을 다비하면서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영골은 금강산 유점사에,
금란가사와 발우는 여기 대흥사에 봉안했다.
▲연리목과 비슷하게 '연리근'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득한 세월을 증언한다.
▲'침계루'는 '대웅보전', '천불전'과 함께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글씨.
▲드디어 대웅보전을 만난다. 유배가던 추사가 당상 떼라고 했던
원교의 글씨 현판을 제주도 7년3개월 유배후
다시 여기를 들러 다시 붙이라고 했던 현판이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대웅보전(大雄寶殿)..
유홍준은 ‘원교의 글씨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손칼국수 같다했고
▲추사의 글씨는 탕수육이나 란자완스같이 획이 살지고 윤기가 있다‘고 햇던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1786-1856)의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
▲한참을 서서 역사의 현장을 가슴 떨림으로 음미했다.
남녘의 사찰답게 '파초의 꿈'의 파초가 자라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느낀다' 했던가
댓돌 하나하나에도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듯 경건스럽다.
▲다시 보호수를 지나며 이 나무는 '초의선사'를 봤을까?
초의는 차문화를 이끌었던 다성(茶聖),
그는 40여년간 머물며 다도를 중흥시킨 일지암이 자리한다.
▲일지암을 가보고 싶었지만, 아쉽다.
40여년간 그에게 사미계를 받은 40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명, 선교와 잡공을 받은 이가 수백명이다.
언제 다시 대흥사에 오면 그 일지암을 꼭 가보려한다.
▲뒤로 가련봉 우츠으로 만일재- 두륜봉이다.
좌은측 반들반들 노승을 머리를 닮은 노승봉.
▲이제 역사의 역장 대 사찰을 떠나려한다.
여기서 주차장까지 어어지는 장춘동(長春洞) 숲길.
▲'봄이 가장 오래 머문다.'는
이름을 지닌 이 곳에선 가을 역시
쉬이 떠나지 못한다.
▲아! 대흥사의 역사의 현장
조선의 억불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 내어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답다.
▲초의선사 사리탑을 찾으려 달려갔것만
문이 굳게 닫혀있다.
진한 아쉼이다.
▲두륜산 대흥사...
어느시절 마음 맞는 연인과 여기를 여행한다면
일지암의 초의선사 자취와,
서산대사와 사명당과 처영스님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를 찾아 정조대왕의 글씨도 보고싶다.
▲느릿느릿 은은한 단풍 숲 사이에서
느릿하게 머물고 있는 늦가을 정취를 맛본다.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 숨거나....
▲애기 단풍 고운 길을 걸으며
김지하의 애린의 시도 움미했지.
▲천년고찰 대흥사, 그 앞으로의 아름다운 길과
역사를 만나는 가슴 떨림,
우람한 두륜산의 암릉길... 땅끝 해남의 가슴 벅찬 하루였으니.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다산 정약용의 고장 강진.
거기 맛있는 식당에서.
▲마음 따뜻한 님들과 뜨거운 곱창 전골로
즐거움을 나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공유하며....
▲유홍준이 어느덧 40여년전 나의 문화답사기를 시작할때 제1권으로 썼던
남도답사 일번지....강진, 해남, 장흥....
어느 한적한 은퇴의 시절, 구석구석 역사의 흔적을 찾아 걸어보려한다.
땅끝, 해남 그리고 두륜산, 대흥사.....
오래오래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으리...
--------------------------
"애린"/김지하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 숨거나...
홀로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